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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무으야우 Jul 09. 2024

노브라

노브라에 대한 단상

0. 노브라. 브라를 착용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8년째 브라 없이 살고 있다.


1.1 2019년, 프랑스 파리에서 교환학생으로 머무르던 시절, 지금도 눈앞에 생생한 그림은 가슴이 큰 여성이 노브라 인 채로 티셔츠 한 장을 입고 러닝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난 깜짝 놀란 나머지 예의 없게도 한참 동안 그분의 가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 찰나에도 이런 생각들이 스쳤다. 헉 브라를 안 했네, 저렇게 타인의 가슴 모양이 생생하게 나에게 들어와도 되나라고 조금 부끄럽던 중에도 그녀의 가슴은 이리저리 출렁이고, 자유분방하게 쏟아 내릴 것처럼 상하운동을 하며 지나갔다. 


1.2 이 이미지는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는 '가슴'이라는 느낌보다는 그저 다리의 움직임, 손의 움직임의 느낌 정도로만 느껴진다. 운동을 하니까 움직이게 된 한 신체부위의 움직임이라 느껴지지, '브래지어'라는 것을 착용하지 않아 황당한 이미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1.3 가슴에 대한 문제에 덧붙여 유두에 대한 문제는 늘 있다. 난 여성의 유두뿐만 아니라, 남성의 유두도 싫어. '제3의 눈'에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어의 문제. 그런데 유두는 죄가 없다. 그저 튀어나왔을 뿐. 


2.1  한국 사회에서 '노브라'는 그 말 자체에서도 느껴지듯, 있던 것을 부정하는 것, 즉 이미 여성들 몸의 일부에 브래지어를 포함한 듯하다. 그러니까 브래지어를 차지 않는다면 난리가 나는 것이다. 브라를 착용하지 않은 사진들을 SNS에 올려서 '노브라 논란'이라는 꼬리표로 욕을 먹던 연예인이 있었는가 하면, 브라만 차지 않으면 페미니스트 논란으로 기사거리가 나곤 한다. 여성이 브래지어가 없이 다니면 세상에 큰 해악이라도 끼치는가. 브래지어는 모두의 약속인 듯, 차지 않으면 굉장히 문란한 짓(요즘엔 시대를 앞서가는 짓이라는, 기존보다는 약한 워딩도 사용하지만)을 저질렀다는 듯 기사는 쓰인다. 마치 '브래지어 실종 사건'을 목도하고 통탄한다는 반응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2.2 브래지어가 가지고 왜 이러냐는 나의 의견에 사회적인 시선에 너무 무신경하다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여성의 몸을 남성의 몸보다 더 에로틱하면서도 은밀한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시선. 분명히도, 핍진하게 존재한다. 허나 난 그 시선에서 벗어나 그저 신체를 신체로 바라봐주면 좋겠다는, 또 다른 시선, 또 다른 숨 쉴 틈을 원한다.


3 브라를 해야 한다면, 편하면 좋겠지 않냐는 그런 사고에서 시작되어 그래도 몇 년 사이에 기존 브라보다 더 편하게 입을 수는 브라렛, 그리고 유두만 가리는 니플패치, 각기 다른 가슴모양을 반영한 맞춤 브라 등 다양한 제품들이 사회에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브라를 하면 브라에 달린 와이어나 조임새 때문에 숨이 잘 안 쉬어진다, 브라를 하면 땀이 차서 가슴이나 등 쪽 피부가 뒤집어진다, 너무 가격대가 높은 맞춤 브라 등 여러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는 여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4 나는 브라 무용론을 펼치고 있는 건 아니다. 나는 그렇게 큰 가슴을 갖지 못해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었지만, 가슴이 매우 큰 경우에는 허리나 목에 무리를 줄 수 있기 때문에 받쳐 줄 수 있는 브라가 꼭 필요한 여성들도 있다. 단지, 브라를 하지 않는 걸로 이렇게까지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5.1 나도 과거에는 여성의 가슴을 보는 것이 어딘가 불편했고, 부끄러웠다. 8년이나 노브라로 살아온 나도 솔직히 대놓고 내 가슴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 때 여전히 조금은 움츠러들기도 한다. 나도 과거에는 오히려 브래지어를 차야 잠이 왔고,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 갑갑함마저도 나에겐 안정감이었고, '브라'라는 존재의 불편은 적응기간을 거쳐 부재의 불편까지 이르게 되었다.


5.2 브라를 처음 벗었을 때 다 벗은 느낌이 든 것도 사실이다. 뭐든 있다 없을 때 그 존재가 더 크게 느껴지듯, 브라 또한 그랬다. 허전하고, 너무 이상한 느낌. 그런데 이러한 부재도 편안함에 이를 수 있다. 부재 또한 적응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믿을지 모르겠지만, 이젠 나는 브라로 봉긋해진, 유두가 튀어나오지 않은 상체 라인보다 본래 신체의 라인이 잘 드러났을 때 더 예쁘고 패셔너블하게 느껴진다.


6 나의 의견이 여성 가슴에 대한 에로티시즘을 억제하는 의견일 수 있다. 남자 가슴, 여자 가슴 다 똑같지 않냐며 어떤 감흥을 죽이는 일일 수도 있으니까.((사실 나에겐 똑같다.)  어쩌면 잘 입고 있는 사람한테 벗어라는 종용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나는 그저 나의 삶 속에서 노브라가 편해서, 내 몸의 굴곡 그 자체가 좋아서 노브라로 다니는 가슴이 의미적으로도 좀 더 자유롭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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