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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콘텐츠스튜디오H Jul 20. 2020

직장 내 괴롭힘 신고 전 알아야 할 것

머리는 차갑게, 감정은 뜨겁게, 행동은 용의주도하게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하고 결과를 듣기까지는 정말 험난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같은 업무 공간에서 가해자와 매일매일 마주쳐야 했고 조사 과정에서 이어지는 조직의 성의 없는 조치에 또다시 실망해야 했다. 어떻게 보면 나는 퇴사를 선택함으로써 직장 내 괴롭힘과의 싸움에서 진 것이다. 하지만 같은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는 수많은 분들은 나보다 더 똑똑하고 용의주도하게 이 문제를 해결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1. 나의 갑질 피해는 내가 알리자.

내가 가장 간과했던 것은 주변에 나의 피해를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감사실에 신고를 한 후, 사람들의 반응은 '뭘 그 정도 가지고 신고까지..'였다. 내가 괴롭힘 때문에 힘들어한다는 건 주변 사람들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는 건 다른 일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공감하지만 '공식적으로'는 공감받지 못한 것 같았다. 간부급 직원들에서는 '을질'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저렇게 멀쩡하게 일 하고 있는데 무슨 피해를 당했냐는 말이었다. 업무에 충실하는 게 좋은 여론을 형성할 수 았다고 생각한 것이 너무 안일했다. 슬픈 사실이지만, 피해자는 충분히 피해자다워야 설득이 가능했다. 

'힘들다, 어렵다, 괴롭다' 등등 감정적인 언어들로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 사실을 틈틈이 알리고 공감을 얻는 과정이 필요했다. 사실 별로 내키지는 않았다. 나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이야기한다는 건 상당히 자괴감이 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당한 건 분명 폭력이고 이로 인해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충분히 어필할 필요는 있다.  

가해자는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뉴스 보도가 나간 뒤, 가해자는 정부청사 복도를 울면서 걸어 다녔고 만나는 사람마다 괴롭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묵묵히 업무만 열심히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가해자의 눈물에 공감해버렸다. 그래서 한동안 '부하직원에게 당했다, 보도가 잘못 나갔다'는 이야기에 시달려야 했다. 넘쳐나는 괴롭힘의 증거들을 철석같이 믿었고 조직에서도 성실하게 조사해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조사담당자에게는 그저 골치 아픈 업무일 뿐이었다. 역시 내 일은 내가 챙겨야 한다. 

  

2. 부지런히 기록하자. 

- 조사는 굉장히 보수적으로 진행된다. 아무리 피해를 호소해도 증거가 없는 경우에는 인정받지 못했고 증거의 효력이 없다며 피해 사실을 인정받지 못하기도 했다. 심지어 가해자의 거짓말까지 내가 증거를 모아 증명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당했던 괴롭힘에 대해서 구체적인 날짜와 시간, 장소, 목격자, 폭언의 내용 등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괴롭힘은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알 수 없다. 회의를 하다가 불쑥 폭언을 할 때도 있고 업무 회의를 한다면서 불러내 폭언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뜬금없이 복도에서 마주치게 될 때에도, 외주 업체와 회의를 할 때에도 괴롭힘은 이렇게 일상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그때마다 녹취를 한다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이다. 

하지만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핸드폰이나 업무 수첩에 자필로 기록을 해놓았던 것도 증거가 될 수 있다. 기록이 지속적이고 구체적일수록 그 가치는 더 커지게 된다. 녹취, 사진, 자필 기록, 문자, 이메일 등 무엇이든지 반드시 구체적인 기록으로 남겨둬야 한다.  


3. 외로운 싸움은 하지 말자. 연대의 힘! 

- 이 문제가 조직 내에서 해결될 거라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조직에서는 최대한 문제를 크게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아예 무혐의로 덮으려고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언론 보도였다. 이 과정에서 노조는 큰 도움이 되었다. 노조의 도움으로 소속 노무사와 상담도 할 수 있었고 인권위원회 등 다양한 외부기관에도 연결이 될 수 있었다. 노조에서 적극적으로 성명을 내는 등 우리의 피해 사실을 알리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업무 분리가 안 되는 등 미흡한 후속 조치, 조사 진행에 대한 감사실의 불성실한 답변, 신고 이후에도 계속되는 가해자의 갑질 등 개인적으로는 대응할 수 없었던 일들이 노조를 통해서 해결이 되기도 했다. 


4. 지치지 말자. 약해지지 말자. 

- 신고를 하는 순간 이전의 직장 생활과는 완전히 다른 태세를 취하고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단단해져야 한다. 직장 내 괴롭힘은 상당히 복잡한 문제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야기가 많이 다르고 부서의 특징, 주변인의 진술, 채택된 증거의 배경과 맥락 등 각 사안마다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많다. 신고 이후에도 피해 사실을 증명하기까지 여러 번의 조사를 거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해결까지는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린다. 나의 경우도 2019년 6월 말에 처음 신고를 하고 2020년 2월 말에야 가해자의 징계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이 기간 동안에도 가해자의 괴롭힘은 틈틈이 계속되었고 업무 공간에서 가해자와 매일매일 마주쳐야 했다.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도 굉장히 예민해지고 업무에 집중할 수도 없었다. 이 시간 동안 잘 버티는 것이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과정을 버틸 수 있는 명분을 찾아야 했고 그것은 가해자의 징계였다. 분명 합당한 징계를 받을 수 있다는 기대로 8개월을 버텼지만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결과를 듣는 순간 버틸 이유는 완전히 사라졌다. 

    

5. 갑질의 판단 기준은 오로지 나뿐 

- 나의 고통에 다른 사람의 잣대를 들이댈 필요는 없다. 

'나도 그 정도는 당하고 일한다, 옛날보다는 나아진 거다, 괜찮아 보이는 데 진짜 괴롭힘 당한 거 맞냐.' 

신고하자마자 시작되는 이런 이야기들 역시 또 다른 가해였다. 매일매일 '내 행동이 과연 옳았을까'라는 의심을 스스로 하게 된다. 좀 더 참을걸, 괜히 신고했나, 같은 끊임없는 자기 검열에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내가 당한 괴롭힘은 나만 알고 있었고 그 상처는 누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을 굳이 설득시킬 필요도 없고 나의 문제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함께 연대하면 된다. 타인의 괴로움에 공감 못하는 사람들, 이들 역시 가해자만큼이나 나를 힘들게 했다.  잘못은 가해자가 한 것이지 내가 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권고사항' 일뿐 절대 가해자를 이 법으로 처벌하지 못한다. 

나도 이 법을 믿고 신고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규정이 없어서 처벌 불가'였다. 처벌을 원한다면 '명예훼손, '모욕죄' 등으로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 다행히 공무원이기 때문에 인사혁식처 징계위원회까지 갈 수 있었다는 것이 운이 좋다면 좋은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적용되는 거의 모든 법과 규정은 가해자 중심이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심지어 가해자의 징계 결과도 직접 못 듣는다.  


끝으로 

주눅들지 말고, 자책하지 말고, 목소리를 내는 것. 가장 중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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