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을 가장한 조직의 방관
중립은 가해자에게만 이로울 뿐 피해자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침묵은 결국 괴롭히는 사람 편에 있는 것이다.
‘엘리 위젤’의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 중
신고를 한 후 또 다른 어려움이 생겼다. 갑질에 대해서 공정하게 조사를 해줄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조직에서는 이 일을 덮자는 의견이 있었고 실제로 그런 노력들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관리자여서, 같은 팀원이어서, 어느 쪽도 엮이기 싫어서, 잘 몰라서 사람들은 각각의 이유로 중립을 지켰다. 하지만 우리가 당했던 갑질은 분명 가해자의 잘못이었다. 충분한 근거가 있었고 많은 목격자가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사적인 자리에서는 '분명 가해자의 잘못이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중립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인 것처럼 숨어버렸다. 아무도 공개적으로 이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고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일 없이 잘 돌아가는 조직이었다. 가해자는 이러한 조직의 분위기 뒤에 잘 숨어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 분통 터지고 억울한 건 우리뿐이었다.
이렇게 중립은 무관심으로, 곧 침묵으로 이어졌다. 본인에게 못 맞추면 나가라고 했던 협박을 같이 들었던 사람들도, 물건을 집어던지고 비난을 퍼붓던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목격자도, 가해자의 갑질 때문에 퇴사했던 4명의 직원을 지켜봤던 팀원들도 모두 침묵했다. 마음만큼은 도와주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고도 했다. 마음이라는 게 무엇인지, 어쩔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지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누군가는 침묵을 깨고 가해자에게 의견을 밝혔다가 똑같이 괴롭힘 당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침묵하는 게 당연할 수도 있다. 괴롭힘 당하는 것이 곧 내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다 같이 침묵하는 것보다 다 같이 행동했다면 어떠했을까. 처음에는 공무원 조직이라는 것이 다 그런 줄 알았다. 조직 안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 었으니까. 하지만 더 보수적이라고 알려진 다른 공무원 조직에서는 최소한 갑질에 대해서 만큼은 침묵하지 않았다.
국장도 중립이라는 방패로 침묵했다. 판단을 했으면 행동하는 게 내 상식에 맞았다. 하지만 판단은 했지만 행동하지 않았다. 본인의 손 끝조차도 더럽히지 않겠다는 결벽증 환자처럼 이 일에 대해서는 전혀 의견을 내보이지 않았다. 이따금씩 우리를 불러 원하는 게 뭐냐,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라며 물어보는 것 외에는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에게 그저 민원인이었다.
차라리 그냥 가해자를 옹호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그렇게 색깔이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 일찌감치 기대를 버릴 수 있었으니까.
신고를 취하했으면 좋겠다며 어떤 직원이 했던 말이었다. 그들에게는 뭐가 좋은 건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이 사안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아무 행동하고 싶지 않은 게 이 조직의 목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