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콘텐츠스튜디오H May 21. 2020

갑질의 새드 엔딩

가해자가 다시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출근했다! 

나는 왜 신고를 했을까 

처음에는 계속 일하고 싶었기 때문에 문제 제기를 했다. 내가 당한 괴롭힘은 분명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의 말대로 술 먹고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임기제 공무원이라는 불안정한 나의 신분을 이용한, 괴롭힘을 위한 괴롭힘이었다. 하지만 내가 속한 조직에서는 이 사안에 대해 그저 상사와 직원 간의 불화 정도로 인식했고 퇴사하는 그 날까지도 변함없었다. 

결과를 통보받은 가해자는 다시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출근했고 노골적으로 우리를 뺀 회의를 소집했다. 자랑스럽게 징계 결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한테 다시 업무 지시도 할 것이며 보고도 받을 거라 했다. 회의의 내용들은 팀원들이 고스란히 전해 주었다. 조직에서도 공식적인 절차는 모두 끝났으므로 더 이상의 문제제기는 하지 말라는 입장을 이야기했다. 이제 끝난 것이었다. 그래도 100m 중에 70m는 열심히 달린 줄 알고 뒤를 돌아봤더니 그저 제자리 뛰기만 열심히 한 느낌이었다. 억울함과 분노, 허탈함은 온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았다. 


그런다고 바뀌겠어요? 

사내 정치가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떠들던 어떤 공무원이 한 말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한 번의 문제 제기로 조직문화가 바뀌는 건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다. 나 같은 임기제 공무원, 그들 입장에서는 '외부인'이 내는 목소리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 한 명이라도 이 이야기에 공감하고 옆자리 직원에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아?'라고 얘기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괜찮았다. 이것이 나의 신고 목적이었다면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서 내 목소리를 냈을까?

나의 억울함을 들어 달라는 하소연도 아니었고 조직 문화를 바꿔보겠다는 정의감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분명 부당한 일이었다. 부당한 일이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었다.  한 사람의 갑질로 인해서 지난 2년 동안 3명의 직원들이 차례로 퇴사를 했고 또 다른 세 명의 직원이 동시에 문제 제기를 했다면 이건 분명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될 일이었다.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어떤 의도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나와 같이 신고한 주무관은 아이들 때문이라고 도 했다.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 어디에선가 일을 하게 될 텐데 내가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아이들도 똑같이 당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다고 했다. 


하지만 부당함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게 조직에서는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조직에서는 양측의 주장이 다르고 처음 있는 일이라서  '판단하기 어려웠다'라고 했다. 그럼 판단을 해야 하는 게 조직의 역할이 아닌가. 판단이 어려운 게 아니라 아예 판단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가해자가 조사 과정에서 80% 거짓말을 했다고 인정했음에도, 언론에 피해 사실이 보도됐음에도 조직에서는 판단이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내린 판단이 '정확히 이름을 부르면서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속적인 퇴사 종용은 갑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상 이상으로, 걱정했던 것 이상으로 조직은 이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당연히 나쁜 사람은 벌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버텼지만 끝내 벌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프리랜서라 조직을 모른다는 가해자의 비난은 결국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우리에게는 새드 엔딩, 가해자와 조직에게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 갑질 신고의 결과였다.  



이전 11화 좋은 공무원, 나쁜 공무원, 이상한 공무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