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람이 벌 받는 게 아닙니다1
법을 어긴 사람이 벌 받는 겁니다
길고 길었던 감사실의 조사가 끝나고 결과를 듣는 자리였다. 처음에 한 달이면 끝난다는 조사였다. 그리고 국장님이 직접 판결문 읽듯이 결론을 읽어줬고 나는 받아 적었다.
복무 사용 차별, 퇴사 강요, 사적인 심부름은 갑질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복무 사용에 대해서는 피해자가 결제를 올리고 반려당한 것이 1회밖에 기록되지 않았고
다른 팀원들도 육아시간을 사용하지 않아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퇴사 강요의 경우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분명하며
사적인 심부름도 피해자가 실행하지 않았으므로 갑질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부당한 업무 배제와 모욕적인 언행은 갑질이 맞습니다.
하지만 처벌 규정이 없기 때문에 처벌할 수 없습니다.
팀장은 분명 나쁜 사람이 맞습니다.
조사 과정에서도 80% 이상 거짓 진술을 했습니다.
하지만 나쁜 사람이 벌 받는 게 아니라 법을 어긴 사람이 벌을 받습니다.
법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억울하시면 형사소송을 진행하십시오.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분명 말이었지만 말 같지 않았다. 이 결과를 수긍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과연 저분들은 이 사안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공감은 하고 있는 것인지. 애초에 조사를 할 능력과 의지가 있었던 것인지 수많은 질문들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게 끝인가요?
네. 조사는 이것으로 끝났고 이 결과를 가지고 인사혁신처 징계위원회에서 징계 절차를 논의할 것입니다.
유연근무, 육아시간 신청 시간이 1회밖에 반려되지 않은 건 갖은 협박으로 결제조차 올리지 못한 것이었다. 게다가 자녀가 없는 직원들과 육아시간 사용 빈도를 비교한 조사 담당자의 어처구니없는 실수까지 더해져 갑질로 인정되지 않았다. 입사한 후 거의 매일 들어온 퇴사 강요는 정확하게 당사자의 이름을 불려야 갑질로 인정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누가 단 둘이서 이름을 부르면서 대화할까.
그러면서 국장은 공무원 생활의 조언도 곁들었다.
그렇게 일 열심히 한다고 알아주지 않아요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네트워킹입니다.
우리에 대해서 다른 실국 사람들한테 물어봤더니 잘 모른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반면 가해자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알더라는 것이었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우리는 이제 입사한 지 1년이 안된 사람들이었고 가해자는 일한지 10년이 넘는 공무원이었으며 이 곳에서만 3년을 일한 4급 서기관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왜 중요할까.
네트워킹을 잘하면 좀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까.
가해자가 어떻게 해서든 본인의 편을 만들려고 했던 이유가 있었다.
이런 식의 네트워킹이 결과에도 영향이 미쳤다면?
과연 이 조직에서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강한 의문이 들었다.
결국 내가 틀린 건가
나는 오로지 능력으로 나를 증명해보고 싶었다. 업무 성과로 사람들과 네트워킹하고 싶었고 부지런히 실국과의 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일을 하고 성과를 내는 우리의 네트워킹 방식보다 부지런히 술자리에 참석하고 눈물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가해자의 방식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
나는 가해자와는 달리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가해자의 문제 해결 방식을 비웃었고 분명 통하지 않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판단하는 데 그다지 성실하지 않았다.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판단했고 감사실 역시 그랬다. 모든 앞뒤 상황, 맥락, 정황, 배경 이런 것들은 깨끗하게 무시되었다. 하지만 갑질은 분명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불합리한 일이었고 이런 것들을 무시하고 결론을 내면 안 되는 사안이었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날뛰는 '천둥벌거숭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