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만둔 그 자리의 채용공고가 올라왔다
공고가 알려주는 갑질의 성장 배경
퇴사한 지 석 달이 지났다
가끔 악몽도 꾸고 잠을 이룰 수 없는 날도 이어지지만 더 이상 분노가 들끓어 오르지는 않는다. 그리고 아직도 퇴사하지 못했다면 그 답답한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고 있었을까 상상하면서 백수의 평일 오후를 맘껏 즐기고 있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취업에 대한 걱정이 시작됨과 동시에 새로운 조직에 들어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는 두려움도 밀려오고 있었다. 그 두려움의 끝에는 꾹꾹 눌러 담았던 가해자의 폭언들이 하나둘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새로운 환경을 누구보다도 즐기던 사람이었다. 1년 반 사이에 내가 변한 건지, 아직 회복이 덜 된 건지 분명 나는 이전의 나와는 달랐다. 그저 회복이 덜 된 거라고 믿는 수밖에.
그러던 중 내가 일했던 자리의 채용공고를 보게 되었다
계약기간은 1년으로 단축되어 있었고 해야 할 업무들은 거의 두배로 늘어나 있었다. 임기제 공무원 한 명을 뽑는 게 아니라 업체 모집 공고를 보는 것 같았다. 적어도 두세 명이 나눠서 해야 할 일을 1년짜리 계약직한테 전부 몰아주고 하나라도 못하면 두고 보겠다는 암묵적인 메시지가 느껴졌다.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우유맛도 나는 커피 주세요!' 이런 느낌의 이상한 모집공고였다.
도대체 이 조직은 '인사'에 대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까. 계약 연장이라는 당근으로 채찍질하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1년짜리 계약직으로 뽑을 생각을 한다면 그에 맞는 책임과 업무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 계약직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재계약을 빌미로 정규직처럼 똑같이 책임지고 일하라는 게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사실 1년 짜리도 아니었다. 재계약 여부는 계약 종료 두어 달 전부터 고려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 업무 기간은 10개월 남짓인 일자리였다. 그 10개월 동안 마음 졸이면서 재계약을 위해 일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부지런히 사내정치도 하면서.
언젠가 가해자가 한 말이 있었다.
'공무원으로 뽑아줬으면 감사하게 생각해서 열심히 일 할 생각이나 해야지'
모집공고를 보면서 저 말이 가해자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가해자는 오히려 솔직한 편이었다.
임기제 공무원.
도대체 이런 새로운 말은 누가 만들었을까. 계약직 공무원이 오히려 더 받아들이기 쉽고 의미 전달이 분명한데. 마치 공무원의 책임과 의무는 있지만 권한과 혜택은 없다는 메시지를 티 나지 않게 전달하기 위해 고도로 짜인 조합인 듯하다. 모집공고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면서 처음으로 가해자의 폭언들과 조직의 무관심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가해자의 갑질은 이런 환경에서 곰팡이처럼 자라난 것이었다.
나는 공무원이라는 타이틀을 하사 받은 만큼 순종적이어야 했다. 내가 당한 부당함은 그저 나 혼자 안고 가야 하는 것이지 감히 조직에 목소리를 내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크게 이야기하고 다녔으니 그들이 보기에 얼마나 이상했을까. 퇴사를 하고 계절이 바뀔 쯤에야 분노하지 않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일했던 그 자리의 모집공고가 준 힌트들은 여러모로 꽤나 강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