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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아오 Nov 11. 2020

분노의 극치

#대회에서 1등을 놓친 썰

회사에서 기능경진대회가 열렸다. 기술을 다루는 회사에선 으레 직원들의 기술력을 올리고자 종종 대회를 연다. 하물며 규모가 큰 회사이다 보니 수상자 이름 앞엔 항상 부서 이름이 붙어 부서 간의 미묘한 경쟁이 펼쳐지기도 한다. 


이번 대회는 입사 3년 미만의 사원들이 참가대상이었다. 그동안 업무를 수행하면서 부서 안팎으로 배운 기술들을 겨루는 대회. 가히 부서 간의 신경전이 다른 때보다 높을 수밖에 없다. 물론 입사한 지 고작 1년 반인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대회 시작 한 시간 전, 평소엔 업무 지시 내리기만 해도 바쁜 팀장님께 전화가 걸려왔다. 실은 오전에도 '내년 프로젝트 내용이 부실하다'며 프로젝트 하나를 더 발굴하라는 지시를 직접 전해오지 않고 위부터 타고 내렸다. 그런데 대회 한 시간 전에 전화라니. 


"네 **사원입니다."

"어~ 대회 나간다며?"

"네"

"그래. 연습은 많이 했고?"


대회 존재를 아시는 게 더 놀라웠다. 일언반구 없다가 갑자기 뿜어내는 격려. '이겨야 한다'는 중압감을 물 흐르듯 넘겨 보겠다고 "완성에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가 "기왕 나가는 거 완성이 아니라 우승을 목표로 해야지 무슨 소리야." 불같은 명령을 소환했다.


여기서 키포인트는 대회 종목이 나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점이다. 나는 전산 IT 업무를 하고 있고, 대회 종목은 '전기-시퀀스'이다. 출전하는 60명 중 나를 제외한 59명이 전기 담당이다. 당연히 그들의 손에 승패가 달려있다. 어쩔 수 있나, 완성만이라도 꼭 해야지.


대회는 이렇게 구성됐다. 이론-주관식이 20분, 실기-시퀀스 설계 및 동작이 40분. 이론 문제지를 받고선 깔끔히 포기했다. 10문제 중 아는 게 고작 4개였나. 나머지 6개는 얼추 어디서 주워 들었던 단어들을 써넣어 답을 채웠다. 그리고 드디어 시퀀스 실기가 시작됐다. 


시퀀스 실기는 좀 당황스러웠다. 알고 있던 도면과 살짝 다른 생김새라서 도면을 해석하는 데에만 시간을 꽤나 소모했다. 이미 주위에선 출제된 도면을 수정하고 배선들을 연결하고 있었다. 연결하고 동작을 시도하는 소리가 들리니 절로 급해져서 도면을 제멋대로 이해해놓고 후딱 연결을 시작했다. 


그리고 완성. 동작이 무언가 이상하다. 그 사이 다른 사람들도 동작을 성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기회는 있다. 완성이 목표였건마 이렇게 되니 괜히 욕심이 생긴다. 도면이 잘못됐는지, 배선이 잘못됐는지 몇 번을 다시 보는 와중에 한 명이 완성을 했다. 그 사람의 시퀀스 동작을 보고 나니 아뿔싸. 


출제 문제 : start 버튼을 누르면 컨베이어 벨트가 작동되게 하라. 벨트 위 물류가 센서 A를 통과해 센서 B에 닿으면, 그 즉시 벨트를 정지하고 10초 후에 다시 가동되게 하라.


물류가 센서 B에 닿았다면 물류는 센서 B에 멈춰있다는 소리다. 즉, 센서 B가 계속 터치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센서 B를 단 한 번만 터치하고선 동작이 어떻게 되나 구경하고 있으니 될 리가 없었다. 내가 수정한 도면도, 연결한 배선도 이상이 없었다. 단지 센서를 길게 터치하지 않아서 완성을 못 외쳤을 뿐!


급하게 채점을 요청하니 잘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허탈할 수가 없다. 1등보다도 10여분을 빨리 완성해놓고 완성한 걸 몰라서 채점 요구를 하지 않았다니.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 내가 좀 더 알았더라면, 심사위원이 동작법을 한 번만 설명했더라면, 틀리더라도 채점 요구를 했더라면. 


모든 가정법이 섞여 분노를 만들어냈다. 목적이었던 완성을 이뤄내고도, 불과 몇 분 전 괜히 생긴 욕심 때문에 분노가 겹겹이 쌓여갔다. 문득 유튜브에서 봤던 분노 컨트롤 방법이 떠올랐다. 


"분노가 일어난다면 아~ 내가 분노하고 있구나~라고 알아차리세요. "


아~ 내가 분노하고 있구나~ 쓸데없이 화를 키우고 있구나! 어차피 이론 문제도 절반 이상을 찍었으니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재빨리 대회장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나오자마자 들리는 소리. "이론 문제 10개 중 8개나 맞혔네요! 1등 하실 수 있었을 텐데..."


응? 갑자기 폭발하는 분노의 극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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