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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아오 Nov 17. 2020

망의 소식

동네 세탁소 문 앞에서 생긴 일

올해 1월, 코트를 샀다. 키가 작은 터라 살면서 코트를 사긴 고작 네 번째인가. 나이 좀 들었다고 브랜드를 골라서 샀다. 일부러 시즌오프를 노렸고, 파주 아울렛도 노렸다. 전략대로 무려 거의 반값 수준에서 좋은 코트를 건져왔다. 그때부터였을까. 내 모습이 어딘가 이상해보이기 시작했다. 


외출하기 위해 코트를 입고 옷 매무새를 점검하고자 거울 앞에 섰다. 이상하다. 분명 매장에서 입었을 때와 다르다. 잘못 입었나, 팔이 꼈나, 단추를 풀까, 안에 티를 바꿀까. 그러길 몇 십여 분. 결국 코트는 옷장에 걸리고, 패딩이 따라나간다. 


몇 번에 걸쳐 코트 입기를 시도했지만 3월까지 입지 못하자 결국 한 번도 못 입게 됐다. 그리고 지금은 11월. 다시 겨울이다. 코트 입기를 도전해본다. 그동안 나름 운동을 해서 체격이 커졌으니 코트를 입으면 남자다운 핏이 살아날 듯하다. 자,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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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아침, 광양에서 서울로 올라가 부리나케 세탁소를 찾았다. 집에서 걸어서 10분. 몇 번 이용해보지 않았지만 이곳 사전에 '수선 실패'라는 단어는 없다. 내 손엔 코트와 함께 연보랏빛 셔츠도 하나 들려있다. 이 셔츠 또한 코트와 같은 신세다. 


거진 3년 만에 세탁소를 찾았다. 그땐 한참 어릴 때라 민소매 티셔츠의 기장을 줄이러 왔었다. 심지어 다음 날 점심, 일본으로 떠나는 비행기가 예약 되어 있어 제발 수선이 빨리 되길 바랐다. 당일 수선이 어디 쉬우랴. 기술이나 스킬에서 어려운 건 없다. 다만 나말고도 다른 손님 옷들이 쌓여있을 뿐.


세탁소 아저씨는 내 사정을 듣고는 흔쾌히 내일 아침 7시까지 수선해주시고 했다. 덕분에 계획이 세워졌다. 5시에 일어나 밥을 먹고, 씻고, 짐을 마저 싸고, 집을 나서서 세탁소에 들리고, 공항버스로 고! 완벽한 계획이었다. 신나는 마음에 여섯 시 반부터 세탁소 앞을 지켰는데, 약속대로 나타나셨다. 


아저씨는 기존 출근시간 보다 두세 시간을 일찍 오신 셈이다. 그것도 자전거를 30여분 타시고서. 죄송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어우러져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아저씨는 재밌게 놀다오라 말씀해주신다. 엄마따라 다닌 지 몇 년 째. 엄마의 어깨너머로 이 세탁소엔 '실패가 없다'라는 것만 배웠는데, 이제야 알았다. '정'이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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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소 안이 어둡다. 하필 쉬시는 날인가. 돌아서려는 찰나 어딘가 좀 이상하다. 문 안쪽은 나무토막으로 문을 막아뒀고, 걸려 있어야 할 옷가지들이 없다. 마치 폐허. 문 옆에 조그만 종이가 붙어 있다. '망 ***의 상속인들은 12월 31일까지 집기들을 처분 ... '


이게 무슨 말이지. 채무 관계인가. 파산하셨나. 처분이라니. 내가 처음 꽂힌 단어는 처분이었다. 폐허처럼 싹 없애버리는 것. 항상 정장바지에 멜빵을 달아 입으셨던 아저씨가 떠올랐다. 어딘가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럴 분이... 생각하는데 '망'이라는 글자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망의 소식. 순간 눈이 얼어 우두커니 글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3년만에 찾아 온 이곳에서, 몇 년에 걸쳐 정이 든 아저씨에게, 망의 소식을 받았다. 


'망(亡)'이라는 글자는 두 가지를 뜻한다. 망하다, 죽다. 보통 어떤 경우에 이름 앞에 붙이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상속인들에게 메세지를 건네는 쪽지를 봐선, 후자가 맞다. 전자라면 상속할 게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어딘지 모르게 안타까움과 씁쓸함이 몸에 배어 걸음을 끌었다. 머리도 안 감은 채 추리닝 차림으로 달려와 수선을 맡기면 뚝딱 해주시던 '멜빵 아저씨'. 그리고 내 서른 평생 '실패가 없는 세탁소'. 갈 곳을 두 곳이나 잃었다. 코트처럼 이 동네가 점점 내 몸에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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