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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아오 Jun 05. 2023

책 102권을 팔고 17만 원 받았다

생에 처음 요식업에 도전했던 파스타집. 6개월의 근로기간이 끝났다. 끝나마자마 훌쩍 베트남으로 여행을 떠나려 했다. 본업인 쇼핑몰과 두 번째 사업인 취업컨설팅까지, 이제 사업에 박차를 가할 때라 시작 전에 한바탕 깊은 휴식을 누리고 싶었다.


그런데 언제나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는 법. 베트남은 이미 우기가 시작되어 비가 사람 키보다 높은 동굴을 가득 채울 정도로 쏟아졌다. 아.


뜻하지 않게 집에서 심신수련을 하기로 했다. 3일 단식으로 시작해 온갖 것을 비워내리라. 내 몸의 노폐물과 집안의 잡것들을 모조리 쓸어내겠다는 각오였다. 사업에 집중하기 위해 시선이 닿는 곳에 최대한 아무것도 없으면 좋겠다는 심산이다.


집을 둘러보니 '성공해야만 한다'라는 관념처럼 '사면 좋다'라는 편견으로 소비한 물건들이 많았다. 반대로 '없으면 불편할까?'를 생각해 보았을 때 그렇지 않은 것들은 모두 처분 대상이었다.


1순위는 책이었다. '기왕이면 종이로 읽어야 더 좋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그 말이 그대로 체내에 흡수되었고, 지난 3년 간 읽고 싶은 책을 버릇처럼 구매했었다. 이 좁은 원룸에 벽 하나를 책으로 채우니 갑갑할 지경이었다.


우습게도 대부분 3분의 2쯤 부근에서 독서를 중단한 책들이었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자기 계발서들의 내용이 지루하게 반복되고, 이책과 저책같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한 번도 읽지 않은 책들이 11권이나 있었다.


중고책 팔기는 알라딘이 최고라는 말을 들었다. 책을 담을 박스까지 보내준다니. 처분 대상 102권을 담기 위해 다섯 박스를 받았다. 한 권 한 권 차곡히 담으면서 못내 아쉬움이 들었다. 좋은 책을 떠나보내서 아쉽다기 보단 '아직 이렇게 깨끗한데'라는 아쉬움이 더 컸다.


그래도 그중엔 저자에게 감사할만한 책들도 더러 있었다. 고구려의 이야기를 삼국지보다 재밌게 풀어내준 김진명 소설가,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는 정호승 시인, 내가 생각 외로 상식이 부족하다는 걸 깨닫게 해 준 채사장까지 단 한 번도 구입을 후회한 적 없는 책들이었다.


그럼에도 처분 1순위 대상이었다. (최근 일 년 사이 세 번 이상 꺼내 읽은 27권과, 아직 한 번도 읽지 않아 팔기 아까운 11권은 제외했다.)


가득 채운 다섯 박스를 알라딘에 보냈다. 주말이 겹쳐 정산에 5일이 걸렸고 박스 단위로 정산되어 계좌에 송송 입금되었다. 4만 원, 3만 원, 5만 원,... 어라? 생각보다 금액이 적었다.


정산을 마치고 알라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102권의 정산금액은 총 176,000원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58권만 매입되고 나머지 44권은 재고 초과나 상태 불량으로 폐기된 탓이었다.


솔직히 아까웠다. 150만 원어치의 책을 한 번도 채 다 못 읽은 데다가 고작 17만 원으로 돌아오니 미련한 소비처럼 느껴졌다. 내 소비는 얼마나 허망한가. 아니면 김하온의 랩처럼 허무하고 아름다운 것일까.




지난 5월 중순, 김승호 회장의 <사장학개론> 북콘서트에 다녀왔다. 그중 이런 내용이 떠오른다. "책을 읽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인사이트를 얻고 사고의 영역이 넓어졌다면 그 안에 당신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을 심고 키워야 합니다."


그때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숱하게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한다 한들 그것이 옳은 방향이 아니라면 끔찍할 테니 말이다.


책소비도 마찬가지였다. 102권의 책으로 뭐라도 심었을지, 심은 게 도리어 거만의 뿌리가 되는 건 아닌지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커피를 마시던 친구가 이런 말을 한다. "상대가 뭘 하든 결국에 너는 믿는 수밖에 없어." 


맞는 말이다. 종교는 신을 믿는 것이고, 환자는 의사의 지성을 믿고, 사업가는 돈을 믿으며, 사랑은 상대를 믿는 것처럼 102권의 독자였던 나는 책 표지에 소개된 마케팅 문구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책 마케팅 문구를 따르면 - 나는 세계 최고 부자들의 습관을 터득했고 메모와 시간관리의 전문가가 되었으며, 어떠한 감정이 쏟아져도 결코 외롭지 않은 하루를 살 것이다.)


그래서 당분간은 그저 믿기로 했다. 고작 17만 원을 받았지만 꽤나 많은 지식을 축적했고, 3일 단식으로 시작한 이 심신수련도 사업에 집중하기 위한 터를 잘 닦은 셈이며, 열심히 하는 만큼 흥할 것이고, 권선징악과 운명의 붉은 실까지 모조리 믿기로 했다.


고로 이 비워내기의 끝에는 더 이상의 고민거리가 없고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행동만 남았다.




좋아했던 책, 랄프 왈도 에머슨의 <자기 신뢰>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내가 바른 일을 할 만큼 확고하며 남의 이목은 상관하지 않을 수 있다면, 전부터 옳은 일을 많이 해왔으므로 지금 나를 변호할 수 있다. / 성품의 힘은 누적된다. 이전에 행한 모든 미덕은 긍정적으로 기여한다." 


이 문장처럼 이전에 행한 모든 선택들이 누적되어 긍정적으로 작용하길 바란다.


잘 가라 백이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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