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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동회 Aug 29. 2024

몽골 (Mongolia)

울란바토르, 테렐지 국립공원

초딩 7학년 시절과

중딩 시절이 결합된 여 6명,

남 3명의 삐거덕 빼거덕 몽골여행 4박 6일입니다


창원 -> 진주 -> 김해

8월 22일 13 22 김해공항을 이륙하여

26일 22 30 인천공항으로 들어왔는데요

밤을 새워가며

미니 버스를 타고

인천 -> 진주 -> 창원

아!

멀고도 험한 길 입디다



예전에는 [몽고]라고 했죠

중국말로 번역하면

무지몽매하고(蒙)

구닥따리(古)라는 의미를 담았기에 몽골리아를 비하하는 뜻이라 하여 지금은 [몽골]로 표준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인구는 350만으로 부산시 정도인데 땅덩어리는 한국의 15배이고

가축은 7천만 마리,

현재 3만 명이 한국에서 유학 또는 노동을 하고 있고

20만 명이 한국에 살아 본 경험이 있을 정도로 우리와 밀접하며

실제로 한국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고 합니다


비자가 필요 없으며 90일까지 체류가 가능하네요


e마트, CU, GS25가 즐비하고

한국의 음식과

한국산 제품

한국 드라마 등 생활패턴도

얼굴 모양도 우리와 빼닮았습니다

한류의 끝판왕이랄까!


한 때 동탄 신도시가 전파를 많이 탔잖아요

그 동탄을 몽골로 옮겨 놓았다 하여 [몽탄 신도시]라고 할 정도로 우리를 밴치마킹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답니다


이처럼 몽골인들은 한국인을 대할 때 매우 우호적이고 선망의 대상으로 보는 격세지감이 있습니다

반면에

중국인은 굉장히 싫어하고 심지어는 타도의 대상으로 평가절하하는 느낌인데요


간판은 러시아어와 영어가 대부분이고

소통하는 글자는 러시아어,

말은 몽골어이지만

제1외국어는 영어

제2외국어는 한국말이며

한글로 표시된 간판도 심심찮게 보이고

마트의 상표는 한글 투성이입니다

그런데요

한자로 된 간판은 단 한 개도 못 봤으니

그만큼 중국을 배척한다고 보시면 되겠네요


반면에 울란바토르의 교통은 생지옥입디다




♥♥


예전의 몽골은 우리에게 무엇일까요?


몽골 하면 떠 오르는 단어가

칭기즈칸, 유목민, 정복자일 겁니다


750년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는데 그 기원은 바로 칭기즈칸으로 군림했던 테무친입니다


당시의 몽골 총인구는 1백만 명에 불과하였는데 무려 지구의 5분의 1을 정복하고

지구의 총인구 4분의 1을 지배하였으며

1206년 몽골 통일 이후 쿠빌라이칸의 원나라를 거쳐 150년간 제국을 유지하다가 명나라에 의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몽골(원나라)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위력을 가했고 일본보다도 더 했으면 더 했지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이나 철천지 원수라 해도 몽골인은 할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원나라가 팽창하면서 우리나라도 사정없이 밟혔기 때문이죠

고려 고종 때 최충헌에 이어 아들 최우(최이로 개명)가 집권했던 무신정권의 시기였습니다


고종 임금은 강화도로 피난했고

몽골군이 얼마나 무지막지했던지

불심에 의지해서라도 그들을 물리치고자 15년에 걸쳐 고려대장경을 출판했는데

오늘날 합천 해인사에 모셔져 있는 팔만대장경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후에도 시시콜콜한 간섭과 조공을 바쳐야 했고

몽골의 신하로서 몽골에 충성한다는 의미를 담아 고려의 임금 군호에 충(忠)을 넣었죠

25대 충렬왕부터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30대 충정왕까지입니다


31대 공민왕의 왕비 노국공주는 원나라 임금의 딸인데요

비록 국가 간의 정략적인 결혼이기는 하나 공민왕은 노국공주를 인간적으로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개혁군주로서 원나라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무진 몸부림을 쳤었는데 노국공주가 출산 중에 사망한 이후 방황하면서 정신줄을 놓아 버렸거든요


개혁은 물 건너갔고

땡중 신돈이 정권을 좌지우지하면서 급기야 임금의 부인까지 능멸하여 낳은 자식이 32대 왕 우왕입니다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라는 뜻


나라가 이 모양이니 지식층의 신진 사대부들이 가만있었겠냐고요

그들이 정몽주 정도전 같은 인물들입니다


공민왕 사후 18년 만에 어리바리하던 고려가 결국은 이성계에게 망해 버렸습니다


몽골에 의하여 고려가 매우 허약한 나라가 되었던 것이죠



몽골군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장렬히 산화한 [삼별초]라는 군대가 있었습니다


몽골군이 고려를 침공한 때는 최우의 무신정권이라 했잖아요


나라에서 운용하는 정규군이 있었지만

따로 무신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가 특출한 장정을 뽑아서 사병조직을 만들었죠

이를 야별초라 했습니다


별초는 정규군과는 별도로 나라에서 우수한 청년들을 특별 전형으로 뽑았는데 최우는 이 별초를 모방해서 자신의 신변안전을 위하여 야별초를 조직했고

그 규모가 별초보다도 훨씬 컸겠죠


정규군이 몽골군에 밀리자 최우는 야별초를 정규군으로 확대 재편하여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고


몽골군의 포로였다가 탈출했거나 송환된 사람들을 모아서 신의군을 조직하여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을 합하여 삼별초라 하였습니다


기존 정규군은 비실비실한 반면에 정예의 군대인 삼별초는 몽골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무력 단체가 되었고 무신정권과 몽골의 강화가 이뤄지자 이에 항거하여 정규군에서 떨어져 나와 반란을 일으켰으며


나중에는 독자적인 정부를 세우고 전남 진도를 근거지로 하여 3년이나 싸우다가 결국은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에 의하여 섬멸되었습니다


몽골 때문에 우리끼리 싸운 거죠



또 하나의 가슴 아픈 것은

조혼입니다

원나라에 공녀로 끌러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여자 아이를 일찍 시집보내는 것인데요


조혼할 형편도 안 되고

공녀로 팔려 가는 것도 싫고

이럴 때는  남장을 하여 키웠습니다

이른바 [가사나이]죠

가는 거짓가(假)이므로 거짓 사나이라는 뜻이고요

[가시내]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몽골의 잔재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① 우리의 얼굴 모습이 몽골인과 너무나 닮아 있고

② 어린아이의 엉덩이에 생기는 푸른 점을 몽고반점이라 했고요

③ 창원에는 몽고간장이라는 브랜드의 식품회사도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몽골은 고려인에게 정말 몹쓸 짓은 많이 했습니다


[칙사대접]이란 말을 들어 보셨나요?


조선시대에 명나라나 청나라의 관리가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러 오는 사신을 칙사라고 했는데 이들에게 밉보인다는 건 바로 황제를 능멸한다고 여겼으니 대접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야말로 있는 것 없는 것 털어서 칙사대접을 하는 것이죠

이 칙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몽골인들도 얼마나 거만을 떨고 고려 조정을 겁박했겠습니까?


알고 보면

흉노족

몽골족

말갈족

거란족

여진족

뙤놈

왜놈 모두가 우리에게는 오랑캐들입니다



800년이 지난 지금 몽골의

위상은 사뭇 보잘것없습니다


내륙 깊숙한 곳에 자리하여

러시아에 치이고

중국에 멸시받고

일본은 멀고

그러니 대한민국을 구세주로 여겼겠죠


러시아에게 의지할 경제적 이득은 별로이고

중국과는 내몽골 문제로

아마도

수십 년 이상은 한류문화가 먹혀들겠죠!


재벌들의 돈벌이 수단이겠지만 과거 몽골인의 만행을 용서하고 서로 윈윈 하는 모양새가 지금의 모습이라고 보시면 되겠고요


역사적 사실에서 설마 몽골인들이 속죄를 했기에 한국인에 대하여 우호적인 건 결코 아닐 것이고


현재의 궁핍한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한국이라는 경제적 지렛대를 활용했을 뿐일 겁니다



♥♥


[천고마비]를 아시나요?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고


지금은 가을을 상징하는 뜻이 되었지만요


곧, 유목민의 말은 토실토실 살이 쪄서 컨디션이 절정이고

정주민에게는 수확의 계절이니 먹을 식량이 두둑하고


그러니

유목민들이 정주민에게 쳐 들어가서 노략질 하기에 딱 좋은 계절이라는 소립니다


천고마비의 시기가 되면

정착하여 사는 주민에게는 한 해 농사를 모조리 빼앗기는 절체절명의 생존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면

몽골이 어찌하여 단숨에 대 제국이 되었을까요?


몽골은 광활한 초원을 배경으로 여러 부족이 가축을 키우며 떠돌이 생활을 하는 민족입니다


가축이 어느 한 곳의 풀을 다 뜯어먹고 나면 자연스레 다른 풀을 찾아 이동할 것이고

사람은 가축이 가는 대로 이사를 해야겠죠


빈번한 이사 때문에 집을 거창하게 짓거나 가재도구를 많이 구비해 놓고 살 수가 없었을 겁니다


비바람을 피하는 천막집 정도면 족하겠죠


그것이 바로 [게르]입니다





1편에 이어 몽골 여행 2편입니다


우선 연속성을 위하여 1편을 링크합니다



몽골이 단기간에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하여 얘기하는 중인데요


내용이 길어서 중구난방이 될까 우려되네요


몽골 하면 첫 번째 특성이 광활한 초원입니다


풀이 많으니 당연히 목축업이 생계 수단이었을 것이고

가축은

염소

야크

낙타

등이겠죠


많은 가축을 거느리다 보면 먹이가 부족할 것이고

자연스럽게 먹이를 찾아 이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 곳에 집단적으로 정착하여 거주하는 정주민 보다는 씨족 또는 부족 단위로 띄엄띄엄 흩어져서 독립적으로 살아야만 하는 유목민이 됐을 겁니다


이사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집은 쉽게 지을 수가 있어야 하지만 쉽게 뜯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나무가 없으니 뜯은 집은 가져가야 하므로 가벼워야 하고 반면 매우 견고해야 했을 겁니다


이 조건에 딱 부합하는 것이 게르로 발전한 것이죠


그러니까

자재는 단순하고 가볍고

집은 쉽게 짓고 뜯고

바람을 막아야 하니 둥글고 낮고


실제로 전통 게르의 경우

1시간 30분 정도면 짓는다고 합니다


게르는 몽골의 특징이 되었고

장점을 살려서 현대식으로 개조된 게르가 주요 숙박시설이 되었는데요

우리 일행도 4박 중에서

2박은 호텔

1박은 현대식 게르

1박은 전통 게르에서 잤습니다


전통이나 현대식이나 외형은 거의 같은데요

전통식은 나무를 직접 때는 화목난로이고

현대식은 온돌 난방이며

더 비싼 곳은 게르 내부에 현대식 샤워와 화장실을 갖추고 있는 게 다릅니다


물론 가격은 우리의

여관

모텔

호텔비 수준으로 차등을 두었겠지만 우리나라의 숙박비와 거의 같습니다



게르에서의 독립된 생활은

자연히 근친혼이 성행했을 것이고

유전적으로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겠죠


해서

궁여지책으로 게르에 찾아오는 남자 손님에게 아내와 합방하게 하는 묘한 풍습도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본인의 아들이 누구의 자식인지 모르는 게 허다하다는 말씀


실제로 칭기즈칸의 장남도 본인의 자식이 아니라는 설


우리나라에도 근친혼은 있었습니다


신라의 성골은 몽땅 가족끼리만 결혼했고요

고려의 초기 왕족도 근친혼을 했으므로 촌수가 엉망진창입니다



암튼

게르에 사는 몽골리아 중에서 테무친이라는 싸움 잘하는 녀석이 혜성같이 나타나서는 파죽지세로 부족들을 굴복하고 통합하여 칭기즈칸이 되었습니다


[칭기즈칸]이란


테무친이 몽골 제국을 창업하여 즉위할 때 받은 칭호인데요

[칭기즈]는 위대하다는 뜻이고

[칸]은 통치자 또는 군주를 의미이니까

칭기즈칸은 [위대한 통치자] 또는 [강력한 군주]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되겠네요


몽골 입장에서야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하겠지만 고려를 비롯한 다른 나라들에게는 최악의 인간이었죠


귀태라고 하나요!


결과적으로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이 한 때 지구를 휩쓸며


그야말로

가는 곳마다 모조리

죽이고

불태우고

파괴하고

약탈하고

도륙내서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씨를 말려 버렸으니까 두려워서 항복했고

그 결과 단숨에 세계를 정복할 수가 있었을 겁니다


말하자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결코 자랑질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죠


테무친의 성장과정 자체가 고난과 약탈과 죽음이었으므로 인간에 대한 피의 보복과 원수를 갚기 위하여 벌린 것이 세계 정복이었던 것입니다


이 친구들에게는 문화라는 게 없습니다

단무지죠

(단)순 (무)식 (지)맘대로 그저 꼴리는 대로 행동했던 겁니다


우리나라 고려도 피해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며 목조 건물 중에 살아남은 건물이

영주의 부석사 무량수전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

예산의 수덕사 대웅전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칭기즈칸의 초상화를 보면 포동포동한 얼굴이 꼭 동네 아저씨 같은데 그렇게 무자비한 폭력적 이면이 있을 줄이야!


그의 손자인 5대 칸 쿠빌라이는 나라이름을 [원(元)]라고 했습니다


실은 칭기즈칸 보다는 쿠빌라이칸 때 영토가 제일 넓었었죠


통일 제국이 된 몽골은 기세를 몰아 서부 정벌에 나섰고 금나라도 집어 먹었으며 급기야 고려까지 굴복시켜 버렸습니다


금나라는 여진족으로서 이후에 중국 대륙을 지배했던 청나라의 전신이고

청나라가 망한 후 지금의 중화민국이 된 것이죠


청나라는 칭기즈칸에 당한 보복으로 몽골을 끊임없이 청나라에 복속시키려 했습니다


여의치 않자 고비사막을 경계로 하여 중국의 자치령에 둔 곳은 내몽고라 하고

중국의 손이 미치지 못한 곳은 외몽고라 하여 몽골을 비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의 몽골 인구는 1백만 쯤이었고

군인은 10만 명으로 추정하는 바 무슨 연유로 10만 명이 1억 명이나 정복할 수 있었을까?


그 요인은

① 기마병

② 십진법에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앞서 목축업을 언급했지만

주목할 만한 것은 말(馬)입니다

기동성이 탁월하다는 장점이 있죠


말은 다른 가축을 몰이할 때도 유용하지만 전쟁 때는 막강한 무기입니다


당시 다른 나라들의 군대는 보병이 주력이었는데요

걸어 다니면서 칼이나 창을 들고 싸우는 형편이며

병사들을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하는 보급 부대가 반드시 따라붙게 마련이었죠


하지만

몽골군은 달랐습니다


일사불란한 기동성과 속도전을 구사했습니다


말을 타고서 떼거지로 몰려다니며

주변을 휘젓고

활을 쏘아대니 걸어 다니는 보병들이 어찌 당해 내겠냐고요!


군인 전체가 기마병이라는 것인데

이들은

스스로가 전투병이고

스스로가 보급부대입니다


스스로 보급부대라 함은

본인이 먹을 식량은 본인이 가지고 다닌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출동 명령이 하달되면

각자 말을 일곱 마리나 끌고 나온답니다


3마리는 전투용 말이고

4마리는 보급품용 말이라는 것인데


전투용 말의 경우

1번 말을 탔으면 다음번에는 2번 말로 바꾸고

2번이 지쳤다 싶으면 3번 말로 갈아타면서

말 세 마리를 번갈아 가면서 타면 말의 피로도가 줄었을 거니까 장기간 전장을 누벼도 말이 힘들지 않았다는 것이겠고


보급품 4마리는 식량과 전쟁에 필요한 장비를 실었는데

만약 싣고 온 식량이 떨어지면 말을 한 마리 잡아서 육포를 만들었고

그 육포는 90일 정도의 식량이 된다고 합니다


네 마리면 1년 동안 식량 걱정은 없는 셈이네요

물론 점령지에서 약탈을 하면 식량은 충분했을 겁니다


상상을 해 보세요


10만의 군사와 말 70만 마리가 휘저어 버리면 초토화되는 건 당연하겠죠

주눅이 들지 않았을까요!



기마병의 약점은 의사전달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상관의 명령이 병졸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왜곡되거나 지연되는 것이 당연한데

칭기즈칸은 이를 아주 효율적으로 극복했다는 사실입니다


즉, 십진법이죠

우두머리가 10명에게 명령을 하달하고

10명은 또 다른 10명에게 전달하여 100명이 알게 되었고

100명이 각각 10명에게 전달하면 1000명,

1천 명이 또 10명에게 전파하면 1만 명이 알게 되는 피라미드 구조입니다


그렇게 해서 점령한 영토가 동서로 9000km


광개토대왕

진시황제

나폴레옹

히틀러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광활한 영토를 칭기즈칸과 그의 손자 쿠빌라이칸이 해 냈다는 것이죠


 

♥♥


하여간 몽골은 다분히 칭기즈칸이 대세입니다


울란바토르 외곽에 칭기즈칸의 동상이 있는데요

몽골 건국 800주년에 맞춰서 48미터의 동상을 세웠답니다


재질이 STS이니 동상이 아니라 스텐상이라 해야 맞겠네요


입장을 하려면 2만 투그릭(약 8천 원)을 지불해야 하는데요

칼만 안 들었지 완전히 날강도입니다


여행사에 지불한 경비와는 별도로

곳곳에 봉사료가 붙는데요

호텔에서 방을 빼면 1불 두고 나오듯

게르 퇴실에도 1불

캐리어 운반에 1불

게르에 방문을 해도 1불

낙타 타는 데 2불

말 타는 데 2불

맛사지 3불


이처럼 몽골의 물가가 장난이 아닌데요


GDP를 보면 우리의 7분의 1 수준인데도 물가가 한국보다 비싸거나 비슷하며 비록 싼 것이 있다고 해도 60% 이상인 듯합니다


관광을 할 수가 있는 기간이 여름 한 철이니까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3개월 동안 1년 치를 뽑아내야 하니 어쩔 수가 없다는 여행사의 설명과


우리나라 업체의 마트에서 판매하는 가격이 고물가를 부추긴 것은 아닌지 짐작해 보았습니다



8월 22일부터 26일까지

몽골을 여행하고 포스팅하는 중인데요


몽골이라 함은 평균 해발 1400 정도의 몽골고원 전체를 일컫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몽골은 외몽골이고요

중국의 자치구에 속해있는 내몽골이 따로 있습니다


중국에서 보았을 때 안쪽에 있으니 내몽골

바깥에 있는 건 외몽골로 불렀겠죠


이는 어디까지나 뙤놈들이 편의상 분류한 것이지 나라이름이 외몽골인 건 아니므로 우리는 몽골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고요


내, 외로 나누어진 건 1600km의 고비사막을 경계로 갈라놓았답니다


몽골 입장에서는 멀쩡한 땅을 중국에게 거의 반쯤이나 빼앗겼으니 얼마나 성질나겠습니까!


땅 위치가 맹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국을 통할 수밖에 없는데요

수출입 물동량이 85%에 달한다고 하니 마음으로는 미워 죽겠는데 현실적으로는 인정해야만 하는 숙명일 겁니다


실제로 한국과 일본처럼 앙숙이라네요

한국도 일본과의 교역이 엄청 많습니다만 심적으로는 언제나 왜놈이며 조센징으로 부릅니다



전편에서 언급했지만

몽골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나게 많은 해코지를 했습니다


결코 일본에 뒤지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습니다


일본은 그렇게 미워하면서도

몽골은 좋은 친구로 여긴다는 거죠


심지어 몽골과 우리가 예전부터 우호적인 나라였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몽골 여행을 해 보신 분들은 자연이 깨끗하고 사람들이 순수해 보이는 것에 그저 좋게만 바라보는 것 같은데 역사적 진실을 모르거나 왜곡된 시각일 겁니다


몽골이 왜놈보다 더 무자비한 민족일 수도 있는데 우리가 좋게 보는 이유는 대체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① 몽골은 이미 끈 떨어진 갓이어서 우리에게 더 이상 적수가 되지 않는다


② 왜놈들은 우리에게 그렇게 나쁜 짓을 하고도 너무나 잘 살고 있다


③ 몽골에 진출하여 개발할 기회는 많지만 일본에 태극기를 꼽기란 쉽지 않다


④ 몽골은 지정학적으로 고립돼 있어서 우리에게 위해를 가하기는 한계가 분명한데 일본은 언제나 우리에게 위협적이다


⑤ 인구수도 몽골은 일본에 비할 바가 아니므로 오히려 애잔하고 불쌍한 느낌마저 드는 것 등일 겁니다


요즘은 일본도 경제가 예전 같지 않아서 많이 어려운 모양이던데요


이 기회에 우리가 일치단결하여 과학을 육성하고 기술을 개발하여 나라의 경제를 왕창 끌어올려서 일본을 완전히 따 돌리고 질주해야 하는데


그놈의 범죄붕당 정치꾼들 때문에 나라가 동력을 상실하여 제 갈길을 잃고 한 치 앞도 나아갈 수가 없으니 한심함을 넘어 앞날이 심히 우려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의 후손에게 막중한 죄를 짓고 있는 것이죠



♥♥


각설하고


이번 여행의 컨셉은 트래킹 보다 관광 코스로 짜여 있는데요


몽골에 도착한 첫날은 일정 없이 석식 후 홀리데이인 호텔로 직행하였습니다


몽골 체류시간 전체를 복기해 보면 땅은 넓은데 도로가 너무 빈약합니다

당연히 병목현상과 막힘이 빈번하겠죠


때문에

예상한 시간은 거의 지켜지지 않는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

일정을 빡빡하게 편성할 수가 없겠고

딱히 관광지도 많지가 않아서

외곽으로 나가면 보이는 게 평지와 낮은 야산의 초원이 대부분입니다


주요 관광지라 해 봐야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테렐지 국립공원

고비 사막

홉스굴 호수

그나마 고비사막과 홉스굴호는 워낙 먼 거리에 다가 교통도 열악하여 7일 이상 체류할 때나 가능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몽골의 사막이 유명하다고 하니 고비사막은 엄두가 안 나고 대신 엘승타사르하 사막을 코스에 넣었더군요



♥ 2일 차


울란바토르 숙소에서 7시에 출발하여 약 300km 떨어진 [엘승타사르하] 사막으로 25인승 버스를 타고 덜컹거리는 동안 끝없는 초원이 펼쳐집니다


고속도로이긴 하나 도로는 울퉁불퉁, 곳곳에 홀이 파였고 가축들이 마음대로 도로를 횡단하며 아무 곳이나 나들목이기 때문에 속도를 낼 수가 없습니다


차창 밖 곳곳에 가축들이 무리 지어 유유자적 먹이 활동을 하는데요

몽골몽골한 양떼들, 말떼들, 소떼들이 초록색 바탕을 수놓습니다


그중 양떼들은 반드시 염소를 동반하는데요

외모는 다르지만 체구가 비슷하여 서로 사이좋게 풀을 뜯습니다


굳이 같이 키우는 이유는

염소는 새 풀을 좋아한다네요

양은 염소를 따라가기만 하면 언제나 싱싱한 풀을 먹을 수가 있겠죠


하여간 산과 평지가 오로지 초원입디다


그닥 나무가 많지 않은 것은 흙 층이 얇고 바람이 많아서 나무들이 뿌리를 지탱할 수 없는 게 아닐까!


나무가 없으니 풀 밖에 살 수가 없고

풀이 많다는 건 가축들의 먹이가 풍부하다는 뜻이겠고


만약

풀들 마저도 없다면

그것이 바로 사막인 것이죠


예전에는 이 풀들이 말을 먹여 살렸고

그 말들은 전장의 도구로 사용되어 거대한 몽골 제국을 형성하였습니다



숙박지 근처에 당도하여

난생처음으로 쌍봉낙타를 보았는데요

그 낙타를 타보는 체험을 했습니다만

쌍봉낙타의 90% 정도는 몽골에 있다고 하데요


사구에 올라가서 썰매를 타고

놀다가 전통 게르에 체크인을 한 후 일행들이 휴식하는 틈을 타서 게르 근처에 있는 야산에 올랐습니다


홀로 2시간 30분가량 산행을 해 보았는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그저 그만이었습니다


초원을 가로지르는 톨강의 지류는 오리지널 사행천이더군요



♥ 3일째


3, 4일째는 테렐지 국립공원을 관광하는 일정입니다


전날 왔던 길을 되돌려 7시간 이상 주행한 끝에 울란바토르로 돌아와서

14시 30분 늦은 점심을 먹고


테렐지 국립공원으로 행차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제일 신나는 일정이었죠

초원과 산악지대가 어우러진 곳인데요

즐비한 바위들이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교통 지옥이어서 다시는 몽골에 가고 싶지가 않지만 테렐지 국립공원만을 대상으로 3박 4일쯤 한다면 다시 도전해 보고 싶긴 합니다



#어워


가는 길목에 몽골식 성황당인 어워를 답사했습니다

그냥 야트막한 언덕에 돌무더기를 쌓고 깃발을 꽂아 놓은 정도인데 정말 별것도 아닌데 볼 것이 없으니 이거라도~


돌무더기를 3바퀴 돌면서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고 하더이다



#아라야발사원


절이라고 보시면 되고

진입하는 계단과 건물을 코끼리 형상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뒤는 바위산인데 바위에다 글씨를 새겼네요

우리가 흔히 보았던

옴마니 반메홈



#거북바위


몽골여행을 다녀온 포스팅을 보면 반드시 찍혀있는 사진은 거북바위입니다

사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데요


해 질 무렵이라 조명이 없어서 우리가 본 모습은 별로였습니다



#승마체험


몽골인들이 대 제국을 건설할 때 지구를 휩쓸고 지나간 그 말의 후손이었을 겁니다


전날에 탔던 낙타도 그랬지만 무섭거나 힘들지는 않았고

오히려 재미있던데요


이곳 아이들은 6세만 되어도 말 타는 기술이 장난이 아닙니다

놀이기구쯤으로 여기는 거죠


저녁 9시쯤 식사를 마치고 현대식 게르에 숙소를 정한 후 조촐하게 캠파이어를 즐겼습니다



♥ 4일 차


해뜨기 전에 기상했더니 게르의 뒷산이 아주 멋지더군요


바위만 보면 질주본능이 있어서 친구들과 짧지만 산책 겸 트래킹을 즐겼죠

바위가 찍힌 사진의 대부분은 이곳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9시에 체크아웃하여

칭기즈칸 동상

수흐바타르 광장

몽골 역사박물관 등을 건성으로 돌아보고

전신 맛사지를 받은 후

민속공연을 감상했습니다


몽골 특유의 [흐미]는 한 사람이 두 사람의 소리를 내는 듯한 아주 독특한 창법인데요

직접 듣는 호사를 누렸고


지구촌을 휩쓸던 장정들이 저렇게 나약해졌나 싶어서

공연 내내 눈물이 나오려고 하더이다



마지막 여정 (5일째)


9시에 호텔을 나와

불교 시찰인 간등사원

복드칸의 겨울 궁전

우리나라 이태준 열사의 기념공원을 끝으로 몽골 여행을 마무리했습니다



헛소리에 치중하다가 정작 일정 소화는 용두사미로 끝나 버렸지만 딱히 더 상세하게 적을 내용도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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