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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동회 Aug 04. 2024

고려동 유적지

서원 답사

함안 고려동 유적지

산청 덕천서원, 대원사

함양 남계서원, 청계서원

고령 도암서원, 김면_유적지

합천 호연정, 화양리_소나무


백일홍 투어 2탄입니다


sns에 자주 등장하는 몇 곳을 골라 보았는데요

먼저 고려동 유적지(高麗洞 遺蹟地)로 출발합니다


함안이고요

지난주에 보았던 무산사도 그랬지만 존재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죠


가까운 곳 주변에 몰랐던 역사적 유적지를 심심찮게 알아갑니다


고려동 유적지는 글자 그대로 고려(高麗) 동네(洞)로 남아 있는(遺蹟) 땅(地)이라는 소리네요



바야흐로 630여 년 전!


부패한 고려 정부에 대하여 신진사대부들이 이 건 아니다 하면서 변화를 앞세워 나라를 개혁하고자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고려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으로 바꾸자는 온건 개혁파 정몽주,

아니야 송두리째 엎어버리고 새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급진 개혁파 정도전으로 나뉘었죠


정몽주는 이색, 길재와 편먹었고

정도전은 이성계를 포섭하여

배극렴, 조준 등과 한통속이었습니다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해 버렸죠


개혁의 물살은 급진전되어

1392년 여름 딱 이맘때 고려를 죽여 버리고

조선을 탄생시켰습니다


유학으로 무장된 사대부들은

새 나라에 참여하여 벼슬을 누린 관료들과

고려의 충절을 지키고자 은둔을 해 버린 선비들로 갈라졌는데요


조선에 참여했던 사대부들은 훈구파가 되어 찌그락짜그락하면서도 조선 중기까지 나라의 기틀을 다잡고 국방을 튼튼히 하였습니다


반면

점진적 개혁을 지향하다가 철퇴를 맞은 선비들은 초야에 묻혔는데


성리학을 연구하며 후학을 가르친 부류와

완전히 은둔을 해 버린 선비가 있을 겁니다


이색은 정몽주를 가르쳤고

정몽주는 길재를 가르쳤으며

은둔해 버린 길재는 김숙자에게 전수하고

김숙자는 아들 김종직에게 성리학을 훈육했습니다


성종은 훈구파의 전횡과 독주에 맞서 재야의 참신한 인물 김종직을 등용하게 되었고

묻어서 제자들이 대거 조정에 참여함으로써 기존의 훈구파와 대립각을 세우게 되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사림파라 하였죠


훈구파와의 싸움은 지금의 여야와 같아서 오로지 [니 죽고 내 살자]

4대 사화가 터지고

사림파는 대거 숙청되지만

결국은 훈구파가 소멸하고 사림파 천국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숙청된 사림파는 유배 혹은 낙향하였고

그곳에서 소일거리로 서원을 세워 후학을 가르쳤으며

이들은 조정으로 들어가 훈구파와 싸웠고

지면 낙향 또는 유배지에서 또 다른 선비를 가르치고


그러니까

사림파는 끊임없이 인재가 공급되는 반면 훈구파는 고갈되다가 결국은 사라져 버린 것이죠


정적 훈구파가 사라졌으니 사림파만 남아 오손도손 정치를 잘했을까요?


그랬다면 한민족(韓民族)이 아니죠!


붕당을 만들고

붕당은 파당을 짓고 갈래갈래 찢겨서 서로 물어뜯기를 280년!


그 저변에는 성리학이라는 카테고리가 있으며

수많은 학문적 논쟁과

정치적 패거리가 만들어졌고

급기야 한 가문이 벼슬을 싹쓸이 해버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자행되었습니다


대원군이 등장하여 서원을 47개만 남기고 모조리 없애버림으로써 사림파도 사라졌고 이어서 조선도 망했죠


유교를 숭상했던 고려말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개략적으로 신진사대부들의 흥망을 살펴보았는데요


정말로 고려에 충성하며 오로지 고려만 바라본 사대부 72명이 있었으니 이들은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서 조선의 새 왕조에 벼슬하기를 거부하고 은둔을 했던바


이성계는 이들을 회유했으나 끝내 거절하므로 두문동을 포위하고 불을 질러버렸습니다


죽음으로서 끝까지 고려에 충정을 지켰던 분들을

[두문동 72현]이라 하죠


은둔은 곧 두문이므로 이곳 말고도 당시에 또 다른 두문동이 많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그중의 하나가 바로 함안에 있는 고려동 유적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두문불출이라는 성어도 있습니다만

두문동은 개성과 가까운 지금의 황해도 개풍군에 있다고 하는데요

조선 왕조는 100년 동안 72현의 후손이 과거시험을 보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합니다


살아남은 후손들은 어쩔 수 없이 평민이 되거나 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는데요

이들이 바로 훗날 [개성상인]이 된 것이죠



위에서 언급했지만 함안의 고려동도 두문동의 일환일 것이며 주인장은 재령이씨 모은(茅隱) 이오(李午) 선생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인데요

고려가 망하자 이오 선생은 산간벽지를 찾아다니다가 오직 띠(茅)만 우거진

골짜기(谷)에 터를 정하고

고려의 유민임을 증거 하기 위하여 담장을 쌓고

밖은 조선땅이라 해도 안은 고려인의 거주지라는 표시로 고려동학(高麗洞壑)이라는 비석을 세웠답니다


모은 선생은 아들에게 조선 왕조에 벼슬을 하지 말 것과

자신의 신주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라고 당부했다네요


이후에 후손들도 이곳에 우물을 파고 논밭을 일구어서 터전으로 삼고 자급자족하였기에 오늘날에도 고려동 혹은 장내동(牆內洞)이라 부른답니다


조선에 벼슬을 하지 않은 것은 길재 선생도 마찬가지이긴 한데요

자식에게 만은 달랐던 것 같습니다


태종 이방원이 길재의 학문을 높이사서 태상박사에 임명하였으나 [충신은 두 임금은 섬길 수 없다]하고 거절했죠


하지만 아들에게는

[내가 고려의 임금을 섬겼듯이 너는 너의 임금을 섬겨라]

하면서 관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오 선생의 후손들은 완곡하여 고려동에서 600여 년 간이나 살아왔다고 합니다


조선에 협력하지 않고 은둔한 선비들의 호를 보면 숨을 은(隱) 자가 많습니다

아마 100명도 넘을걸요


이오 선생도 모곡리에 은둔했으니 모은이라 했을 것이고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를 [고려충절 3은]이라 하죠




산청으로 기수를 돌립니다

덕천서원은 남명 조식 선생을 배향한 곳이고요


작년에도 배롱꽃을 보았습니다


링크 ; https://story.kakao.com/_eTZCf4/bWnbUE5mpB0


유일하게 24시간 개방하는 서원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유식공간이 없는 것을 비롯하여 서원의 규모가 좀 작은 것이 남명 선생의 네임 밸류에 비하여 걸맞지 않아 보입니다만 선생은 광해군 때 집권했던 북인 세력의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인조반정에 의하여 북인은 몰락했고 이후 역사에서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죠


북인의 짧은 치세와

불명예스럽게 정권을 내줬고

정권을 빼앗긴 이후로는 경상도 기질답게 [졌으니 깨끗하게 물러난다]는 기치아래 단 한 명도 권력에 기웃거리지 않았기에 남명은 과소평가되었을 겁니다


남명 선생을 띄워 줄 권력자가 없었다는 뜻이죠


실은 퇴계 이황과 동갑이며 학문적으로도 쌍벽이었고

특히 이론에 치중하던 당시의 성리학에 반하여 남명 선생은 철저히 실천을 전제로 하는 실천적 성리학을 추구했습니다




함양의 남계서원으로 가는 길목에 대원사가 있더군요

백일홍이 아주 잘 피었던데요


함양에서 최고 학자는 아무래도 일두 정여창 선생일 겁니다


김종직에게 수학을 했죠

남계서원의 정여창,

청계서원의 김일손,

도동서원의 김굉필은

김종직의 제자들이고

남계와 청계서원은 붙어있습니다


좌안동

우함양

이라 할 정도로 성리학의 메카였고

그 선봉에 일두 선생이 있었죠


정여창 선생의 학문적 깊이는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동방 5현에 올려놓았습니다


남계서원도 예전에 포스팅한 적이 있습니다


링크 ; https://story.kakao.com/_eTZCf4/DO2lFJuN43A


가까운 곳에 개평 한옥마을이 있고 최대지분은 일두 선생의 생가일 겁니다

묘소도 인근에 있어서 참배를 했죠




고령의 도암서원을 답사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김면 선생을 배향했고

묘소와 신도비가 있는 유적지입니다


배롱꽃은 절정을 지나 많이 퇴락했지만

수령은 이곳이 최고이고

수형은 남계서원이며

조화로움은 덕천서원

개화의 절정은 대원사였습니다




다음의 배롱꽃 방문지는 합천의 호연정입니다


아무래도 지난주에 답사했던 함안의 무산사와 관련이 있어 보이더군요


무산사에 있던 공경할 경(敬) 자가 이곳에도 떡하니 있었거든요


검색을 해 보았더니 역시


신재 주세붕 선생의 당질인 이요당 주이 선생이 세운 정자이며 이곳은 상주 주씨의 세거지라 하는군요


마지막으로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소나무

를 친견(?)했는데요

500년의 포스에서 엄청난 기(氣)가 뿜어져 나오는 듯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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