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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동회 Jul 29. 2024

백일홍 투어

병산서원 무산사

소나기는 피하라고 하더이다

더위가 창궐하는 폭염에는 산행도 섬 탐방도 무리수인 것 같아서 행보를 살짝 내려놓고 백일홍 투어에 나섰습니다


모름지기 백일홍 하면

선비가 연상되고 기와지붕과 담장이 받쳐줘야 제맛이며 이런 집은 다분히 서원과 고택입니다


백일홍의 꽃말이 부귀인 것도 고관대작의 집, 고택과 무관하지 않겠죠!


100일(百日) 동안 붉은(紅) 색 꽃을 유지한다 하여 백일홍일 텐데요


진짜 백일씩이나 필까요?


꽃송이 하나가 피어 있는 기간은 10일쯤 된다고 합니다

이들이 릴레이 식으로

핀 꽃은 떨어지고

꽃 봉오리는 피고

그러기를 100일쯤 반복된다고 간주하는 것이겠죠!


흔히 배롱나무라고도 하잖아요


[백일홍나무]에서

[배기롱나무]로 변음되었다가 "기"가 없어지고 지금의

[배롱나무]가 되었다고 합니다



초절정 배롱꽃을 쫓아 대구와 안동 방향으로 선회했는데요


대구는

#신숭겸_유적지 (申崇謙 遺蹟地)

가 대세이고

안동은

#병산서원 (屛山書院)

이 최고입니다


이 두 곳을 기본으로 하여

#서계서원 (西溪書院)

#체화정 (棣華亭)

#삼태사묘 (三太師廟)

#임청각 (臨淸閣)

#월영교 (月映橋)

을 돌아보며 살을 보탰고


귀갓길에 함안 칠서의

#무산사 (武山祠)

를 답사했습니다



#서계서원


신숭겸 장군 유적지를 탐방하고자 했는데 개방하는 시간이 10 00 ~ 17 00로 제한되어 있더군요


하여

새로운 배롱꽃 명소 서계서원으로 먼저 갔습니다


1781년 이곳 유림의 뜻을 모아 이문화(李文和)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으며

1801년 이주(李輈) 선생을 추가 배향하였다고 적혀 있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이문화 선생과 이주 선생에 대한 프로필을 전혀 모릅니다


검색을 해 보았죠

이문화 선생은 여말선초의 문신이며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이주 선생은 이문화의 8대손으로 조선 중기 임진왜란 즈음에 학자와 의병장으로 활동하셨더군요


관리가 잘 되고 있는 느낌이었고 꽃도 절정이었습니다



#신숭겸_장군_유적지


자동차로 약 15분 거리의 신숭겸 장군 유적지로 옮겨 갔습니다


나라에서 유지 관리하는 게 아니라 평산신씨 문중에서 운용하는 것 같은데요

잘 정돈돼 있습니다

아마 좀 전에 보았던 서계서원도 인천이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겠죠!


이곳은 신숭겸 장군이 왕건을 대신하여 장렬하게 전사한 곳입니다


아래 링크를 보시면 신숭겸의 이모저모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링크 ; https://story.kakao.com/_eTZCf4/e7ei1EntKbA


배롱꽃은 시기가 절묘하여 작년의 흐릿한 수준과는 차원이 다르더군요

때마침 소나기가 내려서 더욱 짙붉게 보였습니다



#병산서원


안동으로 올라갑니다

원래 배롱꽃하면 병산서원이죠


아래 링크는 3년 전에 빡세게 탐방한 포스팅인데요


https://story.kakao.com/_eTZCf4/D3nG4EawoX0


우리나라 서원 중에서 건축의 백미이며

풍경이 가장 뛰어나기로 정평이 나 있는 곳이죠


임진왜란 때 국무총리와 계엄사령관이 되어 전쟁을 진두지휘하셨던 유성룡 선생을 배향한 곳입니다


전쟁의 참혹함과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함을 후세 사람들이 깨우쳐 대비하라는 의미로 지은 책이 징비록인데요


이분은 행정가, 정치가 이전에 성리학자입니다

퇴계 이황 선생의 수제자였죠


인품으로 보나

품격으로 보나

이분을 배향하는 서원이 있는 건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요

그곳이 바로 병산서원입니다


유식 공간인 만대루는 우리나라 서원 중 가장 큰 규모이고 건축미와 경관이 워낙 좋아서 아마 국가 보물로 지정되었을 걸요


임금님께 민의를 전달하는 영남만인소의 산실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작렬하는 불볕더위에도 많은 분들이 병산서원의 정서를 만끽하고 있더군요



#체화정


조선 중기 이민적이 형제간의 우애를 기리기 위하여 지은 정자라고 합니다


이곳 배롱꽃은 드문드문 아직 덜 피었더군요



#류성룡 묘(墓)


다음 코스 삼태사묘로 가는 길목에 병산서원의 멘토 류성룡 선생의 묘가 있습니다


그가 살던 하회마을에서 15km쯤 떨어져 있는데요

묘소를 찾아 참배를 했죠

선생에 대한 이력이 주마등처럼 스캔이 되더이다


성역화를 하려고 주변을 조성하는 것 같은데 뭔가 좀 석연치가 않았습니다

공사를 하다가 중단된 것 같기도 하고


축대는 돌을 쌓지 않고 흙과 잔디를 심었는데 그나마 부실하여 흙더미가 빗물에 쓸린 채 흉물로 변해 있더군요


왜란에서 조선을 구한 선생,

학문이 최고봉에 오른 선생,

남인의 존경받는 영수였는데 묘소가 이게 뭡니까?


병산서원으로 가는 길이 아직도 비포장 도로인 것 아십니까?


광주가 극 진보의 성지가 되어 5ㆍ18과 세월호만 주구장창 신봉하는 사이 뒤처질 대로 처져서 변변한 대형 마트하나 없다는 것 아닙니까!


대구 안동도 보수의 기치 아래 양반만 찾고 있는 동안 도로포장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경쟁이 없는 사회,

말뚝을 공천해도 당선되는 지역,

공산주의 국가들이 망하는 건 99%의 몰표 때문입니다



#삼태사묘


태사는 정1품 관직이며 최고의 명예직이라고 합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하사한 벼슬이죠


세(三) 명의 태사(太師)를 모신 사당(廟)이라는 의미인데요

누구일까요?


김선평 선생

김행 선생

장정필 선생입니다


왕건과 견훤이 맞붙은 고창(안동의 옛 이름) 전투에서

열세에 있던 왕건을 지원하여 승리로 이끈 주역들입니다


왕건은 이 승리로 인하여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원동력이 된 것이죠


견훤은 승승장구하다가 고창전투에서 지는 바람에 쇠락의 길을 걸으면서 후백제가 망했습니다


이 전투의 결과 비로소 동(東) 쪽이 편안(安)해졌다 하여 고창을 안동으로 고쳐 부르게 된 것이고요


왕건의 입장에서 보면

이 세 사람은 엄청난 은인이었을 것이며

이들의 충정을 높이 사서 각각 성을 하사했는데


김선평은 경주김씨에서 안동김씨로

신라 왕실의 진골 출신으로 알려진 김행에게는 권씨 성을 제수하여 그 유명한 안동권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장정길 또한 안동장씨의 시조가 되었답니다


김선평은 기존의 안동김씨와 구분하기 위하여 신(新) 안동김씨로 분류하였죠



병자호란 때

머저리 인조 임금이 강화도로 도망가던 중 덜미가 잡혀서 황급히 피한 곳이 남한산성인데요


청나라 왕초 홍타이지는 남한산성을 에워싸고 항복하기를 종용하는데

그 절체절명의 시간에도


[항복하여 후일을 도모하자]는 최명길과

[무슨 소리! 오랑캐한테 항복할 수는 없음이야 끝까지 싸워야지] 하는 김상헌과 첨예하게 대립하다가


47일 만에 인조 임금이 성문을 열고 나와 결국은 항복했는데 오랑캐 청태종에게 큰 절을 한 번하고 이마를 세 번 땅바닥에 찧고

이러길 세 번


이른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禮)를 갖추고서야 전쟁이 끝났습니다


당시의 척화파 김상헌!


그 후손들이 조선 후반 세도정치를 누리면서 조선을 유린한 그 안동김씨 가문이고요


최근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불거진 김옥균의 3일 천하 운운~

그 김옥균도 안동김씨이며 김상헌의 큰형 김상용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면 구 안동김씨의 대표적인 인물이 구굴까요?


세조가 쿠데타를 하여 어린 조카 단종을 폐했을 때 단종을 복위하고자 지식인과 벼슬아치들이 모의를 하였던바

동지들을 배신하고 거사를 세조에게 고해바친 인물이 김질인데요

구 안동김씨입니다


170년쯤 후 김질의 후손 김자점이 세상을 어지럽히며 역모죄로 처형되었고


그로부터 280년 후

선대의 배신과 역모의 아이콘에서 벗어나려 했을까요

독립운동의 대명사 김구 선생이 바로 김질, 김자점의 후손이랍니다


최근

배신자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대두되고 있는데요


김선평, 권행, 장정필은

왕건에게야 충신이었겠지만

신라 왕실과 후백제의 견훤 입장에서 보면 철저한 배신자이고요

김질과 김자점 또한 제대로 된 배신자 아닌가요



#임청각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지낸 이동녕의 생가라고 합니다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99칸짜리 집이었다 하네요


바로 옆에 법흥사 터가 있고 7층전탑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더군요



#월영교


안동댐 하부에 다리가 여럿인데요

사람만 다니는 인도교 이름이 월영교입니다


운치보다는 녹조가 강을 덮어서 퀴퀴한 냄새도 나고

이건 아니올시다


귀갓길에 함안 칠서의 무산사를 답사합니다



#무산사


앞에서 여러 서원이 나왔지만

대원이 대감이 통치하던 고종임금 시절에 사액 서원 47개만 남기고 1천여 개를 모조리 철폐할 정도였으니까 서원 만능주의에 의한 서원의 폐해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습니다


비리의 온상이었죠


뭐든 새로운 게 나타나면 처음에는 모두가 참신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변질되고 악행의 소굴로 변해 버리는 게 탈입니다만


그 서원이라는 제도를 구상하고 설치하신 분이 바로 신재 주세붕 선생인데 오로지 성리학을 강학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목적이었을 겁니다


지금은 소수서원으로 바뀌었지만

풍기군수로 재직하면서 세운 조선 최초의 서원이 백운동 서원인 것이죠


풍기에서 최초로 인삼을 재배한 것도 주세붕 선생의 타이틀이더군요


저는 어련히 풍기나 영주분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함안 출신이네요


무산사 터에서 태어나셨고

무릉이라는 마을 이름도 신재 선생께서 중국의 무릉도원을 밴치마킹하여 지으셨다고 합니다


무산사는 주세붕 선생의 사당으로 보시면 되겠고

초상화도 이곳에 있습니다


서원의 종조답게

무산사의 포스나 품격이 장난이 아닙니다


다만 이곳의 상주주씨 문중이 연로하신지 관리 상태가 깔끔하지는 않더군요


역사적 상징성을 감안할 때

함안군 최고의 문화재라 여겨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데 방치되어 있는 것이 어째 좀 불안 불안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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