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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동회 Jul 22. 2024

경주 구경

첨성대 불국사 오릉

노천 박물관 경주입니다

10번도 넘게 다닌 것 같은데요

못 본 게 아직도 많습니다


이번 여행의 컨셉트는

임금님의 무덤인 왕릉을 위주로 찾아보았습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첨성대

그런데

첨성대가 좀 기울었던데요

몇년 지나면 보수한다고 떠들석할 것 같습니다

미리 많이 봐 두시는 게 좋을 듯!


불국정토의 #불국사

큰법당 앞의 #다보탑 #석가탑

그리고

#석굴암 등 건축물을 먼저 답사하고


#김유신묘

#태종무열왕릉

#진흥왕릉

#진지왕릉

#김인문묘

#오릉 의 박혁거세왕릉 등

이름 모를 무덤을 족히 40여 기는 보았지 싶습니다


무덤의 형태와 크기는 대동소이하지만

김유신묘는 좀 특이했습니다


봉분의 크기는 여느 왕릉과 같은데 무덤 하단에 도래석을 둘렀고 도래석에는 12지신상을 새겼고요

별도로 이를 보호하는(?) 난간석을 둘렀습니다

다른 왕릉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이더군요


묘비도 2기였습니다

신라 태대각간 김유신 묘

(新羅 太大角干 金庾信 墓)


다른 한기는

개국공 순충장열 흥무왕릉

(開國公 純忠狀烈 興武王陵)


김유신을 흥무왕으로 추존한 것이죠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묘를 보려면 매표를 해야 하고 흥무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들어갈 때는 아무도 없었는데

묘를 둘러보고 나오니까 어르신 두 분이 계시더군요


아마도 검표를 하시는 게 아닐까 싶어

딸랑 무덤만 있고 볼 게 아무것도 없던데 입장료는 왜 받습니까?


아이고 내가 있을 때 오지 그랬소?


이런저런 말씀 끝에 비석의 왕릉과 왕묘의 글자에 대한 비밀을 알려 주셨습니다


릉(陵)의 글자에 물을 부으면

묘(墓)자로 바뀐다는 겁니다


에이 그럴 리가 있습니까 했더니

진짜라고 하시면서 김유신의 무용담과 신비주의를 알려 주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페트병 하나를 들고 다시 무덤으로 들어가니까 따라오시데요


어르신께서 시키는 대로 글자 릉(陵) 위에 물을 부었습니다

서서히 묘(墓)자가 나타나더군요


그러니까 원래는 글자가

왕릉(王陵)이 아니라

왕묘(王墓)였던 거죠


왕의 무덤을 묘라고 하지는 않잖아요

왕이 아닌 사람의 묘를 릉이라 하면 더더구나 안 되는 것이고요


처음에 왕묘라고 새겼다가 묘자를 같은 색의 돌가루와 접착제로 메워서 평평하게 한 후 그 자리에 릉자를 다시 새긴 겁니다


그러니 얼핏 보면 감쪽같이 왕릉으로 보이지만


비가 오거나 물을 부어서 글자를 적시면 메웠던 돌가루의 글자가 나타나게 되겠죠


원래의 돌과 메워진 돌가루의 밀도차에 의해서 물을 빨아들이는 시간이 달라서 나타나는 현상일 겁니다


글자를 자세히 보니 메운 자국이 확연히 보이더군요

이런 사실을 모르고 무심코 보면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아는 것만큼 보이는 것이죠



태대각간은 김유신에게만 부여한 관직이라고 합니다


원래는 각간인데 워낙 뛰어나서 각간으로는 부족하니 대각간이라 호칭했고 김유신의 경우는 대각간으로도 모자라서 태대각간으로 했다는 거네요


후대에 내려와서는

김유신의 업적에 비하여 태대각간도 어림이 없다 하여 아예 흥무왕으로 추존했습니다


임금님 반열인 것이죠


이 무덤을 두고 일부 학자는 김유신이 아니라 신무왕의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사례도 있는 모양입니다



김유신은 금관가야의 왕손으로 김해김씨입니다


김춘추는 경주김씨이며 원래는 신라의 성골이었죠


증조할아버지가 진흥왕이고

진흥왕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백제의 근초고왕과 비슷한 레벨입니다


신라의 틀을 잡고

영토를 많이 넓힌 탁월한 임금이었죠

북한산에 있는 비봉의 비석은 진흥왕이 세운 순수비입니다


그렇게 용맹하고 영민한 임금 밑에 얼치기 아들이 있었걸랑요

진지왕인데요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4년 만에 쫓겨났죠


폐위되는 바람에 성골에서 진골로 강등되었고


진지왕의 아들 김용춘은 할아버지 진흥왕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성골 진평왕을 두고서 진골이 임금이 될 수는 없었으며 더군다나 아버지가 부덕하여 쫓겨났으니 임금이 될 자격이 아예 봉쇄되었죠


하지만 아들 김춘추와 꾸준히 권력의 근처에서 얼쩡거리며 가문의 영광을 도모해 왔을 겁니다


성골 진평왕은 아들을 낳지 못했죠

하여 딸이 즉위했으니 바로 선덕여왕입니다

선덕 사후 진덕여왕이 정권을 잡았으나 결국 성골은 대가 끊겨 버렸고

화백회의에서 진골이지만 왕손의 자제 김춘추를 임금으로 추대했으니 그가 바로 신라 제29대 임금 태종무열왕입니다

그러니까

김춘추는 진골 출신으로서 최초로 왕이 된 셈이죠



김춘추는 김유신보다 열 살 어립니다

여차저차 하여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와 결혼하였고 일곱 아들과 두 딸을 낳았네요


큰 아들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성한 문무대왕이고

둘째 아들은 김인문인데 아버지 김춘추를 빼 닳아서 정통 외교관이었습니다


김춘추의 왕릉 바로 앞에 김인문의 묘가 있더군요


큰딸은 고타소인데 대야성 성주 김품석에게 시집을 갔죠

대야성은 지금의 합천이고요


백제의 의자왕이 군사 1만을 풀어서 대야성을 함락했고 김품석과 딸 고타소의 머리를 잘라서 백제로 가져가버렸습니다


이에 김춘추가 돌아 버렸죠

독기가 올라서 철천지 원수로 삼고 복수혈전을 벌린 것이 이른바 신라의 삼국통일입니다


막내딸은 누굴까요?


요석공주입니다

원효대사와 결혼을 했죠

낳은 아들이 설총이고요


원효가 서민불교의 대명사인 이유가 되겠죠!

동시대에 살았던 귀족불교의 정점은 의상대사입니다


원효가 의상보다 8살 위인데요 둘이서 당나라로 유학을 가다가 하도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다음날 알고 보니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 하여


어제 물과 오늘 물이 같거늘 내가 느끼는 마음은 왜 이리 다를까!


여기서 해탈한 거죠

바로 마음먹기 달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


이미 도가 터 버린 원효는 유학을 그만두었고

의상은 당나라로 유학하여 화엄을 깨닫고 돌아왔습니다


이 땅에 화엄을 퍼트리고자 제일 먼저 지은 절이 바로 소백산 밑 부석사라는 것 아닙니까!



글이 삼천포로 가버렸네요


하여간

김해김씨와 경주김씨가 합심하여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뤄냈습니다


김유신의 성장과

통일의 과정을 포스팅한 글이 있어 링크합니다


단석산 링크 ; https://story.kakao.com/_eTZCf4/gCe7c1yVuP0




역사에서 만약이란 없습니다

그래도 말입니다

딱 한 번만 역사를 되돌릴 수 있다면 저는 삼국통일 시절로 가 보고 싶습니다


의자왕이 신라의 대야성을 침공하지 않았다면


김춘추가 의자왕에게 원한을 품지 않았다면


김유신이 단석산에서 무예를 연마하지 않았다면


김춘추와 김유신이 처남매부가 아니었다면


연개소문이 김춘추와의 협상을 콜 하고 되치기를 해서 신라와 백제를 먹어 버렸다면


김춘추와 당태종과의 협상이 결렬되었다면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고구려가 신라와 백제를 먹고


신라의 외교관 김춘추를 앞세워

신라 장군 김유신과

백제 장군 계백과

고구려 장군 연개소문이 힘을 합쳐서 신생국가 당나라를 처 버리고 왜놈을 굴복시켰다면 지금의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는 대한민국이지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국민성이

남 잘되는 꼴 못 보고

남에게 지고는 못 살며

제 잘난 맛과

제 주장만 펴고 살며

나는 되지만 너는 안 된다는 민족이라 나라가 깨져도 벌써 깨졌겠죠 ㅎㅎ


남북으로 찢어진 지 80년

동서로 갈라진 지 45년

아마도

아마도 말입니다

조선시대의 땅 덩어리로

합쳐 기기는 불가능할 겁니다

정칫꾼과 모사꾼들이 멸망하지 않는 이상 말입니다



번외입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비가 내렸고

창원 터널을 지났더니 하늘이 새파랗게 맑은지라 다짜고짜 불모산으로 핸들을 돌렸습니다


조망이 얼마나 깨끗했던지 년간 몇 안 되는 날씨였답니다


이 정도면 저녁노을도 멋지겠다

경주에서 돌아올 때 다시 한번 올라와 보자 싶었죠


위에서 읊은 주인공들의 무덤을 찾아보고

선덕여왕 무덤을 보려고 하다가 불모산의 석양이 기다린다 싶어 다음으로 미루고 창원으로 향했죠


불모산 중턱쯤 올라갔을까

운무가 심상찮습디다

내친김에 정상까지 갔으나 아침에 그 좋던 풍경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군요


해발 802미터 밖에 안 되는데도 이번 날씨는 변화무쌍했습니다


한 번도 불모산에서 해넘이를 본 적이 없습니다만

꽤 근사한 모양입니다

삼각대를 펴 놓고 대기하는 진사분들이 빼곡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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