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낭만 데이트

by Chong Sook Lee



비가 온다. 봄비가 온다. 비가 오면 세상은 더없이 푸르고 싱그럽게 변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좋다. 마른풀들 사이로 나오는 새로 나온 풀들이 들판을 덮고 온갖 생물들이 꿈틀대며 기어 다니고 계곡물은 강을 향해 힘차게 흐를 것이다. 고여있는 모든 지저분한 것들도 함께 흘러가고 돌을 덮었던 미끄러운 이끼들도 함께 씻겨 내려갈 것이다. 세상은 다시 눈부시게 빛나 상쾌하게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오는 비가 고맙다. 비가 오면 꼼짝 못 하고 집에 있어야 하고 축축하여 싫다는 생각을 했는데 요새는 생각이 바뀌었다.


비가 와도 걱정할 것 없다. 비옷을 입고 우산을 쓰고 산책을 하면 나름대로 더 낭만이 있어 좋다. 우산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지가 너무나 오래되었다. 차 타고 출퇴근하고 쇼핑하고 놀러 가기 때문에 비가 와도 비에 젖지 않아 우산도 비옷도 없이 지냈는데 얼마 전에 우비를 사서 비올 때마다 입고 다니니 나름 재미있다. 지난여름 손자들이 왔을 때 비가 많이 쏟아진 적이 있었다. 지붕에서 떨어지는 비가 신기했는지 손자가 밖에 나가자고 해서 우산을 쓰고 처마 아래서 한참을 우산 속에서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맞는 비라서 그런지 손자 덕분에 나도 즐거웠다.


아이들은 새로운 무언가를 하며 배우는데 어른들은 옷이나 신발이 젖을까 봐 무조건 하지 말라고 한다. 학교에 가서 책으로 배우는 지식이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면서 배우는 것도 좋다. 손주들은 호기심이 많고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하고 싶어 한다. 비를 맞아 보지 않으면 모르고 추워보지 않으면 모르고 배가 고파 보지 않으면 모른다. 손자들이 하고 싶다고 하면 나는 웬만하면 다 하게 한다. 나도 모르게 좋은 할머니, 멋진 할머니가 되어간다.


나이가 들면 아이가 된다고 하는데 나도 그런가 보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걷고 싶고, 눈이 오면 눈사람을 만들고 싶고 이른 봄에 지붕에 있는 눈이 녹아 고드름이 생기면 어릴 때처럼 빨아먹고 싶어 진다. 철부지 노릇을 해도 그리 큰 해가 되지 않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하지 않고 살다 보니 앞으로 할 수 있는 날들이 줄어든다. 더 늙기 전에 애들처럼 놀고 싶다. 비가 오락가락하더니 죽죽 내린다. 메마른 땅이 비를 만나서 좋아라 한다. 안 그래도 기다리던 비가 오니까 정말 좋다.




우비를 입고 산책을 나간다. 온 숲이 파란색으로 갈아입고 바람 따라 춤을 춘다. 어제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루 사이에 길가에 나와서 앉아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풀들이 어느새 숲을 덮고 나무들은 너도 나도 푸른 옷을 입고 비를 맞고 서 있다. 겨우내 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서로 포옹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봄은 아무리 바람이 방해를 해도 꽃을 피우는 마술사다. 앙상하던 나무에 어느새 꽃이 만발한 것을 보면 정말 자연의 힘은 위대하다. 날씨가 추워도 누가 봐주지 않아도 꽃을 피는 나무들이 기특하다.


하얀 꽃, 분홍꽃, 색깔도 곱다. 새들이 찾아와 꽃잎을 하나 물고 수줍은 듯 어디론가 날아간다. 다람쥐 두 마리가 숲 속에서 연애를 하는지 서로를 쫓아다니며 나무를 오르내린다.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애절하게 짝을 부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비가 멈추는 듯하더니 또 쏟아지지만 이대로 걷는 게 좋다. 나무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지만 괜찮다. 비를 맞으며 남편과 낭만의 데이트를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 하루가 너무 길고 지루한데 이렇게 나왔더니 너무 좋다.


며칠 사이에 민들레가 부쩍 자랐고 산나물도 한두 개씩 눈에 보이는 것을 보니 다음 주엔 뜯어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걸으면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것만도 좋은데 산나물까지 뜯으면 금상첨화다. 비가 와서 산책하는 사람들이 쇼핑몰로 갔는지 숲이 아주 조용하다. 남편과 나만의 발자국 소리만 들린다. 계곡물에서 헤엄을 치며 노는 오리도 오늘은 한가롭다. 우리가 가까이 가도 도망가지 않고 물길을 따라 빠르게 지나간다. 남편과 나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 숲이 되어 간다. 어딘가 멀리 여행을 간다 해도 비가 온다고 집으로 돌아올 수 없다. 여행을 왔다고 생각하며 이 순간을 즐기면 된다. 비가 오면 비 오는 대로의 낭만이 있다.


빗살이 제법 세다. 발걸음을 재촉하며 주차장을 향한다. 이렇게 비를 맞으며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고 오늘을 보낸다. 삶은 하루하루 재미있는 놀이를 하며 사는 것이다. 줄넘기나 공깃돌 놀이에 정신이 빠져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하던 때가 이제는 추억의 한 페이지에 있듯이 비 오는 날의 데이트도 추억의 노트북에 적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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