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산후조리를 해주려고 딸네 집에 온 지 열흘이 되었다. 그동안 딸이 출산하여 외손자가 태어난 지 1주일이 된다. 매일 무엇을 해 먹을까 하면서도 잘 넘어갔는데 오늘은 무엇을 해 먹을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난다. 출산을 한 딸에게 무언가 맛있는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끼니때가 되면 무엇을 해 주어야 할지 늘 고민이다. 내 집에서야 이것저것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 주었는데 막상 딸네 집에 와서 음식을 해주는 게 내 집과는 다르다. 양념도 다르고, 재료도 다르고, 평소에 딸과 사위가 먹는 음식도 다르기 때문에 같은 음식을 해도 맛이 다르다.
아기를 낳아 모유 수유를 하기에 젖이 잘 나오는 음식을 해 주고 싶은데 워낙 입이 짧아서 한 가지를 두 번 이상 못 먹는다. 한국처럼 재료가 풍부하지 않고 장을 보러 가기도 그리 쉽지 않아 일단은 냉동고에 있는 재료를 조금씩 꺼내서 먹고 있는데 아무래도 오늘 낮에 먹을 음식이 마땅치 않다. 오늘 아침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팬케익에 블루베리를 넣어 만들어 주었더니 잘 먹어 기분이 좋았다. 실컷 배부르게 먹은 아기는 자고, 딸도 피곤하다고 누워서 쉰다.
생선을 해 주려고 냉장고에 꺼내놓기는 했는데 매운탕을 해주면 고춧가루를 넣어야 맛이 나는데 산모가 매운 것을 먹으면 아기에게 안 좋을 것 같고, 생선 튀김을 해주려니 너무 기름질 것 같아서 닭을 삶아서 닭곰탕을 만들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과는 신경 쓰지 않고 만들어 먹고사는데 딸과 사위는 그렇지 않다. 뭐든지 금방 신선하게 만들어 먹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이다 보니 많이 만들어 놓고 끼니때 데워 먹는 것도 싫어한다. 그러니 몸과 마음이 바쁘고 분주하다.
아이들이 쉬는 동안 동네 한 바퀴 걸으면서 바람이라도 쐬고 싶어 집을 나선다. 열흘 전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완연한 봄이다. 이곳에 오고 3일 후에 눈이 와서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은 다 녹고 여기저기 꽃이 피고 나무에는 꽃망울이 매달려 있다. 아직은 바람이 차지만 햇살은 따뜻하여 봄이 온 것이 실감이 난다. 한참을 걸어서 큰 길가로 나와서 한 바퀴 돌아가는 곳에 커다란 슈퍼가 눈에 띈다.
각종 봄꽃들이 진열대에 놓여 있어 한참을 들여다본다. 꽃은 정말 보기만 해도 기분 좋게 하는 마술이 있다. 사람들이 오고 가고 들락거리는 슈퍼에 들어가니 온갖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이것저것 구경하며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고기가 있는 곳으로 간다. 갈비와 스테이크가 있고 덩어리 고기와 닭고기가 부위 별로 나란히 쌓여있다. 돼지족을 푹 삶아 먹으면 모유양이 많아진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망설이지 않고 돼지족 두 개와 닭 한 마리를 사가지고 집을 향한다.
빨리 만들어서 딸과 사위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서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특별한 것을 산 것도 아닌데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다. 하늘은 맑고 푸르고 강남 갔던 기러기들이 돌아온다. 겨우내 누렇던 잔디가 봄이 가까워지면서 파랗게 자라 있고 군데군데 하얀 망초가 세상 구경을 하러 나와서 앉아 있다. 이제 며칠 사이로 꽃들이 만발한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딸이 이곳에 살아 여러 번 왔는데 올 때마다 피어있는 꽃들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처음에 왔을 때 만발한 여러 가지 꽃이 너무 예뻐서 당장에라도 이사 오고 싶었던 생각이 난다. 특히 내가 사는 곳은 겨울이 길고 봄이 짧아서 더욱 그런 것 같다. 봄여름 가을이 급하게 왔다 가는 이유로 제대로 된 봄을 만끽하지 못한다. 올해는 딸 산후조리를 핑계로 3주 정도는 이곳에 있을 것 같은데 나야 좋지만 혼자 있는 남편에게 미안하다. 사시사철 날씨가 좋고 겨울이 있어도 짧아 춥지 않고, 갈매기들이 날아다니는 평화로운 이곳 생활은 노인들의 천국이다. 한번 다녀 갈 때마다 이곳으로 오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오랫동안 살아온 삶의 터전을 떠나 낯선 곳에 오기는 그리 쉽지 않다.
열심히 걸어 집에 도착하여 곧바로 부엌으로 들어가 닭을 삶기 시작한다. 닭곰탕은 흐물거릴 때까지 푹 삶아 고기를 발라서 소금으로 간을 해서 먹으면 된다. 한참을 끓이니 그야말로 맛있게 익었다. 감자를 좋아하는 딸을 위해 감자 몇 개를 같이 넣어 끓이고 텃밭에 있는 파를 송송 썰어 넣어 한 그릇씩 주니 딸과 사위가 맛있게 먹는다. "맛있어 엄마, 정말 맛있어" 라며 땀을 흘리고 맛있게 먹는 딸을 본다. 이게 바로 엄마의 행복이다. 잠시 다니러 와서 힘닿는데 까지 도와주다 가면 된다.
사랑하는 둘이 만나 결혼하고 아기 낳고 잘 살아가니 더 바랄 게 없다. 나는 머나먼 이국 땅에서 세 번의 출산을 했기 때문에 친정엄마가 산후조리를 해주지 못했지만 나는 다행히 딸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어 좋다. 할 줄도 모르는 산후조리를 해달라는 딸의 부탁을 받고 은근히 걱정을 했는데 막상 와서 해보니 할만하다. 집을 떠나와 내 집이 아니라 조금은 불편하지만 이보다 좋은 일은 없다.
마흔에 건강한 첫아기를 순산하고 엄마 노릇을 하는 딸이 참으로 대견하다. 세상에 나온 손자도, 엄마가 된 딸도 서로를 알아가며 조금씩 배우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다. 오늘 만들어준 닭곰탕으로 모유가 충분해져서 손자가 무럭무럭 잘 자라기를 바란다. 엄마의 사랑은 정말 무궁무진하다. 딸아. 엄마 된 것을 축하한다. 많이 많이 행복해라. 사랑한다 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