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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ng Sook Lee Apr 13. 2020

오늘은 죽고 내일 부활하자


부활은 사랑이다.(사진:이종숙)


부활절 아침이다. 부활이라는 단어 하나로도 희망을 갖게 되는 날이다. 두꺼운 겨울옷을 벗어버리고 화사한 옷을 입은 봄은 보는 사람들로 삶의 의욕을 가져다준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봄이라도 생각만으로도 행복하게 한다. 죽음을 겨울로 말한다면 봄은 누구나 새로 태어나는 느낌을 가져다준다. 어둡고 추워 웅크리고 있던 자연이 기지개를 켜며 다시 소생하는 모습은 부활 그 자체이다. 인간 세계는 지금 전염병으로 뒤집히고 생사를 오가며 어쩔줄 모르고 아파하고 있다. 근원지가 중국 우환으로부터 왔지만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이 무서운 바이러스로 세계는 죽어가고 있다. 사회적 거리가 추가 확산을 막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모임과 외출을 자제하고 있다. 확진자수와 사망자수가 기하학적인 숫자로 사람들 마음에 두려움을 가져다준다.

세상은 문을 닫고, 아무도 일을 못하고, 실업자수는  하늘을 찌르고, 사람들은 울부짖는다. 배가 고파 울고  돈이 없어 울고, 일자리가 없어 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은 하루하루 죽어간다. 거리는 텅 비어 아무도 찾아볼 수 없다. 숨바꼭질을 해도 열을 세면 찾으러 나와야 하는데 머리카락 보일까 봐 꼭꼭 숨어버려 찾을 방도가 없다. 사람들은 집에 있으라고 하니까 집에 숨고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 굳이 종교가 있고 없고를 떠나 부활절은 전 국민의 잔칫날이다. 아이들은 부활 계란을 찾는다고 일찍부터 집안을 돌아다니고 정신을 뺀다. 혹시나 부활 토끼가 오며 가며 놓쳤을 계란을 정원 구석구석 찾으러 다닌다. 초콜릿, 옷 그리고, 가방이나 신발도 부활 그림이 그려지고 애나 어른이나 그날 하루를 기분 좋게 신나게 논다.

부활의 기쁨은 누구에게나 가슴 설레게 한다. 해마다 터키를 구우며 시끌벅적한 부활절의 모습은 아무 데도 없다. 우리 둘만이라도 터키를 구워서 먹으며 부활절을 축하해야 하겠지만 왠지 싫다. 아이들 없는 파티는 의미가 없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손주들이 울고 웃고 까부는 소리가 들리는 듯 그립다. 해마다 터키를 구워 온 식구가 다 모여 부활절을 기념한다. 대략 5-6 시간을 오븐에 넣고 구워야 하는 터키는 준비할 것이 많다. 양파와 샐러리를 잘게 썰어 빵과 여러 양념을 섞어 터키 뱃속에 집어넣어 오전 11시에 터키를 오븐에 넣는다. 5시간쯤 지난 후  터키에서 나온 기름을 몸통에 틈틈이 발라주면 맛있게 구워진다. 그 사이에 감자를 삶아서 버터와 우유를 넣고 으깨어 메쉬 포테이토를 만들어 놓고 브로콜리와 옥수수 그리고 완두콩을 삶아놓고 로메니 상추를 잘라서 신선한 샐러드를 만든다.

여러 가지 피클과 당근, 방울토마토, 여러 종류의 치즈와 크래커도 애피타이저로 내놓는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만나서 못한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떠든다. 그런 부활절이 올해는 우리 둘만의 조용한 부활절이다. 터키도 없고 먹다 남은 된장국에 반찬 몇 개를 놓고 먹는 조촐한 날이다. 장을 보러 간지도 오래되었다. 냉장고도 냉동고도 조금씩 비어 가고 있다. 아이들이 장을 봐준다고 하지만 아직 파 먹을 음식이 있으니 괜찮다고 한다. 예전 같으면 여러 번 와서 밥도 먹고 했을 텐데 아이들이 보고 싶다. 지난주에 우유를 사다 우유만 살짝 놓고 간 아들과는 매일 영상으로 얼굴보고 이야기는 하지만 자꾸 마음이 허해진다. 나이가 들어 외로운 마음이 커지나 보다. 아이들의 방문을 기다리며 사는 양로원에 계신 분들의 심정이 이렇겠다 하는 마음이 든다.

이때나 저때나 식구들을 기다리며 문쪽을 바라보고 있을 그분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하늘을 올려다 보아도 땅을 내려다 보아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 밖을 내다본다. 거기다 오늘 아침에는 눈까지 내렸다. 시끄러울 때가 있어야 조용하기를 원하는데 너무 조용하니까 참으로 이상하다. 오늘은 지나가는 차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다들 집안에서 나처럼 하늘 보고 땅을 보며 쓸쓸하게 살고 있나 보다. 과연 언제까지  이 상황이 계속될지 걱정이 된다. 아이들 보는 것이 힘들다고 했는데 그것마저 행복한 고민이었다. 시시한 나날이 짜증 난다 했는데 그것도 그립다. 아무도 없는 세상이 너무 조용해서 싫다. 지지고 볶으면서 살던 그때가 좋다. 문턱이 닳도록 사람들이 오고 가며 들랑 거릴 때가 좋다. 여기저기 사람들을 만나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 때가 그립다.

아이들이 어서 빨리 컸으면 좋겠다고 정신없이  살던 때가 좋았다. 내가 싫어했던 것조차 좋아지는 지금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너무 오래 지속될까 염려된다. 싫은 사람도 같이 있다 보면 정든다고 몸이 멀리 있으면 마음도 멀어지는데 걱정이다. 유튜브로 부활절 미사를 보고 카톡으로 지인들과 부활 축하 메시지를 주고받고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부활절은 그저 쓸쓸하다. 아이들이 있는 집은 여전히 시끌시끌하겠지만 쓸쓸하다. 각자 손에 스마트폰 하나씩 들고 혹시나 뭐라도 나올까 손가락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화면을 바꾸지만 별것도 없다. 아이들이 보내주는 손주 들의 사진을 보고 또 보며 오늘도 하루가 간다. 조용한 부활절이 말없이 간다.

오후가 되니 아침에 내리던 눈은 그치고 화창한 날씨가 유혹한다. 날씨 현황을 보니 영하 5도에 체감온도는 영하 11도로 나온다. 겨울옷을 단단히 입고 모자를 쓰고 목도리도 두르고 장갑까지 끼고 나의 평생 동반자 남편과 함께 동네 한 바퀴 돌고 왔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모두가 외롭게 살아가는 데 옆에서 나와 함께 있어주는 남편이 있어 든든하고 고맙다. 칼바람은  옷 속까지 깊이 들어온다. 걸어가는데 얼굴에 닿는 바람이 너무 추워 잔뜩 움츠린다. 아무도 없는 동네에 바람까지 불어대니 더욱 을씨년스럽다. 사람이 없는 세상이 이처럼 황량한지 새삼 느껴 본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라고 하지만 오늘은 괜히 원망스럽다. 그래도 참자. 참는 자에게 복이 오니까...


우리는 죽어야 부활한다. 어릴 적 예수님이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말을 이해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얼마나 살기 위해 죽어야 함을 배운다. 우리는 매일 죽고 다시 부활한다. 수십 번 수백 번 죽었다 살았다를 반복하며 부활절을 맞는다. 시기와 질투를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울 때 우리는 부활한다. 남이 잘되기를 바라고 남을 도와주며 나를 희생하고 헌신할 때 우리는 부활한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부활은 사랑이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부활절에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못 만남에 감사하자. 우리가 부활하기 위해 오늘은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을 만나러 가는길은 멀고 좁아도 행복합니다.(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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