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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ng Sook Lee Apr 14. 2020

집에 가자… 아들아


즐겁고 행복한 우리집(사진:이종숙)



때로는 며칠 전의 일도 까맣게 잊혀서 어제 무엇을 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생각이 안 난다. 하지만 엉뚱하게 아주 오래된 일들이 또렷이 생각할 때가 있다. 내 기억의 서랍에는 그야말로 많은 추억이 들어있다. 그중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고,  잊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다. 생각할수록 감미로운 것이 있고 그리움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것도 있다. 날씨에 따라 혹은 기분에 따라 이런저런 생각이 떠 오른다.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것이 있고 세월 따라 희미해지는 기억도 있다. 사람들은 몇 가지의 추억이 나 기억들을 가지고 현재를 살아간다. 오늘은 비가 올 듯 하늘은 흐려있어 추운 듯 하지만  겨울 코트가 무겁다는 생각을 하며 산책을 하고 와서 집으로 들어가는데 처음 이 집을 샀을 때가 생각이 났다.

이민 온 지 9년이 되었을 때 시어머니는 캐나다로 이민 가서 살고 있는 아들이 어떻게 사는지 엄청 궁금하셨다. 그때만 해도 국제 전화 한 통 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었고 그나마 전화도 자주 못하고 편지도 안 하니까 이곳을 오시려고 결심하셨다. 영어 한마디 못하시는 어머니께서 단지 아들을 보기 위해 용감하게 비행기를 타고 오셨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31년 전의 일이다. 젊은 사람도 모르는 외국에 가려면 걱정을 하던 때인데  죽기 전에 아들 사는 모습 한번 보시겠다 는 일념으로 오신 것이다. 우리는 그때 당시 나는 두 개의 직장에 다녔고 남편은 교외로 직장에 다녔다.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다녔고 우리는 허술한 아파트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공항에서 어머니를 픽업해서 집으로 모셔다 놓았는데 어머니의 표정이 어두웠다. 고령의 나이에 멀리 오시느라 너무 피곤하셔서 그런가 보다 하며 일찍 주무시게 했다. 다음날 어머니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우셨다. 우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침을 드신 어머니는 정색을 하며 "아들아 집에 가자". 하셨다.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여쭈었더니 이곳 멀리 와서 이런 고생을 하며 이렇게 살 바에는 한국에서도 열심히 일하면 더 잘 살 수 있다며 무작정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하셨다. 우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때 당시 한국은 88 올림픽을 끝내고 한국이라는 나라는 세계에 많이 알려진 상태였다. 우리가 한국을 떠나던 1980년 4월의 한국과는 천지차이로 버젓한 발전 도상국이 되어 있었다.

집집마다 자가용을 가지고 으리으리하고 멋진 아파트에서 편리하게 살았다. 많은 사람들이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며 부족한 것 없이 화려한 생활을 하던 때이다. 막상 어머니께서 우리 사는 모습을 보니 한심한 생각에 집으로 가자고 하셨던 것이다.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달래 드리기 위해 생각지도 못했던 집을 사기로 마음먹고 복덕방에 나온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돈도 없는데 집을 사겠다고 하는 우리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어머니도 우리와 함께 집을 보러 다니시며 기분이 좋아지셨다. 그때 당시 은행 대출 이자는 굉장히 높았지만 무리를 해서라도 집을 사면 어머니의 마음이 조금은 편하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집을 보기 시작하니 정말 우리가 모르던 세상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며 우리가 그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끗하고 정리하며 사는 사람이 있고 더럽고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게 되었다. 각 나라마다 고유의 음식이 있어 음식 냄새가 집에 배어 있어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의 살아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많은 집들을 구경하며 우리에게 알맞은 집을 찾아야 하는데 그리 쉽지 않았다. 돈이 없으니 싼 집을 보러 다녔다. 당연히 싼 집은 허술했다. 집을 구경하다 보니 가격이 비쌀수록 집이 좋아 우리가 생각하던 액수를 조금 올려서 더 나은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다행히 좋은 중개사를 만나서 인내를 가지고 열심히 우리를 데리고 다녔다. 아이들이 어렸기 때문 에 집에 놓아 둘 수없어 함께 움직여야 했다. 내가 좋으면 남편이 싫고 남편이 좋으면 내가 싫어하여  의견이 좁혀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내가 정한 세 가지 조건은 서향집과 코너 집 그리고 집 앞에 버스 정류장 이 있으면 싫다고 했다. 하루는 집을 보러 가서 보니 세 가지의 싫은 조건이  다  포함되어 있어 보나 마나 한  집이라 생각하여 뒷문으로 들어갔다가 앞문으로 나왔다.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관심은 없고 단지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세가지만 생각을 하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 많은 집을 보러 다녔는데 그중 하나가 마음에 들었다. 친한 선배님께 한번 가보시라고 했는데 우리 식구가 살기에는 부엌이 너무 작다며 사지 말라고 하셨다. 특히 이곳 생활은 부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데 마음에 들어 계약까지 하려고 했는데 나중에 가만히 생각하니 그 집을 샀다면 부엌 때문에 바로  후회했을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중개사가 집을 보여 주었는데 평수도 작고 더 오래된 집인데 가격은 훨씬 비싼 집을 보여 주었다. 집도 지저분하고 살고 있던 사람이 살림이 많아서 너무 정신없어 보였다. 집 보러 다니는 것도 피곤해져 가는 중에 중개사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제안은 세 가지 싫은 조건이 있는 집을 사려했던 사람이 은행 대출을 못 받아서 집이 다시 시장에 나왔다며 한번  보겠느냐 하길래 가 보았다. 그런데 그렇게 싫다고 하던 그 마음은 하나도 없어지고 마냥  집이 좋게만 보였다. 뜰도 넓고 코너 집이라 한쪽 옆에 집이 없어 답답하지 않아 시원해 보였다. 창문이 많아 집안도 환하게 밝고 마침  살던 사람이 이사를 간 상황이라서 살림이 없으니 집안이 넓고 좋았다. 서향집이라 여름에 해가 집안으로 들어올까 봐 싫다고 했는데 그것은 커튼으로 해결될 문제였다. 버스 정류장도 우리 집 건너편 집 앞에 있으니 우리 집 하고는 상관이 없었다.

그렇게 문제가 간단하게 해결이 났다. 자세히 보지도 않고 싫다고 했던 집이 가격도 위치도 우리에게 너무나 잘 맞는다. 마치 우리를 기다렸던 집 같다. 길 건너 초등학교가 있어 아이들끼리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없이 좋은 장점이다. 그때 당시 남편과 나는 일을 해서 아이들끼리 등 하교를 했어야 했다. 그런 모든 것을 감안했을 때 더 이상 다른 집을 볼 필요 없이 그날 저녁 당장 계약하고 2주 만에 이사를 오게 되었다. 어머니도 좋아하셨고 이사한 뒤에 여러 친구분들을 집에 초대하여 생신 잔치도 크게 해 드렸다. 아들 사는 모습을 보려고 오셨다가 실망도 하셨지만 우리가 서둘러 좋은 집을 장만하여 어머니는 한 달 동안 편하게 계시다가 기쁘게 한국으로 가셨다.

알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다. 얼떨결에 사게 된 집에서 우리는 31년간 살고 있다. 집은 4방향으로 나뉜 단독주택이다. 현관에 들어서면 마루와 부엌이 있고 왼쪽으로 층계 몇 개를 올라가면 방 세 개와 두 개의 화장실이 있다. 그리고 부엌 옆  층계 밑으로 방 하나와 화장실과  샤워장이 있고 커다란 마루에 벽난로가 있다. 그리고 문을 열고 지하로 내려가면 집 크기의 공간이 하나 더 있다. 냉동고와 세탁기를 놓아두고 잡동사니를 넣어 놓는 공간으로 쓴다. 집 주위에는 많은 나무들이 있어 새들이 날아다니고 여름에는 넓고 시원한 뒤뜰에서 아이들이 뛰어 논다. 여름에는 뒤뜰이 시원하고 넓어 친구들과 바비큐도 하고 텃밭에 여러 가지 채소도 길러 먹는다. 뒤뜰 옆에는 차 두 개가 들어가는 커다란 차고가 있어 겨울에도 따뜻하게 차를 들여놓는다.

한국에서는 사시사철 햇볕이 잘 들어오는 남향집을 선호 하지만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은 이곳은 서향집을 선호한다. 추운 겨울에 마루에 따스한 햇볕이 들어오면 난방비 절약에도 좋다. 뒤뜰이 동쪽이기 때문에 아무리 더운 여름도 뒤뜰에 앉아 있으면 시원하다. 코너 집은 땅이 넓어 여름에는 잔디 깎을 양이 많고 겨울에는 눈을 치울 양이 많지만 집과 집 사이에 끼어있지 않아 답답하지 않다. 그리고 버스정류장이 집 가까이 있으면 소음이 걱정되지만 바로 집 옆도 아니고 앞집 옆이니 괜찮다. 혹시라도 버스를 탈 때에도 멀리 걷지 않아도 좋은 점이다. 살아 보기도 전에 사람들 말만 듣고 선입견을 가지고 싫어했던 세 가지 조건은 너무나 좋은 조건이다. 남들에게 악조건이 나에게는 행운의 조건이었다.

넓고 좋은 집에서 잘 살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오신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해 드리려고 산 집에서 우리는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앞으로 이 집에서 몇 년을 더 살게 될지 모르지만 우리 집이 좋다. 오래 살아서 정이 들어 좋기도 하겠지만 집 구조가 싫증이 나지 않고 정말 편하다. 단층 짜리 가옥은 층계가 없어 노인들 살기 편하지만 모든 것이 같은 층에 있어 항상 집안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또한 2층 집은 계단이 가파르기 때문에 위험하고 다리도 아프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우리 집은 계단도 몇 개 안되고 마루와 방들이 따로 있어 좋은 점이 많다. 어쩌다 아이들이 와서 잠을 자게 되더라도 위아래로 나뉘어서 잘 수 있어서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어 좋다. 병원과 학교가 가까이 있고 쇼핑센터나 성당도 가까이 있다. 의사와 치과도 가까이 있고 약국이나 모든 것이 집 가까이에 있어 아주 편리하다.

세월은 흘러 아이들은 어른이 되었고 나는 그때 시어머니의 나이가 되어간다. 아들이 고생하며 사는 모습을 보시고  가슴이 아프셨을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죄송하다. 하지만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셨으니 마음 편히 가셨으리라 믿는다. 부모는 자식의 행복을 보며 행복해한다. 아이들이 잘 살아가면 부모는 더 바랄 것이 없다. 집을 사던 때가 생각이 나고 지난날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아이들이 잘 자라고 온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금까지 우리를 편하게 지켜준 이 집이 고맙다. 정말로 고맙다. 또한 돌아가신 어머니께 감사하고 싶다. 어머니께서 오셨을 때 " 아들아. 집에 가자."라고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렇게 급히 이 집을 사지 않았을 것이고 다른 집에서 또 다른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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