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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ng Sook Lee Apr 12. 2020

지금 나는… 내일이 무섭다.





내일이 오는 것이 무섭다. 오지 않던 봄이 오기 시작한다. 봄을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힘들어 차라리 기다리 지 않으려고 하던 마음을 알았는지 살며시 온 봄을 맞았다. 하늘은 파랗다. 파란 물감을 뿌려 놓은 듯 구름 한 점 없다. 그토록 심하게 불던 바람도 어디론가 숨었는지 나뭇잎 하나도 흔들리지 않는다. 나무들은 기지개를 켜며 하늘을 향해 만세를 부른다. 추운 겨울을 이겨낸 나무들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잔디를 덮었던 눈은 점점 녹아가고 여러 가지 동물의 모습을 하고 이곳저곳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거북이의 모습으로, 강아지의 모습으로 때로는 토끼나 고양이의 모습으로 여기저기 앉아있다. 눈 속에 숨어서 봄이 오기를 기다리던 누런 잔디는 새 옷을 입기 시작한다. 남쪽 양지바른 곳에는 파릇파릇 새 잔디가 봄 마중을 나왔고 아직도 눈 속에서  늦잠을 자고 있는 친구들이 빨리 일어나기를 기다린다. 어서 빨리 예쁜 모습을 자랑하고 싶다.

햇볕이 내리쬐는 잔디에 토끼가 풀을 뜯어먹고 앉아 있다.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는 마른 잔디에 무엇을 저리도 열심히 뜯어먹을까 궁금하다. 다른 토끼 한 마리가 어디선가 와서 풀을 같이 뜯어먹으려는데 먼저 있던 토끼가 밥그릇을 안 뺏기려고 으르렁댄다. 나중에 온 토끼는 체념하고 나무 뒤로 가 버린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는 모양이다. 다른 토끼가 몇 번을 와서 시도를 하지만 절대로 밥그릇을 내어줄 수 없는 모양이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먹고살기 위한 밥그릇 싸움은 치열하다. 자리를 옮겨가며 오랫동안 무언가를 뜯어먹던 토끼는 어디론가 가 버렸다. 토끼가 앉아있던 뒤에 앉은뱅이 소나무가 있는데 그곳은 겨울에 눈이 안 들어와서 그런지 마른 흙에 무언가가 뾰족하게  나왔다.

자세히 보니 둥굴레의 싹이 땅을 뚫고 나왔다. 잎이 넓고 키는 크지 않아도 하얀 꽃을 피우고 연한 이파리는 나물로 무쳐먹고  뿌리는 말려서 차를 달여 먹는 아주 맛있는 식물이다. 어디에서나 잘 자라고 흔한 이것은 숲 속에 널려있다. 나무 사이로 내려 쬐는 햇빛을 받고 자라고 위에서 옆에서 내려오는 빗물로 자란다. 여러 가지 좋은 점이 많아 약재로도 쓰이고 몸이 약한 사람이 먹으면 기운을 돋는데 도움이 된다 한다. 맛이 순하고 구수하여 집집마다 둥굴레차를 사다 놓고 즐기고 특별한 손길이 필요 없어 사람들 한테 사랑을 받는 식물이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아무 데 나 적응을 잘한다는 것은 참 중요하다. 봄이 언제 오려나 기다리는 사이에 봄은 이미 와 있었다.


앞뜰에는 마다 피는 튤립이 파랗게 나와있고  원추리도 많이 나와있다. 어디서 왔는지 파도 몇 개 자라고 부추도 파랗게 나와서 하늘거린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일주일 사이에 손가락만큼씩 자라서 봄을 알린다. 장미는 여전히 죽은 척 엉큼을 떨고  있지만 머지않아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가시가 겨울보다 힘이 들어 날카롭게 솟아오른 모습이 " 나 살아있어 요." 하는 것 같다. 작은 장미를 사다가 심었는데 탈없이 잘 자란다. 나무를 좋아하는 남편이 해마다 전지를 해주고 순을 쳐주며 낡은 잎을 털어주면 저 혼자 자란다. 잎이 생기고  봉우리가 생겨 꽃이 피기 시작하면 여름부터 늦가을까지 빨간 장미를 피워 낸다. 꽃잎이 많은 겹 장미부터 한 겹으로 피어 내는 장미까지 여러 종류이고 색깔도 연분홍부터 진분홍 그리고 빨간색으로 다양하다.

하루가 다르게 봄이 다가오는데 지금 나는 내일이 무섭다. 내일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봄이 어떤 모습으로 올지 겨울이 어떤 모습을 남기고 갈지 나는 실로 궁금하다. 궁금하다 못해 무섭다. 홈통 옆에 자라는 앵두나무도 봄이 궁금한지  움을 뾰족 내밀고 세상을 구경하러 나왔다. 얼마 안 있으면 연분홍색 꽃을 피울 것이다. 오래전 친정 부모님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실 때 해가 길은 여름 어느 날 저녁을 먹고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산책을 하는데 길가에 빨갛게 익은  앵두가 눈에 띄었다. 엄마와 나는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알알이 박힌 앵두를 두 손으로 마구 따서 실컷 먹었지만 내 욕심을 채울 수 없었다. 그날 엄마와 나는 주머니에 하나 가득 앵두를 따 가지고 집으로 왔다.

집으로 들어가는 뒷문 옆에 층계에 앉아 엄마와 나는 앵두를 먹고 씨를 땅에다 뱉었는데  몇 년 후 앵두나무가 나와서 자라기 시작했다. 해마다 꽃이 피고 앵두가 열리고 나는 여름에 엄마 생각을 하며 앵두를 따먹는다. 연로하신 엄마와 나는 지금도 앵두 얘기를 하며 추억을 더듬는다. 몇 년 뒤에 앵두나무가 너무 많이 자라 가지를 잘라서 차고 뒤쪽에 옮겨 심었는데 커다란 나무가 되어 그곳에서도 잘 자란다. 날씨가 갑자기 좋아지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봄 맞을 준비를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바쁘다. 한국은 이미 벚꽃도 질 시기가 되어가는데 이곳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보이지 않는 봄을 만나는 시간은 너무나 설렌다. 내일은 무슨 봄이 날 찾아볼까 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요즘 나는 정말로 내일이 무섭다. 어느 날 봄이 와서 나를 놀라게 하듯이 어느 날 코로나 19도 없어져 잃었던 일상을 찾았을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아이들과 손주를 만나고 성당도 가고 친구들과 식사도 하며 지난날들을 이야기할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좋다. 바람에 떨어진 마가목 열매가 눈 위에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까치가 먹으며 이리저리 굴려본다. 머지않아 새 잎을 달면 오래된 열매들은 힘없이 다 떨어지고 하얀 꽃을 피고 꽃이 떨어지면 파란 열매가 달린다. 여름내 달려있다가 날씨가 추워지는 가을이 되면 하루가 다르게 빨간색으로 변한다. 열매는 날씨가 추워질수록 더욱더 빨갛게 익어 겨우내 예쁜 꽃처럼 나무에 매달려 있다. 그러면 이곳은 다시 긴 겨울을 맞는다.


심심한 까치가 양지쪽 잔디에서 편하게 쉴 자리를 찾는지 한참을 서성대다가 원하는 자리를 찾았는지 앉아서  편히 쉬고 있다. 어디선가 짝이 날아와 함께 앉아 있더니 소나무 가지 위로 날아가 앉는다. 화창한 날씨를 보며 눈이 다 녹은 장면을 생각하다 보니 벌써 봄이 내 앞에 온 듯하다. 가지 않을 것 같은 겨울도 가고 오지 않을 것 같던 봄도 온다. 아직은 전염병으로 우울한 나날들이지만 그것 역시 어느 날 우리 곁을 떠날 것이다. 소리 없이 오고 있는 봄을 맞이하는 내일이 무섭다. 너무 좋아서 무섭다. 꽃이 피고 내 마음도 피는 봄이 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자연 앞에서 아무것도 계획할 수 없는 시간이지만 갑자기 찾아오는 마음으로라도 봄을 맞으며 맘껏 설레고 싶다. 무섭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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