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없어 겨울 같지 않은 겨울이다. 크리스마스 날인데 하얀 눈 대신에 누런 잔디가 보인다. 눈이 없는 크리스마스라서 이상하지만 멀리서 오는 아이들 걱정을 안 해서 좋다. 해마다 연말에 춥고 눈이 많이 와서 아이들이 휴가를 내고 집에 올 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올해는 그런 걱정은 없다. 겨울인데 눈이 안 와서 좋고 춥지 않아서 좋다. 세월이 갈수록 낭만은 뒷전이고 현실적으로 변한다. 겨울이 오기 전부터 추운 겨울을 생각하게 되는데 올해는 보너스 같은 따뜻한 겨울이라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겨울이 길고 추운 이곳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추위와 눈을 피해서 따뜻한 곳으로 가서 겨울을 내고 온다. 길게는 6개월씩 겨울을 피해 살다 오는 사람이 있고 대개는 1주일에서 2주일 정도의 겨울을 피해 따뜻한 곳으로 휴가를 간다. 밤이 길고 낮이 짧은 이곳의 겨울은 너무 춥고 눈이 많이 오고 길다.겨울잠을 자고 일어나도 봄이 오지 않아 목이 빠져라 봄을 기다리는 곳이다. 이민 초기에는 아무리 봄을 기다려도 오지 않아 봄이 오지 않나 보다 하고 체념하고 있으면 그제야 게으름을 피우던 봄이 기지개를 켜며 온다. 봄이 와도 추운 이곳은 5월이나 되어야 봄 같은 봄이 온다. 봄인지 겨울인지 모르는 봄을 보내면 뜨거운 여름이 오지만 그나마 너무 짧다. 여름이 왔나 보다 하면 벌써 나뭇잎이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고 가을이 시작된다.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여름이 가지 않기를 기다리고, 가을이 더디 오기를 기다리다 보면 겨울은 어느새 와서 겁을 준다. 겨울이 오지 않으면 봄도 오지 않기에 겨울을 반갑게 맞으며 빨리 가기를 바라는데 무거운 궁둥이로 눌러앉은 겨울은 쉽게 가지 않는다. 그런 겨울이 올해는 아주 얌전하게 와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얇은 옷을 가볍게 입고 걷고 뛰는 사람들이 지나간다. 상상도 못 하던 따스한 겨울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하며 특별한 선물을 받은 것 같다고 좋아한다. 엘니뇨 현상으로 따뜻한 겨울을 맞고 있는 이곳은 그야말로 천국이다. 영하 30-40도에도 견디고 살았으니 따뜻한 겨울을 맞을 만하다. 눈도 없고 춥지도 않으니 아이들이 오면 신나게 놀고 편하게 있다가 가면 된다. 작년 겨울에는 어찌나 추웠는지 지금 생각해도 춥다. 추운 날은 자동차 시동이 걸리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시동이 걸리지 않으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고 보험회사에 전화를 해도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불편이 있다. 어쨌든 올해는 복권 맞은 기분이다. 눈이 없으니 눈을 치울 필요도 없고, 춥지 않으니 두꺼운 옷을 입지 않아도 된다. 이맘때는 눈 때문에 엄두도 못 내는 산책도 열심히 할 수 있어 좋다. 계곡물은 꽁꽁 얼어 있지만 숲 속의 오솔길은 눈이 거의 없다.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고 나무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을 보면 '좋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한 겨울에 숲 전체가 봄을 맞은 듯 눈 하나 없는 게 이상하지만 그것 또한 얼마나 다행인가? 농부들은 벌써부터 가물어서 걱정이라고 하지만 아이들이 다녀간 뒤에 1월 달에 눈이 오기를 바라는 것은 엄마인 나만의 욕심이라도 할 말은 없다. 오는 길과 가는 길이 미끄러워서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안심하지 못하는데 눈이 없어 바싹 마른 거리가 예쁘기만 하다.작년 이맘때는 산달이 가까워오는 딸이 염려가 되었는데 태어나서 벌써 10개월이 된 외손자가 집에 온다는 소식에 마음이 설렌다. 어느새 세월 따라 손주들도 다섯이나 되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네 집에 온다고 좋아하는 손주들이 이번 연말에도 잘 놀다 가면 좋겠다.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라고 하지만 아이들은 언제나 보고 싶다. 집이라고 오면 마흔이 넘은 아이들도 어린애가 되는지 한껏 풀어진 모습이다. 실컷 게으름피고 많이 먹고, 많이 쉬고, 많이 웃다가 가기를 바란다. 우리가 있으니 아이들도, 손주들도 모이는 것이다. 형제들끼리 만나고 사촌끼리 만나며 이다음에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어릴 때는 아무 걱정 없는 봄이 되고 여름이 되어 살다가 철이 들면 가을처럼 아름답게 늙으며 겨울을 맞는 것처럼 인생은 계절을 닮았다. 좋은 시절을 맞고 보내며 종착역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다가 만나는 겨울을 이겨내며 봄을 만나는 것이다. 한평생 사는 동안 아무 때나 예고 없이 찾아오는 삶의 겨울은 우리가 거부할 수 없다. 밀치고 도망가기보다 끌어안을 때 아무리 추운 겨울도 춥지 않다. 봄은 머지않아 우리를 찾아온다. 기다리다 보면 꽃도 피고 새도 노래를 할 것이다. 기다림과 그리움이 우리를 살게 한다. '언젠가'라는 시간은 어쩌면 우리에게 이미 와 있는지 모른다. 어제 내가 원하던 오늘이 아니라도 오늘의 나로 행복해하면 된다. 조금씩 길어지는 해가 서산마루에 걸터앉아 내일을 기약한다. 아름다운 인생의 석양을 맞기 위해 열심히 매일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복된 은총이 내리길 바란다. 가을 같은 겨울... 겨울 안에 봄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