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지 않는 여행도 좋다

by Chong Sook Lee

조용한 아침이다. 13명이 오고 가며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드는데 아침에 일찍 잠이 깨어 조용한 시간을 즐긴다. 10개월짜리 외손자를 따라다니면 하루종일 피로하지 않고 웃음꽃이 핀다. 웃어도 울어도 똥을 싸도 예쁘다. 층계를 오르내리고, 앉아서 무언가를 만지고, 여기저기 기어 다니며 말썽을 피워도 사랑스럽다. 다섯 번째 손자인데 유난히 더 애착이 간다. 역시 사랑은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맞나 보다. 손주를 안고 있으면 온갖 시름이 다 녹는 것 같다. 어느새 컸다고 고집을 부리고 좋고 싫은 것을 표현한다. 먹기 싫으면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살래살래 돌리고, 좋은 것은 입을 벌리고 맛있게 먹는다. 무언가를 붙잡고 일어서서 돌아다니고, 눈에 보이는 것을 주어서 먹고, 무엇이든지 입으로 빨고 맛을 본다. 아이들 키울 때도 그랬겠지만 다 잊어버렸다. 시간이 가면 잊힌가는 말이 맞다. 모든 것들이 기억에 남을 것 같은데 세월을 이기지 못한다.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고, 만나지 않는 사람들의 이름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기계생활을 하다 보면 치매에 걸리는 사람들이 많아진다고 한다. 매사에 흥미가 없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러다 다 귀찮아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된다. 뭐라도 자꾸 해야 하는데 몸도, 머리도 잘 따라주지 않는다. 서서 뭐라도 하려면 금방 피곤해지고, 앉아서 무언가를 만들려고 하면 생각이 둔해져서 실수를 한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도 하다 보면 재미가 있었는데 해야 할 것도 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았는데 지금은 웬만하면 안 하고 산다. 밥 해 먹고 살림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하지만 그것마저도 귀찮아질 때가 올 것이다. 아침을 먹고 운동을 나갔다 오면 배가 고파 점심을 잔뜩 먹는다. 밥 먹고 나면 식곤증으로 잠이 쏟아져 한숨 자거나 누워서 쉰다. 그러다 보면 그것마저 지루해서 일어나 따뜻한 차에 과일과 간식을 먹으며 군것질을 한다. 앉아서 텔레비전 보며 밀린 드라마나 영화를 보거나 뉴스를 보다 보면 저녁때가 된다. 가만히 앉아서 놀아서 배가 고프지 않은데 안 먹고 자면 배가 고프니까 조금이라도 먹는다. 먹고 나서 대충 치우고 또 앉아서 보던 드라마나 영화를 보거나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별것도 없는데 괜히 이것저것 들춰보는데 머리에 남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몰라도 되는 것들을 보며 시간만 낭비한다. 사는 게 마치 철없는 아이로 돌아가는 것 같다. 생각 없이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고, 심심하면 볼거리를 찾아 놀다 잠을 잔다. 시간이 없어도 틈틈이 시간 내서 뜨개질을 하고, 재봉틀로 무언가를 만들었는데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 같다. 크리스마스라고 비싼 돈 들여 선물을 사서 주고받으며 기뻐하지만 과연 그런 물건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없어도 되는 물건들을 사고 구석에 놓았다가 잊어버리고 살다가 나중에는 결국 버리는 경우가 많다. 물건이라는 것이 새로 사면 좋지만 몇 번 쓰다 보면 싫증이 난다. 비슷한 물건이나 특별히 필요 없는 물건을 사기 위해 사람들은 밤잠 설치며 열심히 일을 하며 산다. 결국 다 버려야 하는데도 말이다. 손주들은 산더미 같은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것도 불과 몇 분이고 숨바꼭질하며 뛰느라 바쁘다.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집집마다 엄청난 쓰레기가 나온다. 세상에는 물건이 많다 못해 넘쳐도 자꾸만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 낸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아이들을 위해 새로 나온 물건을 사주지만 무엇이 소중한지 모르며 산다. 없는 게 없다 보면 귀한 게 없게 된다. 돈이 보이지 않는 가상의 세상에서 산다. 월급은 숫자로 통장에 들어오고 나간다. 핸드폰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인공지능의 노예가 되어 산지 오래되었다. 앞으로 우리는 가상의 세상에서 가상의 인물이 되어 살지도 모른다. 며칠 안 되는 연말 휴가를 즐기기 위해 아이들은 정신이 없다. 몸과 마음을 휴식하는 휴가가 아니라 더 바쁜 시간을 보낸다. 한가롭게 사는 우리도 덩달아 이리저리 오고 가서 인지 저녁에는 피곤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어 꿈도 꾸지 않고 잔다. 나이 들어가는 징조다. 벌써부터 아이들과 생각이 다르고 몸도 따라주지 않으니 문제다. 그래도 일 년에 몇 번 만나는 아이들이기에 최선을 다한다. 연말인데 다른 곳으로 휴가를 가도 되는데 집에 오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다. 온 가족이 모두 모여 같이 놀고 같이 먹고 웃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시대가 변하여 시도 때도 없이 외국여행을 하는데 집에 온 아이들과의 시간이 너무 좋다. 며칠 남은 휴가를 위해 이런저런 계획을 하고 바쁘게 오고 가는 아이들이 있어 행복한 연말이다. 내가 할 줄 아는 요리를 해주고 아이들이 맛있게 먹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멀리 여행을 가지 않고 집안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편한 시간이다. 아무리 여행이 좋아도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있다. 오성급 호텔 보다 더 좋은 우리 집에서의 휴가를 즐긴다. 집 떠나지 않는 여행도 좋다.


(사진:이종숙)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