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눈길을 걷는다. 밟을 때마다 푸시시 일어나 신발 위에 앉는 하얀 눈이 예쁘다. 넘어진 나무 위에 곱게 내려앉아 하늘을 보는 눈 위에 나도 살짝 앉아서 하늘을 본다. 하늘은 파랗고 햇살은 눈부시고 나무들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높이 서 있다. 지난 12월에 크리스마스는 다가오는데 눈이 없는 세상은 메마르고 삭막해서 은근히 눈이 오기를 기다렸다. 연말연시를 눈 없이 지내다가 갑자기 찾아온 한파가 지나고 다시 날이 풀리면서 이대로 봄이 오나 보다 생각했는데 며칠 전 다시 눈이 온 뒤로 처음 찾는 숲이다. 한적한 숲에는 바람소리, 나무 부딪히는 소리, 다람쥐와 새소리가 들린다. 봄을 부르는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고도 갈 수 있는 익숙한 오솔길을 걷는 것은 참 행복이다. 다 벗어버리고 서 있던 나무들이 추운 겨울에도 쉬지 않고 움을 키우며 봄을 맞을 준비에 바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텅 비었던 숲이 하루가 다르게 달라진다. 넘어진 나무들과 새로 나오는 어린 나무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이 좋다. 손가락질을 하지 않고 서로 보듬으며 안아주는 것 같아 나도 덩달아 마음이 넉넉 해진다. 퇴직한 뒤로 우연한 기회에 찾은 이 숲은 남편과 나의 보물창고다. 둘째 아들이 사는 동네라서 숲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도 가지 않았는데 어느 늦은 봄날 한가한 시간에 한번 와 봤는데 너무 좋아서 이제는 거의 매일 온다. 경치 좋고 유명한 곳을 찾아 멀리 가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좋은 숲이 가까이 있어 너무 좋다. 꽁꽁 얼은 계곡 위에 눈이 쌓여 있고 누군가가 눈 위를 걸어간 발자국이 보인다. 눈길을 걷는 게 모래 위를 걷는 거와 다름이 없다. 뛰어가다가는 미끄러지고, 천천히 한 발 한 발 그야말로 음미하며 걸어간다. 봄은 오다가 눈이 오는 바람에 기겁을 하고 어디론가 숨어 있지만 눈이 온 숲은 어느 때보다 밝고 환하다. 길을 따라가다 보니 오래전에 넘어진 고목이 눈을 뒤집어쓴 채 누워있다. 동물의 얼굴을 닮은 듯하기도 하고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듯하다. 지난가을 떨어내지 못한 낡은 이파리들을 아직까지 끌어안고 있는 나무가 더러 보인다. 떨어질 때 떨어지지 못하고 추운 겨울을 맞고 보내며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들어 보기에도 안쓰럽다. 인생이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겪어야 할 모든 것을 다 겪어야 한다. 우리에게 오는 여러 가지 희로애락을 비켜갈 수 없고, 몫을 다해야 떠나게 된다. 좋은 일, 나쁜 일, 괴롭고 힘든 일을 모두 끌어안아야 한다. 숲에 사는 나무들도 외롭고 괴로워도 해마다 찾아오는 봄을 맞기 위해 참는다.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겨울을 준비하며 살다가 힘이 다하면 미련 없이 눕는다. 겨울을 이겨내지 못하고 여기저기 누운 나무들이 많아진 숲을 보면 우리네 인생을 보는 듯하다. 작년에도 여러분이 하늘나라로 여행을 가셨다. 이민역사가 길어지다 보니 연로하신 분들이 많아졌다. 이민초기에 40세가 80대 중반에 접어드는 세월이 흘렀다. 새로 아기들이 태어나고 아이들은 자라서 어른이 되어 늙어 간다. 그처럼 누워서 하늘을 보고 있는 나무옆에는 새로 나오는 나무들이 많다.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오고 유학을 와서 인지 성당에 가보면 모르는 젊은이들도 많다. 오르내리며 걷다 보니 땀이 난다. 걸으면 더워지는 것을 알면서도 몇 분 정도 추운 것이 싫어 두꺼운 옷을 입고 나온 게 후회가 된다. 약간 추운듯해도 처음 15분만 참으면 되는데 사람의 마음이 더워진 다음에야 후회를 한다. 목도리를 풀고 모자와 장갑을 벗으며 씩씩하게 걸어간다. 히말라야 등반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목적지를 정하여 열심히 걷는다. 가다 보면 짧은 길과 조금 편한 길이 나오지만 운동이라 생각하며 유혹을 뿌리친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을 만나 인사를 하며 지나친다. 오며 가며 만나는 낯익은 얼굴이라 만나면 오랜 친구처럼 반갑다. 날이 좋으면 여러 사람이 나와 산책을 하는데 눈이 온 다음날이라서 그런지 숲 속이 조용하다. 자칫 잘못하면 넘어질 수도 있으니 천천히 조심하며 걷는다. 몇 년 전에 친구가 산책을 하다가 움푹 들어간 곳에 발을 접질려서 오랫동안 고생하던 것이 생각이 난다. 나와 같이 이야기를 하며 걸어가다가 앞에 먼저 가던 친구들과 합류하면서 순식간에 발을 다쳤다. 한 치 앞을 모른다고 갑자기 그런 일이 생겼는데 숲에 있는 오솔길은 더 큰 위험이 있어 조심해야 한다. 잘 만들어 놓은 산책로가 있는데 오솔길은 나무들이 많이 있어 포근하고 낭만이 있어 자꾸만 오솔길을 찾게 된다. 돌아가는 길은 동네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사람 사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깔끔하게 정돈된 집이 있고, 장작을 잔뜩 쌓아놓은 집도 있다. 집을 고치다 만 집도 있고,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집도 보인다. 집모습도 여러 가지고 살림살이도 다르다. 산책길 끝에 지난가을에 단풍이 예쁘게 들은 나무가 있어 오며 가며 사진을 찍었는데 그 나무도 나목이 되어 서 있다. 아름다움도 한순간임을 본다. 앞을 보고 걷다 보니 아들네 집 앞에 세워놓은 우리 차가 보인다. 하늘과 나무와 계곡이 주는 행복을 감사히 받으며 집을 향하는 발길은 어느 때보다 더 가볍다. 아낌없는 사랑을 주는 숲이 있어 너무 좋다. 언제나 반겨주는 숲이 있고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숲이 있어 세월 가는 줄 모르며 산다. 올 때마다 가진 것을 내주는 보물창고 같은 숲 속에서 참 행복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