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집을 떠나 있다가 돌아오니 참 좋다. 아들네도 딸네도 모두 좋지만 역시 내 집이 최고다. 하룻밤만 자고 오려고 했는데 생각지 않게 3박 4일의 여정이 되었다. 큰아들이 멀리서 온 동생을 그냥 보내기 서운하다며 며칠 더 놀다 가라고 하여 계획이 변경되었다. 급히 집에 갈 이유도 없고 며칠 더 놀다 가는 것도 좋은 생각인 것 같아 편하게 있다 왔다. 가족이라는 것이 언제 만나도 좋다. 자연스럽게 만나서 편하게 놀고, 냉장고에 있는 것 찾아서 만들어 맛있게 먹으며 부담 없이 지낸다. 큰아들과 큰며느리가 정성을 다해 대접을 해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장을 봐서 이런저런 음식을 만들고 세심하게 신경 쓰며 편하게 있다가 집으로 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함께 한 시간이다.
오랜만에 만난 다섯 명의 손주들이 뜰에서 뛰어노는 모습이 좋다. 아침저녁 기온이 떨어져 아무리 낮기온이 뜨거워도 해가 지면 웃옷이 필요하다. 뒤뜰에 있는 화로에 장작을 때며 이런저런 이야기 꽃을 피우며 낭만에 젖는다. 연년생으로 세상에 나온 삼 남매가 어느새 40세가 넘었으니 참으로 많은 세월이 오고 갔다. 이민 와서 6년 동안 육아를 하다가 6년 만에 세상밖으로 나갔다. 남들보다 6년이 늦었으니 열심히 사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어린이집에 보내고 학교에 도착하면 몸은 녹초가 되지만 영어를 한마디 라도 더 배우기 위해 노력을 해야 했다.
어중간하게 언어를 배우면 나중에 고치기 어려워서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우려니 처음에는 시간 낭비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나중에 모든 것이 도움이 되었다. 캐나다 정부에서 의무적으로 가르쳐주는 20주를 마치고 시험을 치고 15주 동안 무료로 가르쳐주는 곳에 들어갔다. 육아와 살림을 하며 영어를 배운다는 것이 참으로 고된 일이었지만 배우겠다는 결심 하나로 버텼다. 영어 학교에 다닌다 해서 하루아침에 영어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끝없이 쓰고 읽고 말하고 듣기를 반복해야만 입으로 나오는 것이 언어이기 때문에 노력 없이는 안된다. 다니면서 너무 힘들어서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지만 기회는 다시 오지 않기에 참았다.
돈을 주고도 다녀야 하는데 공짜로 가르쳐준다는데 힘들어도 악착같이 참으며 다녔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쏟아지는 잠을 참을 수 없어 곯아떨어져 종점까지 간 적도 몇 번 있지만 세월이 답이었다. 언제 끝나나 했는데 하루이틀, 일주 이주 지나다 보니 15주가 끝나게 되었지만 영어는 그리 쉽게 나오지 않았다. 어디 가서 누구라도 만나서 이야기를 하려면 앞뒤 생각 없이 엉터리 영어가 나오고 단어만 나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자꾸 문법을 생각하고 제대로 된 영어를 하려고 하다 보니 배운 것들이 하나둘 생각이 나고 앞뒤문장을 연결하게 되니 자신이 생겼다.
이민자들이 많이 살아 영어를 못해도 그리 흠은 아니고 대충 손짓 발짓으로 서로를 이해하며 농담도 하는 세월이 흘렀다. 영어만이 살길이 아니고 무언가를 배워 직업을 잡고 살아야 한다. 고심 끝에 나이가 들었지만 늦게라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30대 후반에 열여섯 살짜리 학생들과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이상하게 보며 거리를 두더니 엄마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내가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고 같은 팀이 되어 학습도 같이 했다. 지금의 컴퓨터와는 많이 다른 컴퓨터를 배우는데 컴퓨터 언어가 생소하여 어찌할 바를 모를 때 같은 반 급우가 자세히 설명을 해 주어서 잘 넘겼던 생각이 새롭다.
학교를 끝내고 직업을 잡아 직장생활을 6년 정도 하다가 식당을 운영하게 되었다. 고향친구가 하던 식당을 겁 없이 하겠다고 시작을 했는데 식당에 대해서 문외한인 나로서는 부족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가르쳐 주는 대로 열심히 배우며 최선을 다하여 손님들에게 사랑받는 식당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22년이라는 시간 동안 좋고 나쁜 일이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모두 추억이 되었다. 우리 식당을 배경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를 찍고, 신문과 라디오에 좋은 식당, 가보고 싶은 식당이라는 이름도 남기고 정년퇴직을 했다. 어느새 퇴직한 지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편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간다.
이민 온 지 44년이 지나고 이제는 급할 것도 없고 해야 할 일도 없이 흐르는 물처럼 산다. 아이들이 오면 좋아하는 음식을 해주며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손주들도 잘 자라고 아이들도 잘 살아가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오랜만에 멀리 사는 딸네도 오고 18개월짜리 외손자 재롱을 보며 삶을 만끽한다. 얼마나 귀여운지 다른 손주들이 그런 적이 있었나 하며 한없이 사랑스럽다. 지나간 날들은 자취가 없지만 자라나는 손주들을 보면 그 옛날 세 아이들을 키우며 바쁘게 살던 생각이 난다. 어떻게 아이 셋을 키웠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손자의 재롱을 보며 웃고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하는 짓마다 너무나 사랑스러워 가기도 전부터 보고 싶을 것 같아 잠시도 눈을 떼지 않는다. 아는 이 별로 없는 이곳에서 세 아이를 키웠는데 이제는 손주들도 그 나이가 넘었다. 지나간 것들은 추억이 되고, 추억을 그리워하며 새로운 날들을 맞으며 산다. 내일을 알 수 없지만 어제의 내가 오늘을 살듯이 내일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