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이 바람에 흔들린다. 하얀 데이지가 군데군데 피어 들판을 덮어 있고, 이름 모를 노란 꽃들도 여기저기 피어 있다. 싱그러운 숲 향기를 맘껏 들이마시면서나무들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자라고,새들은 유유히 하늘을 날아다닌다.비 온뒤의 숲 속은 상쾌하다. 계곡물이 힘차게 흐르고, 산책길은 촉촉하게 먼지를 숨기고 있다. 모기와 꽃가루 때문에 정신없어 며칠 동안 오지 않았는데 비가 온 덕분에 날아다니던 꽃가루는 다 떨어져 비에 씻겨 내려가고 모기들은 아직 숲 속에서 잠을 자는지 조용하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으며 길가에 있는 풀들을 보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고 작았던 것들이 많이 자랐다. 이파리만 있던 것들이 꽃을 피우고 꽃이 피었던 것들은 시들어 간다. 며칠 사이로 비바람에 죽어 넘어진 나무들이 많이 있다. 그동안 버티며 살던 것들이었는데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나 보다.
얼마나 힘들면 저렇게 어린 나무가 쓰러졌나 하며 자세히 보니 이미 오래전부터 병이 있던 나무였다. 견디다 못해 뿌리째 뽑혀 넘어진 것을 보니 사람도 힘들면 저렇게 넘어지리라 생각이 든다. 인간은 한평생 살며 좋은 일,나쁜 일을 겪으며 보다나은 날들을 희망하며 산다. 그러다 보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노인이 되고, 지나간 세월을 뒤돌아 보며 후회와 미련 속에 떠나게 된다. 삶이란 이처럼 허무한것인데 봄이 오듯 다시 일어서서 살아가기를 반복한다. 길거리에 힘없이 넘어진 나무를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앞으로 걸어본다. 다리를 건너 취나물이 군락을 이루며 모여사는 곳이 눈에 보인다. 가는 길이 보이지 않아 그냥 지나갔는데 하얀 꽃이 군데군데 피어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곳에 외롭게 피어있는데 서로를 의지하며 잘 살아가는 것 같다. 그곳을 지나 언덕에 오르면 커다란 들판이 있다.
들판 저쪽 멀리 주택가와 학교가 있지만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민들레가 노랗게 피어 있더니 지금은 토끼풀 천지다. 참으로 멋있는 들판이었는데 전염병으로 인한 자금부족으로 정부의 감원이 많아 일하는 사람이 없어 아무도 돌보지 않아 천덕꾸러기처럼 보기 흉하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위에서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숲이 살림을 하고 재미있게 산다. 나름대로 나무도 키우고 풀과 꽃도 키우며 살아간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 오솔길로 들어가 보니 많은 나무들이 물에 넘어져 있다. 나무들 때문에 물이 잘 흐르지 못하고 방황하는 모습이 보인다. 걸림돌 때문에 돌아서 흐르는 계곡물이 힘들어 보인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로일사천리로 잘 나가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누구나 걸림돌을 만나고, 돌아가고, 넘어지고, 자빠지며 살아가지만 그 걸림돌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돌아서 천천히 쉬면서 가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숨차게 달려온 날들, 쉬지 못하고 앞만 보고 달려온 날들을 되돌아보며 가라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하얀 뱍색의 꽃이 활짝 피어 속삭이는 아침 (사진:이종숙)
아무런 걸림돌 없이 평지로만 되어 있다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무미건조할 것이다. 오르고, 내려가고, 비탈길에 낭떠러지가 보이고, 좁고 무서운 길이 있지만 지나고 나면 다시 평지에 아름다운 날을 만날 수 있기에 사람들은 여전히 지구 상에 존재한다. 잘 나가는 사람들에겐 희망이라는 단어가 없다. 매일이 좋은 사람에게는 소망이라는 마음도 없다. 그저 재미없게 하루하루를 살뿐이다.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고, 하고자 하는 것 없이 하루를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것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삶이다. 봄을 기다리고 여름을 즐기는 것은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기 때문이다. 매일이 똑같이 좋으면 겨울의 외로움과 막막함을 모르기 때문에 소중함 또한 모르고 산다. 매일이 겨울이라면 봄의 아름다움을 모르기에 소망도, 희망도 없고 간절함도 없다. 겨울이 긴 이곳의 봄은 잠깐 다녀가기 때문에 그저 이름뿐이지만 몇 개월간의 여름으로 이어져 사는 듯이 살아간다.
만약 이곳에 그것마저 없다면 정말 삭막할 것이다. 앞에 서있는 나무 꼭대기 아파리가 색이 변해간다. 멀리서 가을이 오고 있다는 소리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아니 벌써...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세월이 어느새 흘러 여름이 가는 소리가 들린다. 성급한 계절은 미련도 후회도 없는지 때가 되면 올 때를 알고, 갈 때를 알아 오고 간다. 하지만 아직은 초록의 세상이다. 작은 오솔길 건너편 들판에 하얀 꽃들이 보인다. 사진을 찍으려 가까이 갔더니 취나물 밭이다. 몇 번을 오고 간 숲인데 처음 본다. 취나물이 사람 키만큼 자라서 하얀색 꽃을 피워 나물 숲을 이뤘다. 나물은 너무 늙어 먹지 못하지만 정말 장관이다. 취나물이 이렇게 자란다는 것을 몰랐다. 가까이 들어가니 잠자던 모기가 침략자를 향해 수십 마리씩 공격한다. 꽃을 피우며 나무같이 서있는 나물이 신기해서 사진을 찍으러 들어갔다가 모기들의 봉변을 당하고 도망 나왔다.
자기네 지역을 지키는 것은 동물이나 인간이나 마찬가지 인가보다. 침략자를 향한 분노는 말로 할 수 없이 무섭다. 남의 것을 넘보지 말아야 하는데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 불철주야 노리며 사는 인간들의 추한 모습이 보인다. 아무리 좋아도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 무섭다. 숲 속으로 난 작은 오솔길 끝에 그런 곳이 있다니 정말 숲 속은 비밀 천지다. 알 것 같아 가보면 엉뚱한 길로 연결이 되어 어리둥절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한번 길을 잘못 들어가면 하루 종일 헤매도 들어온 길을 찾지 못한다. 이리가도, 저리 가도, 비슷한 길들이 많아 길눈이 밝은 사람도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숲 속에서 길을 잃는다. 하루는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숲 속에 혼자 나와서 산책을 하다 길을 잃어 차를 찾을 수가 없으니 어디 어디로 좀 와달라는 것이다. 마침 나는 할 일이 있어 남편 혼자 가서 만났는데 아무리 차를 찾아보아도 없어 처음에 들어섰던 곳으로 방향을 돌려 가서 간신히 차를 찾아 주었다.
이름모를 황금색 꽃이 환하게 동네를 밝힌다. (사진:이종숙)
숲도 비슷하고, 숲을 가운데에 놓고 동네가 형성되어 각 동네마다 출입구가 있다. 길의 생김새도 비슷한 데다 숲으로 가려져 있으니 한번 잘못 들어가고 나오면 숲 전체를 돌아도 찾아 나올 수 없다. 어쨌든 길을 잃고 헤매던 친구는두려움에 덜덜 떨기까지 했다며 악몽 같던 그 시간을 떠올리며 고마움을 전했지만 인생 또한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생각했던 일들이 한번 꼬이기 시작하면 도저히 실마리를 풀 수 없고 자꾸만 다른 문제가 생긴다. 뜨개질할 때 한참을 뜨고 난 뒤에 잘못된곳을 발견하고 참으로 곤란했던 적이 있다. 계속 뜰 수도 없고, 지금 까지 떴던 것을 다 풀어버리자니 너무 아깝다. 그렇다고 그 문제를 그냥 놔두면 다 뜨고 나서도 그 실수는 감출 수 없고 흔적이 남는다. 늦었다 생각할 때가 제일 좋은 시간이라는 말처럼 아까워도 힘들어도 잘못을 알았을 때 고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친구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도 혼자서 찾으려면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두려움도 있고 도움을 청할 친구도 있어 전화를 하여 도움을 받았다. 막연히 돌아다니다가는 숲 한가운데에서 밤을 맞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녀의 남편이 집에 오면 당장에 찾으러 가겠지만 그때는 어쩌면 너무 지친 상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한 것은 그 무서운 순간에 우리를 생각한 그 마음이 고맙다.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얼마나 외로운가? 그래도 별것 아닌 작은 일이지만 가던 길을 잃고 헤매며 가까운 친구를 생각하며 인간은 위안을 받고 희망한다. 갑자기 당한 사고나 실패에 좌절할 때 우리는 두리번거린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바라며 주위를 보고 정신을 가다듬는다. 귀인은 쉽게 나타나지 않지만 뜻밖에 바람처럼 나타나 지나가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산다.
도저히 희망이 없어 보일 때도, 먹구름이 하늘을 덮어 세상이 어두울 때도 잠깐 스쳐 다가오는 따스한 바람결에 사람들은 다시 일어난다. 치밀한 계산도, 철저한 계획도 부질없는 인간의 욕심임을 살며시 알려준다. 전염병으로 사람들과의 왕래가 뜸해지다 못해 없어져가는 요새, 내가 만일 숲 속에서 길을 잃었거나, 힘들고 외로울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숲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한다. 비밀도 많고 매력도 넘치는 숲 속에서 산책을 하며 한바탕 잔치를 치르고 나니 배가 고프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잠깐씩 보이는 햇살을 받고 걸으며 하는 숲에서의 수다를 끝내고 집을 향해 걷는 발걸음을 재촉한다.길눈이 어두운 나는 길을 잃어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남편을 바짝 따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