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인지 비가 매일매일 계속해서 온다. 구름이 걷혀 사이사이 햇볕이 비추지만 여전히 내린다. 그제 밤도 밤새 내리더니 어젯밤에도 내렸고 지금도 죽죽 내린다. 오늘 같은 날은 산책도 못 가니 집에서 쉴 수밖에 없다. 비 오는 밖을 쳐다보니 옛날 옛날 어릴 적 생각이 스쳐간다. 철없던 옛날이지만 지금도 나는 철이 안 들었다. 나이가 들어 철이 들만도 한데 그놈의 철은 왜 안드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속이 좁고, 삐지기 잘하고, 신경질도 많고 귀찮아하며, 게으름 피우며 산다. 오늘 같은 날은 애들같이 엄마가 보고 싶다. 나이만 들었지 변한 건 없다. 내 바로 위 오빠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 부모님은 전염병으로 남매를 잃었다. 보석보다 더 귀한 아이들을 먼저 보내신 부모님은 우리 육 남매를 벌벌 떨며 기르셨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시기 전에는 하늘의 별도 따다 주실 것처럼 잘해 주셨다. 물론 공부도 많이 하시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그럴 수 있었겠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들은 무엇이나 가질 수 있다 생각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부모님이 많이 다투시고 난 뒤 좋았던 세월은 오랫동안 없어졌다. 아버지의 사업이 잘 나가던 때에 몸이 약한 엄마는 이유 모를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아파서 오랫동안 자리보존을 하며 누워 계셨다. 친척 아줌마가 우리들을 봐주셨지만 아버지께서 아픈 엄마를 보살피시느라 아버지의 사업을 친척 아저씨가 맡아하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엄마는 산후병으로 그렇게 고생을 하셨단다. 아버지가 정신없는 틈을 타서 아저씨는 아버지 대신에 물건을 사고팔고, 수입을 은행에 입금하며, 외상을 주고, 외상값을 받으며 돈을 혼자 관리하다 보니 욕심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아버지 사업은 커다란 구멍이 생기기 시작하고, 어느날 아버지의 사업은 그냥 쓰러져 망하게되었다. 엄마는 많이 나아지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사업은 이미 손을 쓰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그때 어린 5남매를 데리고 서울로 가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들을 할머니께 맡기고 가야 하는 상황에 부모님의 언성이 높아졌다. 할머니는 아랫목에 앉아서 곰방대로 담배를 피우며 하얀 연기를 뿜어 내고 계시고, 우리들은 여기저기 앉아서 부모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결국 오빠와 나는 집에 남아서 할머니와 어린 두 동생을 봐주기로 하고, 부모님은 여동생 하나만 데리고 상경하셨다. 부모님과 헤어지면 가까운 시일에 다시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며칠을 기다려도 오시지 않았다. 기다란 대청마루에 앉아 엄마가 오기를 기다려도 오지 않은 날들이 계속되었고, 어린 동생들은 할머니 혼자만의 힘으로 보살필수 없어 나와 오빠는 틈틈이 할머니를 도와 드렸다.
막내가 2살이었는데 엄마와 헤어지려고 그랬는지 젖도 일찍 떼고 밥물만 달라고 해서 엄마 젖이 불어서 고생하시던 생각이 난다. 그렇게 부모님은 안오시고 할머니와 나는 오빠와 남동생 그리고 여동생과 함께 살았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할머니 혼자 우리를 키우셨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오빠는 10살, 나는 8살, 남동생은 6살이었으니 어린 아기인 2살짜리 막내만 쫓아다니면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막내동생은 밥을 주면 다 뱉어버리고 몰래 흙을 손가락으로 파먹는 것을 좋아했다. 방과 부엌사에 흙벽이 있었는데 조그만 손으로 틈만 나면 기어가서 흙을 파 먹곤 했다. 조그마한 손으로 거친 흙을 골라서 버리고 고운 흙을 입안에 털어 넣는데너무나 빠르게 집어넣어서 누구도 쫓아가 막지를 못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부모님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추억도 꽃처럼 피어난다.(사진:아종숙)
이제 방도 구하고, 일도 시작했으니 조금만 참고 할머니 말씀 잘 들으며 학교 잘 다니라는 내용이었다. 갑자기 부모 없는 고아가 된 것 같아 방에 가서 혼자 울며 엄마를 기다려도 오시지 않았던 엄마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한글을 겨우 읽고 쓰는 나이에 편지를 쓰는 것이 쉽지 않지만 한글을 모르는 할머니는 말씀을 하시고 나는 그 말을 종이에 받아 적었다. 할머니의 두서없는 말씀으로 쓰인 편지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오빠와 나는 할머니와 합심하여 편지 한 장을 써서 부모님께 부쳤다. 매일매일 답장을 기다렸지만 답장은 오지 않고 세월만 갔다. 몇 달이 가고 겨울이 지나 봄이 왔다. 그사이 엄마는 막내 동생을 낳아 아버지와 함께 딱 1년 만에 우리를 데리러 오셨다. 부모님은 며칠 동안 이사 준비를 해서 우리와 함께 서울로 향했다. 삼엄했던 그날은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 세상이 바뀌던 날이었다.
그 뒤 19년을 한국에 살다가 이민을 왔다. 이민생활이 길어지고 부모님은 늙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지도 4년이 지났다. 세월이 가면 그리움도 세월 따라갈 줄 알았는데 그리움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간다. 지난 몇 년은 엄마가 보고 싶으면 아무 때나 다녀왔는데 지금은 안된다. 나날이 나쁜 뉴스만 들리고 언제 하늘길이 열릴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그동안 나는 전염병 때문에 비행기를 못 타서 엄마를 보러 한국에 못 간다고만 생각했다. 엄마가 돌아가셔도 못 간다고 생각을 하며 많이 우울했다. 요양원 출입이 금지되어 형제들도 요양원에 계시는 엄마를 방문도 못하고 산다. 요양보호사님의 배려로 전화를 하면 엄마는 눈도 희미하고 귀도 잘 안 들려서 속만 상한채 전화를 끊어야 했기에 엄마한테 전화를 못한다고 원망만 했는데 편지를 쓰면 된다. 요양원에 계시는 엄마와 통화를 할 수 없지만 글은 읽으신다.
잊어버리기 잘하시지만 아직 정신도 있으시고 말도 잘하신다. 내가 가지 못하고 못 만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 되었지만 내 사랑과 그리움을 글로 써서 편지를 쓰면 엄마가 읽고 내 마음을 아실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벌써부터 뛴다. '필요하면 통한다'고 나는 영영 엄마를 만나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편지를 쓰며 편지를 보내며, 보고 싶은 엄마를 만나면 된다고 생각하니 너무 좋다. 편지에 엄마에게 못했던 말들을 해야겠다. '엄마,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보고 싶다고, 만나고 싶다고, 엄마의 손을 만지며 이야기하고 싶다고, 나를 낳아 주셔서 감사하다'라고 편지를 쓰리라. 하늘에 가시기 전에 엄마한테 편지를 쓸 생각을 하니 한시가 바쁘다. 편지를 쓰고 편지를 보내다 보면 어느 날 하늘길이 열려 엄마를 찾아 뵐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여전히 철들지 않은 엄마 딸이다.엄마와 가까이 있지 못해 평생을 그리워하며 많이도 울었다. 만나서 좋아하며 며칠은 좋은 딸 노릇을 하지만 늙어가는 엄마를 이해 못해 의견 충돌도 많았다. 엄마는 엄마대로 생각이 있고 살아온 방식이 있는데 나와 다르다고 신경질도 많이 부렸다. 이제는 엄마도, 나도, 그리움에 운다. 보고 싶어 운다. 그 옛날 대청마루에 앉아 서울간 엄마를 기다리던 철부지 아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