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일을 모르기에... 살 수 있는 우리네 인생

by Chong Sook Lee


(사진:이종숙)


봄이 살금살금 온다. 뜰에 쌓여있는 눈도 야금야금 녹는다. 고국에 봄꽃이 핀다고 난리를 치는데 이곳은 아직 겨울이 가기 싫다고 앙탈을 부리고 있다. 밤바람이 불더니 그 사이를 틈타 하얀 눈을 뿌리고 도망갔다. 그래도 어딘가 숨어 있다가 멀리서 힘들게 오는 연약한 봄을 방해하려 들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오는 봄을 막을 수 없다. 남향을 향한 정원은 흙이 얼굴을 보이고 봄을 기다리고, 사과나무에 매달린 몇 개 남은 까치밥은 쪼글쪼글한 모습으로 힘들었던 겨울을 이야기한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르다. 지루한 겨울이 가도 기다리던 봄이 와도 특별히 변하는 것이 없어도 봄이 기다려진다.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이맘때가 되면 간절하게 봄이 그립다. 눈으로 덮여있던 뜰이 허물을 벗으면 할 일이 많다.


가을에 때를 놓치고 나뭇잎을 떨어뜨리지 못한 채 겨울을 맞은 나무들은 겨우내 틈틈이 몸을 흔들고 나뭇잎을 떨어 뜨린다. 그 위에 또 눈이 쌓이기를 반복하여 눈이 녹으면 너덜너덜 해진 나뭇잎이 청소해 주기를 기다린다. 해가 길어지고 햇살이 따뜻해질 때면 가고 싶지 않아도 가야 하는 겨울이 징징대며 녹아내린다. 뜰에서 눈이 녹아내려 집 앞 도로에 시냇물처럼 물이 흐른다. 밤이 되면 다시 얼어 자칫 잘못하면 미끄러진다. 눈 아래에 숨어있는 살얼음은 정말 살인적이다.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보려고 나갔는데 눈밑에 숨어있는 얼음을 여러 번 만나 넘어질 뻔해서 벌벌 떨며 살살 걷는다. 앞에 몇몇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어딘가 전화를 하고 있다. 가까이 가 보니 한 남자가 길거리에 넘어져 있었다. 옆에 서있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 빙판에 넘어졌는데 다리를 다쳤는지 꼼짝을 못 한단다.


집주인은 안절부절못하지 못하고 쩔쩔 매고 있다. 주인이 눈도 치우고 할 일을 다했지만 자기네 집 앞에서 넘어져서 걱정을 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이곳은 눈이 오거나 길이 미끄러워 우면 깨끗이 청소를 하고 눈 녹는 소금을 뿌려 놓아야 한다. 그렇게 해 놓았어도 눈이 녹고 얼다를 반복하다 보면 살얼음이 생길 수 있는데 그 사람이 그곳에서 넘어졌으니 걱정스러운 모습이다. 이리저리 피하며 동네를 돈다. 햇살이 좋아 조금 걷다 보니 덥다. 이렇게 걸으며 사람 사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북향집은 아직도 한겨울이고 남향집은 봄 맞을 준비로 바쁘다. 참새들이 따스한 양지쪽에서 앉아 무언가 쪼아 먹고 집 앞에 있는 백양나무는 바람에 흔들린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처럼 동네는 조용하다. 아직도 성탄절 장식을 그대로 마당에 놓아둔 집도 있고 겨울이지만 집 전체가 완벽하게 정리가 된 집도 있다.



(사진:이종숙)


며칠 전 소방차가 요란스럽게 오고 가더니 차고에 불이 났던 집 앞에 차 한 대가 새까맣게 탄 채로 서 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차가 저렇게 탈 정도의 화재가 난 이유는 무엇일까? 고국에서 연이어 들려오는 산불과 화재 소식이 생각난다. 작은 실수가 이렇게 무서운 화제를 불러오는데 그 커다란 산에 있는 나무들이 하염없이 타고 있는데 불길을 잡을 수 없어 오랫동안 고생하던 소방대원들의 마음이 타들어 갔을 것이다. 햇볕이 쬐는 길은 녹아서 물이 흐르고 차가 주차되어 그늘이 진 곳은 여전히 눈이 쌓여있는 모습을 보니 인생살이도 마찬가지 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누군가 옆에서 도와주면 고비를 넘길 수 있는데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 없이 혼자 살아가려면 여간해서 살림이 펴지지 않는다. 이민 초기에 아는 사람도 없이 살기란 그늘진 곳에 얼은 채 녹지 않는 얼음판 같다.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제자리걸음만 할 수밖에 없고 안갯속을 걸어가는 것처럼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학연 지연으로 하나 둘 알게 된 사람들이 없었다면 더 힘들었을 텐데 무서운 고생을 하면서 살았던 이민 선배들의 인정이 희망을 갖게 했다. 우리가 힘들 때 옛날에는 더 힘들었다는 이민 경험담을 들으며 위로를 받았다. 식탁이 없어 신문지를 깔고 밥을 먹고 소파 없이 바닥에서 생활할 때, 쓰던 식탁을 가져다주고 소파를 가져다주던 사람들이 있어 힘겨운 삶을 견딜 수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갈아 입혀야 하는 아이들 옷도 갖다 주어 고맙게 입혔다. 돈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황량한 시절에 그들에게 받았던 호의는 잊을 수가 없다. 햇살이 세상을 녹이고 하루가 다르게 봄이 가까워진다. 아직은 눈으로 덮여 겨울 같지만 땅속으로 오는 봄을 막지 못한다.


내일이 두려웠던 시절 속에 어느덧 젊음은 가고 나이는 들어가도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삶이 되었다. 말을 못 해 귀머거리, 벙어리 노릇을 하며 손짓 발짓으로 소통하던 날들은 추억이 되었다. 어느 세대이건 처음은 다 힘들다. 우리의 희생이 있었기에 2세, 3세는 우리 같은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리라. 나만 힘들다고 생각하면 서럽지만 누구나 겪는 고통이었으니 괜찮다. 눈 속에서도 꽃은 피고 나무는 자란다. 나무가 많은 동네를 돌며 추운 겨울을 견디고 움을 틔우는 나무들이 나를 닮은 듯하여 기특하다. 쓰러질 듯, 넘어질 듯 살았지만 견디고 살아낸 나 같아서 더없이 사랑스럽다. 열흘 전만 해도 영하 30도가 넘는 추위 때문에 세상이 얼어붙었는데 요즘엔 영상의 온도가 되었다. 긴 기다림 뒤에 맞을 봄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설렌다.


땅이 허물을 벗고 나무들이 옷을 입고 세상은 춤을 춘다. 지나간 것들은 추억의 옷을 입고, 오는 세월은 어딘가로 나를 데리고 다닐 것이다. 알지 못해 답답하지만 모르기에 살아갈 수 있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동네를 걸으며 하늘을 보고 땅을 보며 오늘을 살게 하는 생명의 손길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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