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염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본다. 기쁨도 슬픔도 다 안고 흐른다. 강의 가슴은 넓기도 하다. 파란 하늘을 담고 흐르는 강물은 나무를 지나갈 때는 나무색이 되고 바위를 지나갈 때는 바위 색이 된다. 멀리 보이는 강가에 나무 조각이 혼자 강을 지키고 앉아 있다. 강변에는 노랗고 빨간 들꽃들이 수많은 버드나무와 어우러져 살아간다. 물가에 살아가는 나무들은 물처럼 부드러워 바람 따라온 몸을 흔들며 춤을 춘다.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걸어가면 고운 모래흙을 밟고 강가로 가는 길이 나온다. 비단이 이처럼 부드러울까 하는 생각에 손으로 만지며 비벼본다. 진흙으로 얼굴 마사지를 한다는데 이 고운 모래로도 마사지가 가능할듯하다. 자갈 사이로 흐르는 얕은 강물을 걸어 강 가까이 가본다. 세상이 뻥 뚫린 듯 시원하 다. 가슴속까지 후련하여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쉰다. 이렇게 시원한데 그동안 잊고 살았다.
강은 그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는데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강물은 씩씩하게 흐른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가다 보면 많은 인연을 만날 것이다. 어디서부터 흘러온 나뭇가지들이 군데군데 쌓여있는데 흐르는 강물은 이리저리 피하며 변함없이 흐른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갈매기들이 남쪽 따뜻한 곳으로 길 떠날 준비로 수십 마리가 모여있던 곳인데 어디를 갔는지 오늘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강에 오니 나는 아이가 된다. 강가에 손을 담그고 물장난을 하며 강가에 앉아서 쉬는 자갈들을 강을 향해 힘껏 던져 본다. 자갈은 물이 차다며 첨벙 소리를 내고 물속으로 떨어진다. 늘 편하게 놀던 강기슭의 물보다 더 차가워서 놀랬나 보다. 사람이나 동물뿐 아니라 작은 자갈도 새로운 곳은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1980년 4월에 이민을 와서 41 년이라는 세월을 살고 있다.
비바람을 맞아야 했고 폭풍 속을 뚫고 걸어야 했다. 다시는 일어날 수 없어 쓰러졌던 날도 있었고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갯속을 헤매던 날도 있었다. 그래도 삶은 이어졌다. 어디로 갈지 모르던 날들도 있었고 아무도 없는 언덕을 몸으로 때우던 날도 있었다. 젊었기에 견딜 수 있었고 내일을 믿었기에 희망할 수 있었다. 세월이 강물처럼 흘렀다. 흐르다가 만난 많은 인연들은 나에게 언덕이 되기도 하고 기쁨이 되고 슬픔이 되기도 했다. 먹고살기 위해 생전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하기도 하고 그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 형제 이상으로 다가서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으로 메마른 타국에서의 삶은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들에게 받은 은혜를 다 갚지 못해도 새로 오는 사람들과 베풀고 나누며 사랑하며 산다. 부족한 것 많은 나를 사랑으로 감싸 주었듯이 사랑을 주고받으며 오늘을 산다.
(사진:이종숙)
오솔길을 따라 돌아 올라가서 다리 위로 걷는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모자가 들썩거린다. 모자를 벗고 강물을 내려다본다. 남편과 내가 서있던 곳이 까마득히 보인다. 그곳에 서서 다리를 지나가는 사람들과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는데 막상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니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할 정도로 작게 보인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도 있고 개와 함께 걷는 사람도 있다. 다리 위에 서서 흐르는 강물을 보니 뭐가 그리 급한지 빠르게 간다. 장애물을 피해 들쑥날쑥하며 앞서간 물을 따라가기 바쁘다. 오리 가족이 강물에서 헤엄을 치며 놀고 있다. 사람도 동물도 가족이란 참 좋은 것이다. 함께 하며 기쁨과 슬픔을 나눌 수 있어 좋다. 오리들이 노는 강가에는 이름 모르는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바람 따라 흔들린다. 어디서 나오는 물인지 바위들 사이로 흘러 강물로 합류한다.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깎여나가 다른 모습이 되겠지만 지금은 서로 의지하며 존재하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 다리를 건너서 돌아가는 코너에 의자가 보이고 전쟁에서 희생된 군인들에 대한 커다란 팻말이 보인다. 평화를 위해 희생한 젊은이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앞으로 걸어간다. 몇몇 사람들이 디스크 골프를 치며 옹기종기 모여서 피크닉을 한다. 날이 덥지 않은데 탁 트인 공원이라서 가족끼리 친구끼리 바비큐 하기 딱 좋은 날이다. 지나가는데 사진을 찍고 있던 사람이 완벽한 날씨라며 엄지 척을 보인다. 덥다 덥다 했는데 초복을 지난 날씨는 어느새 선선하다. 인생이 긴듯해도 지나고 보면 짧은 것처럼 여름도 얼마 있으면 끝난다. 하루 종일 땡볕에 시달리며 열대야까지 겪어야 하는 이 여름이 빨리 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지만 어느 날 가을이 오면 쓸쓸함을 느낄 것이다.
강물을 끼고 있는 숲 속을 걸으며 멀리 보이는 정유공장에서 빨갛게 타고 있는 가스불을 본다. 안전을 위해 자신을 태우는 모습을 보며 부모의 희생을 생각한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뼈를 깎아내는 고통도 마다하지 않는 희생과 헌신으로 자손은 번성한다. 점차 사람들이 공원으로 들어오고 분주해져 강가를 바라보고 있는 의자에 앉아서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 본다. 56년을 살다 간 누군가를 위해 가족들이 놓은 의자다. 사랑하며 영원한 안식을 바란다는 가족의 염원이 적혀있다. 아마도 생전에 이곳을 자주 온 사람인 것 같다. 생전에 좋아하던 강물을 쳐다보며 그에게 평화가 있기를 바란다. 자전거를 타며 다리를 건너는 청년들의 모습이 보기 좋다. 그 사이에 노부부가 다정히 손을 잡고 조심스레 걸어오고 있다. 어느 날의 우리 모습이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오는 다리를 지나 강가를 걸으며 오늘 나온 소풍도 즐거웠다고 말하고 남편의 손을 잡으며 파란 하늘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