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시간이 만든 것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흐르고 열심히 뭔가를 해도 흐른다. 그러면서 변하는 게 존재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변하고 열심히 뭔가를 해도 변한다.
어느덧 원서 접수를 하게 됐고 예비 시험도 치고 1차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회의감으로 가득했지만 현실에 집중하다 보니까 어느새 시간이 그 정도까지 흐른 것이다. 자신은 없지만 자신감을 찾아서 가지고 시험을 쳤다. 워낙 어려운 시험인 데다가 준비도 부족해서인지 시험을 치면서 이번은 확실히 안 되겠다는 직감이 왔다. 그리고 그 직감은 현실로 나타났다.
한번 더 할지와 멈추고 그냥 취업준비를 할지의 기로에 섰다. 고민하다가 한번 더 하기로 정했다.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해보고 안되면 좋은 경험으로 남기기로 한 것이다. 다시 하기 전 몇 주간은 휴식의 시간을 가졌다. 바로 달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를 돌아보고 주위를 돌아보는 중에 한비와 모모를 떠올렸다. 눈도 제대로 못 뜨던 강아지 때부터 아픈 몸을 이끌며 나를 반겨주는 노견이 된 한비. 귀하게 자랐지만 주인과의 유대감이 약했던 강아지에서 주인과의 유대감을 얻고 귀한 관리를 받지 못한 모모. 둘을 떠올리니까 미안함 뿐이었다. 해준 게 없어도 너무 없었던 내 친구이자 가족인 한비와 모모에게 뭐라도 해주기 위해 더 힘내봐야지라는 다짐도 내 공부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하지만 시간이 인간에게만 흐르는 게 아니었다.
다짐과 비겁함
공부를 다시 시작할 때쯤에 한비의 상태는 더 심각해졌다. 배 안에 있던 덩어리는 여러 개가 생겨 바닥과 배가 만나기 직전이었고 빠르게 몸을 일으키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아주 큰 소리를 내면 들리던 귀는 아예 닫혀버렸고 그렇게 자주 올라가던 소파 위는 전혀 올라가지 못했다. 모모와는 조금도 놀지 않았고 그저 멍하게 있는 날이 많아졌다.
시험에 얼른 합격해서 월급을 받고 일부 금액은 한비의 병원비로 해야겠다는 다짐은 욕심이었다. 한비에게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들은 고모는 오랜 인연을 쌓은 동물병원의 도움으로 조금은 싼 값에 검진 등을 할 수 있게 됐다는 소식을 알렸다. 본인도 넉넉하지 않은데도 사비로 진행하겠다는 고모에게 너무 고맙고 죄송했다.
이를 위해서는 크게 마음먹어야 할 점이 3가지가 있었다.
첫째, 고모가 천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몇 시간을 달려 맡겨야 한다는 점이다. 즉, 보고 싶다고 해서 한비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상태를 봤을 때 생각보다 더한 상태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셋째, 만약 수술을 한다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위 3가지는 선택이 아닌 필수의 상황이었고 그렇게 한비를 보내기로 정했다. (당시에는) 내 미래 아니 집안의 유일한 희망이던 그 공부가 더 시급하기도 했고 무섭고 미안하기도 해서 한비를 보내는 날 따라가지 못했다. 공부하러 나가면서 들리지 않는 한비에게 구구절절 설명하고 껴안고 쓰다듬으면서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한비를 눈에 담았다. 결과적으로 그날은 한비와 내가 교류한 마지막 날이 됐다. 지금 생각해도 나는 너무 비겁하고 한없이 모자란 사람이다.
불행과 희망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고모에게서 한비의 검진 결과와 관련해 연락이 왔다.
뱃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건 암이었고 종양이 얼굴과 머리에 퍼져 검게 나타난 것이었다. 당뇨까지 왔었고 약간의 치매 증상까지 왔던 상태였다. 남은 방법은 수술뿐인데 당뇨인 상태인 데다가 노견이라서 전신마취 후 수술이 성공하더라도 깨어날 확률이 많이 낮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의사의 배려로 원한다면 조금은 싼 가격에 수술을 해주겠다는 것도 들었다.
이를 듣고 꾹 참은 후 전화를 끊고 사람이 별로 없는 도서관 화장실에 가서 한없이 울었다. 얼마나 아팠을까...라는 생각과 끝없이 밀려오는 미안함,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막막함 등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다 찾아왔다. 돈이 없어서 미리 막지도 못했고 치유하지도 못했고 수술해 달라고 해주지 못하는 상황이 너무 비참했다.
이후 결국 고모가 수술하기로 결정했다는 말씀을 주셨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제발.. 성공하고 일어나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뿐. 종교가 없었지만 이 세상 모든 신에게 빌었다. 그러고는 다음날 연락이 왔다. 수술은 다행히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것이다!!! 인슐린과 치료를 달고 살아야 하지만 그래도 성공했다는 것이다. 큰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행이네요"라는 얘기를 했다. 이어서 들린 말은 그 말이 무색해지게 만들었다.
"그런데 아직 한비가 전신 마취에서 깨어나지를 못하네.."
워낙 건강 상태가 좋아서 따로 병원을 다니며 관리해주지 않은 거 치고는 상태가 괜찮다는 평을 들었던 한비였다. 괜찮다는 것이지 좋다는 건 아니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됐다. 수의사 말로는 하루 정도가 마지노선이라고 했다. 그 안에 일어나지 못하면 진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다시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제발 한비가 일어나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