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을 때 이룬 꿈은 좋은 걸까?
눈을 뜨고 등교 전에 댕댕이가 우리 집에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할머니 댁에서만 들었던 강아지 걷는 소리가 우리 집에서 들리고 사료라는 글자가 적힌 비닐이 집안에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내가 너무 철도 없고 어렸다는 거다. 즉, 노는 게 너무 좋았던 나이였다. 축구, 놀이터에서 놀기, 온라인 게임 등 내 흥미를 이끌어내는 것이 너무 많았고 이에 몸을 맡겼다. 그 속에 한비와 예삐를 키우기 위한 조건이던 약속은 파묻혔다.
집에서 놀아주는 거는 생각보다 쉬웠다. 다행히 한비와 예삐가 장난감을 잘 가지고 놀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따로 시간 내어 놀아주지 않아도 됐다. 가끔 게임하고 남는 시간, 티비를 볼 때 곁에 있어주는 등 이거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멍청하게도.
산책은 어땠을까? 문제가 심각했다. 여가 시간 중 친구들이랑 놀 때 말고는 밖에 안 나갔다. 친구들이랑 안 놀면 게임하는 게 루틴이었다. 아주 가끔 내킬 때 한비와 예삐를 데리고 산책을 나섰다. 그마저도 솔직히 너무 귀찮았다. 산책의 중요성을 고모에게도 부모님에게도 들었지만 귀찮았다. 철없게도.
꿈을 이룬 건 참 소중하고 귀한 케이스라고 생각한다. 단, 그 꿈을 이뤘을 때의 당사자가 그만한 그릇이 되어야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꿈을 이루면 욕망만 충족시키고 오히려 피해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그릇도 되지 않고 바라기만 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내 욕망만 충족되었고 사람보다 짧은 시간을 사는 한비와 예삐의 소중한 시간을 챙겨주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
시간이 흐르고 이때의 기억 때문에 정의 내릴 수 있는 단어가 있다. 바로 책임감이란 거다. 이를 나는 '끝나고서 느낄 후회의 상처를 내가 발라줄 수 있는 일종의 연고'라고 표현한다. 당시에만 할 수 있고 완전히 나을 수는 없지만 통증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인 책임감을 어린 시절 이뤘던 꿈으로 배웠다.
사랑에 대한 후회를 배우다
반려동물 특히 댕댕이를 키우는 건 많은 걸 고려해야 했다. 강아지 시절이었던 한비와 예삐였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건 바로 배변활동에 대한 교육이었다. 고모에게 들었던 방법,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봤던 방법 등 다양한 시도를 해봤다.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몇 개월이 넘고 1년이 넘도록 가리지 못한 것이다. 쌓여가는 부모님의 스트레스는 결국 한비와 예삐를 파견 교육시키는 결정을 내리게 만들었다. 나와 동생은 간절히 부탁했다. 가릴 수 있게 되면 꼭 다시 데려오기로. 그렇게 약속 후 잠시만 안녕을 했다.
아직 그때의 장면이 생생하다. 아빠 차를 타고 뒷자리에서 한비와 예삐를 케어하다가 고모집에 도착했을 때, 고모집에서 시간 보내고 두 마리를 두고 가며 봤던 한비와 예삐의 눈, 진짜 다시 못 볼 거 같아서 집으로 돌아오며 차 뒷자리에 있던 장난감을 보며 흘린 눈물. 당시 중학생 전후였던 내게 잠시만 안녕이라는 말에서 '잠시만'은 보이지 않고 '안녕'만이 내게 남았던 거 같다.
게임하지 말고 더 놀아줄 걸
산책 더 자주 나갈 걸
말만 하지 말고 더 챙겨줄 걸
더 사랑해 줄걸...
못해준 사랑에 대한 후회와 미안함을 그렇게 체득했다. 만약 다시 돌아온다면 그 누구보다도 활기차고 행복할 수 있게 만들 거라는 다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