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시대는 달라진다... 이 분위기를 두려워하렴
[페미니스트 엄마가 쓰는 편지] 디지털 성범죄가 강력히 처벌받는 시대는
엄마는 네게 '텔레그램 대화방 성착취 사건'(일명 'n번방 사건')과 관련해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사건 자체의 잔인함에 몸서리치다가 네가 혹시나 커서 '가해자'가 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어. 너는 아직 어리지만 범죄에 대한 분노는 걱정과 불안으로 이어져 이 글을 남긴다.
"인권의 우선 요소는 기본 욕구의 해소가 되느냐다. 그것이 순리적 해소가 될 수 없다면 우회적 해소를 대안(으로 마련)해 주어야 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다."
n번방 사건 이후 온라인 공간에서 돌아다닌 글의 일부야. 남성의 욕구 해소를 위해 포르노 합법화와 성매매방지법 폐지가 필요하다는 요지더구나. 누가 이 글을 썼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엄마에게 작성자는 중요하지 않다. 그동안 살면서 이런 맥락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왔거든.
남성의 성욕은 본능이라 성매매를 불법화해도 근절할 수 없다, 고대부터 몸을 파는 여성들이 있었다, 차라리 직업으로 인정해주고 합법화하는 것이 성범죄를 줄일 수 있는 해결책이다... 남성들의 입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내뱉어지는 말들이야. 지겨울 만큼 들었고, 전혀 새롭지 않은 말이다.
그래 맞아. 여성의 몸과 성이 모욕당하고 훼손당한 역사는 아주 길어. 역사가 길면 용인해줘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영역인 걸까? 타인에게 재산으로서 소유되고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한 인간을 '노예'라고 한다. 노예제도의 역사가 오래됐으니 노예제도를 합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 본 적 있니? 흑인 혐오 범죄 사건이 일어날 때, 피부색으로 인종차별을 하는 역사가 오래됐으니 차별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여성을 '해소의 도구'로 여기는 것은 폭력이란다
여성을 '해소의 도구'로 여기는 것은 폭력이란다인류는 끊임없이 차별과 폭력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면서 싸워왔어. 더 나은 '사람다움'을 성찰하고 반성하며 노예제도, 인종차별 등 불평등 자체를 근절하려 노력해왔다. 덕분에 많은 발전이 있지. 누군가 마음속으로 노예제도의 부활을 원할지라도 '당당하게 주장' 할 수 없어. 손가락질 받으니까.
사람이 사람을 소유하고 자유를 박탈하는 노예제도는 그 자체가 폭력이라고 인식하니까 인류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말에 누구나 쉽게 동의하잖아. 인종차별은 부당하다는 보편적 합의가 있으니까 혐오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도 크게 말하지 않아. 말하고 싶어도 주변인들의 눈치를 보고 참을 줄 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여성의 성을 사고, 파는 것에는 이토록 당당하게 '본능'을 말하고, '역사'를 말할까? 폭력이라는 말에 동의를 안 하고 더 큰 목소리로 자신의 '권리'를 말할까? 부끄러움이 없을까? 남성들은 '인간다움'을 포기하는 걸까?
성매매의 역사가 아무리 길었다고 해도, 여성 차별, 성 착취, 성폭력에 저항한 역사도 그만큼 길었단다. 다만 남성들이 폭력의 가해자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야. 그들 스스로 돌아보고 청산할 의지가 없었지. 권력을 쥐고 여성을 약자의 위치에 둔 채 여성의 몸과 성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여성을 한 인격체가 아닌 섹스 해소의 도구로 여기는 것, 상대를 모욕하고 통제하며 성적 쾌락을 느끼는 것은 분명한 폭력이란다. 서로의 폭력성을 과시하는 것으로 너의 남성성을 쌓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건 '남자다움'을 견고히 하기보다 '인간다움'을 상실하는 행위에 가깝다.
인권의 우선 요소는 기본 욕구의 해소라는 말로 폭력을 정당화하지 말아라. 너의 성욕 해소를 위해 다른 누군가의 삶을 파괴해도 된다는 생각은 미개한 거야. 인권은 사람을 '존중'하는 정신을 바탕으로 한다. 여성의 자유와 존엄을 침해하면서 누리는 욕구는 인권의 영역이 될 수 없어.
부디, 남성의 성욕은 본능이니까 대안을 마련해 주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는 말도 하지 마. 사람이 다른 사람을 착취하도록 방관하지 않는 것, 폭력을 용인하지 않는 것, 아동·청소년들을 보호하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질서를 잡는 것, 국민 누구나 건강하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다.
더는 여성들이 웃어주지 않을 거야
성차별, 성폭력에 대한 예민한 감각 없이 남성문화에 젖어 익숙한 방식대로 살면 머지않아 도태될 것임을 알아야 해. 시대는 달라진다. 여성을 희롱하고 소비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라 폭력인 줄 몰라도, 결국은 폭력으로 드러나고 말 거야.
이전 세대에서는 연인이나 부부간 일어나는 폭력을 '사랑'의 과정으로 포장하거나 개인적인 일로 치부했지만, 이제는 '데이트 폭력' '가정 폭력' '스토킹' '안전 이별' 등 다양한 언어가 생기면서 범죄로 인식되고 있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제자, 부하 직원을 주물럭거리며 '딸 같아서' '격려 차원에서' 그런다고 말하면 웃어넘기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여성들이 웃어주지 않을 거야. 참지 않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고 있으니까. '성희롱' '성폭력'의 개념은 점점 더 정교하게 만들어질 것이고, 이제는 사소한 농담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
지금 당장은 '디지털 성범죄'라는 것이 낯설고, 처벌 규정과 시스템이 제대로 없어 무법지대라고 생각하는 남성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태평한 생각은 곧 멈추게 될 수밖에 없어. 수많은 여성들이 온라인 성폭력의 심각성을 알리고, 고발하고, 엄정한 수사와 강력한 처벌을 위한 법제도 개선에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까.
n번방 사건과 관련해 500만 이상의 청원이 있었고, 대통령까지 나서서 특별조사팀을 언급했다. 경찰은 즉시 '디지털 성범죄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면서 엄정한 수사를 통해 디지털 성범죄에 무감각한 사회 인식을 완전히 탈바꿈시키겠다고 단호히 말했고 말이야. 디지털 성범죄는 사회 공동체를 위협하는 '중대한 범죄'라고 선언한 거야.
당장은 변화를 느끼기 어려울지 몰라도 우리 사회는 결국 옳은 길로 진화해 간다. 이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면 도태되는 거야. 끼리끼리 좋다고 낄낄대다가 한순간 범죄자가 될 수도 있어.
'성적 호기심으로...' '한때의 실수로...'라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온다. 성 착취 영상물로 돈을 버는 소수의 운영자뿐만 아니라, 영상을 시청한 회원(소지 혹은 관전) 등 디지털 성범죄에 참여한 모두가 강력하게 처벌받는 시대는 결국 실현될 거야.
엄마는 네가 폭력을 폭력으로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거부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면 좋겠어. 하지만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여성들의 고통과 분노를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온다는 명언이 있어. 네 인생은 길잖아. 여성들의 외침을 두려워하렴. 잠재적 가해자 취급한다고 목청 높이는 태도는 네 인생을 망치는 선택이 될 수도 있다. 엄마는 네가 남자다움보다 인간다움을 고민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진심으로 바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