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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임새 Oct 04. 2018

무통주사는 쉬운 출산? 이영표가 모르는 진짜 문제

내가 직접 선택한 것들. 정말 스스로 선택한걸까?

내 눈을 의심했다. 누군가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을 때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고민이 아닌 그 고통을 더 느끼도록 설득했다는 일화가 당당하게 책에 실릴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여성의 고통은 이렇게 취급당하는구나. 놀랍고 황당하고 화가 났다.


"주님께서 주신 해산의 고통이라면 피하지 말자고 말했다. 첫째와 둘째 모두 무통주사 없이 출산하여 그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아내는 잠시 고민하더니 내 의견에 따라 무통주사를 맞지 않고 출산하기로 했다. 하지만 정작 진통이 시작되고 부들부들 고통에 떠는 아내를 보면서 오히려 마음이 약해지는 걸 느꼈다.


말씀에 따라 살려는 노력은 힘들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런 노력을 통해 느껴지는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내와 나는 앞으로도 쉽게 사는 방법과 말씀대로 사는 방법 사이에서 고민할 것이다. 그때마다 주님의 은혜로 선한 선택을 함으로써 날마다 기뻐하며 살기를 바랄 뿐."


이영표 KBS 축구해설위원이 출간한 에세이집 <말하지 않아야 할 때> 중 '무통주사'라는 글의 일부 내용이다. 셋째 출산 당시 간호사에게 무통주사를 권유받았지만 성경에 따라 끝내 거부했던 일화다.


타인에게 고통을 설득한 후 얻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란 게 어떤 걸까. 본인이 경험하지 않은 고통을 왜 '기뻐'할까. 본인이야 무통주사 맞지 말자고 설득하고 옆에서 보기만 했을 텐데, 직접 부들부들 떨어가며 진통한 아내는 어땠을까.


이 일화가 경악스러운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출산을 직접 겪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분만 당사자의 선택에 관여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무통주사를 맞고 분만하는 일을 "쉽게 사는 방법"이라고 규정했다는 것이다.



사랑과 신념으로 벌어지는 은밀한 폭력


성폭력이나 가정폭력 등 강력 범죄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잘못된 권력이 뚜렷한 반면, 사랑이나 신념 같은 그럴듯한 가치로 포장된 은밀한 폭력은 가해와 피해의 구별을 흐린다. 그런 상황을 마주할 때면 울화가 치밀고 비참해진다.


권력을 손에 쥔 쪽은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는 권한이 훨씬 많다. 선생님은 학생에게, 부모는 아이에게, 상사는 부하에게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건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권력이 있는 사람은 더 많은 권한을 갖고 권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에게 선택을 종용할 수 있다.


여성은 자신의 신체에 일어나는 일조차 주체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사회적인 분위기나 관습의 압박으로 인해 선택을 사실상 강요당하곤 한다. 그런 면에서 여성은 여전히 약자다. 내 선택을 누군가에 의해 종용당한다는 것은 굴욕적이지만 침묵하고 동조할 수밖에 없는 게 약자의 위치다.


나는 무통주사도, 촉진제도 맞지 않고 온전히 모든 고통을 느끼며 출산을 경험했다. 당시 무통주사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무통주사도 약품이기에 부작용이 있을 수 있었고, 일본에서 무통주사를 맞은 산모가 여럿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막연히 두렵기만 했다. 출산만큼 주사에 대한 공포가 있었던 나는 차라리 진통을 선택했다.


임신 막달까지 직장에 다니느라 출산 준비를 충분히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틈틈이 출산 관련 책이나 다큐멘터리를 챙겨봤는데, 그때마다 자연분만과 모유 수유를 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다. 숱한 서적과 영상물은 산도를 통과해 나온 아기들이 소위 '면역 샤워'를 해 더 건강하고, 모유 수유를 오래할수록 아이의 두뇌 발달이 좋다고 강조했다. 나는 의심할 여지 없이, 선택을 고민할 겨를없이 '자연분만+모유 수유'를 해내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그런데 당시 내가 했던 그 모든 선택이 정녕 나의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내겐 사실상 선택권이 없었다. 아이를 품은 엄마라면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보이지 않는 모성신화의 압박에 눌려 정해진 답을 골랐을 뿐이다.


고통은 축소되고 행복은 과장된 엄마들의 이야기


엄마가 되고 나서 느낀 첫 번째 감정은 '배신감'이었다. 엄마가 된다는 것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했고, 내가 알고 있는 것조차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하나씩 알아갔다.


자연분만과 모유 수유가 얼마나 아이에게 좋은지는 귀가 닳도록 들었지만, 그 두 개의 과업을 해내는 엄마가 얼만큼의 고통과 고난을 견뎌야 하는지는 생략돼 있었다. 고통이 축소되고 행복은 과장된, 당사자가 아닌 관찰자 시점에 맞춰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먼저 엄마가 된 여성들의 침묵을 원망했다. 왜 이런 처참한 고통을 '자연스러운' 일인 양 이야기했을까. 엄마의 모성은 신성한 것이기에 충분히 희생할 수 있고, 엄마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역사를 반복해온 여성들이 미웠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여성의 삶에서, 특히 엄마의 생애주기에서 여성이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얼마 없었다는 현실. 여성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도록 남성들의 권력이 작용해온 역사. 여성의 일도 남성의 기준에서 해석되는 구조. 엄마보다 아이가 먼저인 줄 알고 살아왔기에 여성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선택에 빠진다는 한계. 여전히 우리는 여성의 존재를 지우고, 철저하게 아이의 엄마로, 혹은 남편의 아내로서 정해진 답을 선택하게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지난해 가을 중국에서 벌어진 황당한 사건이 떠오른다. 병원 5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한 산모가 있었다. 태아의 머리가 커 자연분만이 어렵기 때문에 제왕절개를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도 남편이 끝까지 자연분만을 고집하며 수술 동의를 해주지 않아서였다. 사랑과 신념이 가하는 은밀한 폭력은 결국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


이영표 위원은 자신의 발언이 뒤늦게 보도돼 여론의 도마에 오르자 4일 페이스북에 장문의 해명 글을 올렸다.


"출산 몇 시간 전 전화통화에서 무통주사를 맞고 출산하자는 제 의견에 아내는 무통주사를 맞게 되면 아이가 힘들다며 끝내 주사 없이 첫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 아내는 이번(둘째 출산)에도 무통주사를 맞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아이가 어머님과 함께 집에서 기다리는데 주사를 맞으면 출산 시간이 길어진다는 이유였습니다. (저에게는 이런 마음을 가진 아내 자체가 축복입니다.)


(...) 셋째를 출산할 때쯤 저는 창세기를 읽고 있었고 출산을 코앞에 둔 터라 유독 출산의 고통을 언급한 부분에 눈길이 갔습니다. 종종 신앙적인 생각을 서로 나누는 우리 부부에게 첫째와 둘째에 이어 셋째를 출산할 때 주사를 맞지 않는 일은 여전히 두려운 일이긴 하지만 길게 고민할 일도 아니었습니다."


요약하면 결국 아내가 선택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가족을 위해 무통주사를 맞지 않은 아내를 가진 자체가 "축복"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그는 여전히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듯하다.



무통분만이란 없다


임신, 출산은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자연주의 출산이건 아니건, 무통주사를 맞건 아니건 간에 여성은 오롯이 자신의 감정과 몸 상태를 기준으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남성들이 여성들의 고통을 자신들의 기쁨이나 성취로 여기진 않았으면 좋겠다. 출산의 고통을 앞에 두고 견디라 말라 설득하는 태도는 갑질 중 최악의 갑질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무엇보다 시급한 일은 '무통주사'라는 이름을 바꾸는 일이 아닌가 싶다. 무통이라고 말하니 정말 편하고 쉽게 출산이 가능해지는 마법의 주사인 줄 아는가보다. 무통주사가 아닌 전신마취를 하고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 출산이다. 생명을 담보로 벌이는 일생일대의 사건이라 무통주사를 맞는다고 해도 무척 힘들고 아프다. 여성의 신체 변화와 출산에 대한 무지의 문제가 크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한다.


우리 사회가 여성들의 입장에서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해 선택권을 넓혀주길 바란다. 임신, 출산, 육아를 하는 엄마이기 이전에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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