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처럼 '엄마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안녕하세요. 기사 보고 연락드립니다."
메시지가 왔다. KBS <거리의 만찬> 제작진이라고 했다. 지난해 10월 <오마이뉴스>에 보낸 맘카페 관련 기사를 보고 연락해 온 것이다(관련 기사 : 맘카페 때문에 가게 망한다? 당신이 모르는 이것)
어떤 프로그램인지 궁금해 찾아봤다. "외면 받아 온 '작은 목소리'를 다른 관점, 다른 시선으로 들어보고자 하는 시사 프로그램"이란다. 이번에는 최근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는 맘카페를 주제로 방송을 하려나 싶어 수락했다.
최근 맘카페 관련 몇몇 사건을 이유로 '맘충들의 집합소 맘카페를 폐쇄하라'는 목소리가 나와서 할 말을 잃고 답답함을 느끼던 차였다. 한 차례 전화 인터뷰 후 담당 PD, 작가들과 두 번 만났다. 맘카페 운영진 2명과 맘카페 회원 2명이 방송에 출연해 3명의 MC와 이야기를 나눌 거라는 설명을 들었다. 그렇게 나는 지난 7일 방송된 KBS <거리의 만찬> 4회 '엄마는 처음이라서...' 편에 나가게 됐다.
녹화날인 11월 19일. 용인의 한 예쁜 카페에서 출연자와 제작진이 모였다. 대본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자유로운 대화 형식의 촬영이었다. 제작진의 요구는 단 하나.
"솔직하게 하고 싶은 말씀을 하면 됩니다."
TV로만 보던 방송인 박미선, 김지윤 정치학 박사, 김소영 아나운서 셋이 바로 가까이 앉아 이것저것 묻고 우리들의 대답을 진지하게 들었다. 평범한 엄마들의 특별한 날이었다.
엄마의 역할이 아닌 '엄마의 삶'을 묻다
두 아이를 키우는 동안 절실히 느낀 한 가지가 있다면, 우리 사회에는 현실을 살아가는 '보통의 엄마'의 이야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TV가 주목하는 건 충분한 자본과 시간을 갖고 여유롭게 육아를 하는 연예인들의 일상이다.
일반 엄마들 이야기는 결코 평범하지 않을 때 주목받는다. 영재를 키우는 특별한 엄마, 온갖 어려움을 갖고 장애아를 키우는 엄마, 아이를 사회적으로 성공시킨 엄마, 10명쯤 아이를 낳은 엄마 등. 뭐든 아이가 중심이고 그 아이들과 관련해 독특한 사연이 있을 때나 말할 자격이 주어지는 식이다. 아니면 마치 아이와 별개의 존재인 듯 '나'로 성공한 엄마들이거나.
아이를 키우며 고통을 참고 이겨내는 헌신적인 '엄마 역할'로 존재할 때, 혹은 엄마의 역할에 구속되지 않고 슈퍼우먼이 돼 사회적으로 큰 성취를 이뤄냈을 때, 공적으로 말할 수 있는 마이크가 쥐어진다. 언론뿐인가. 일상에서도 엄마의 입장과 감정은 쉽게 배제된다.
아이가 점점 무거워져서 애 안고 달래는 것도 힘들다고 말하면 무슨 큰일이라도 저지른 듯 "애 무겁다고 하는 거 아니다"라며 아이의 입장을 대변하고, 아이 돌보는 것만으로도 시간과 체력이 부족해 나 자신도 챙기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남편도 좀 챙겨야지"라며 배우자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들이 넘친다. "애를 둘이나 낳았어? 애국자구나!" 하며 사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말까지.
육아가 얼마나 힘든지, 엄마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 그 실체를 말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모성애가 부족한 이기적인 엄마, 나약한 엄마, 나쁜 엄마라는 낙인을 찍고 이상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한다.
그러나 KBS <거리의 만찬>에서는 한 여성이 막 엄마가 돼 한 사람으로서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되는지, 엄마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엄마 그 자체의 삶을 묻고 경청했다.
'사춘기'처럼 '엄마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녹화 날 카메라 앞에서 긴장돼 하지 못한 말들이 많다. 그중 이 말만큼은 꼭 하고 싶었다.
"사춘기라고 하면 전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공감대가 있잖아요. 한 사람이 그 시기를 지날 때 어떤 신체적, 심리적 변화가 일어나는지 어릴 때부터 모두가 배우죠. 질풍노도의 시기라 건드리면 안 되고, 주변에서 여러 가지로 이해해줘야 하고.
우리 사회가 '사춘기'처럼 '엄마기'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 여성이 엄마가 된다는 것은 신체적, 심리적 변화뿐만 아니라 세계관이 뒤집히는 엄청난 격변의 시기거든요.
엄마가 아닌 사람들도 그 시기를 지나고 있는 엄마들이 어떤 상태인지를 배워서 모두 알고 있어야 해요. 그래서 누군가 출산하면 아이에게만 집중하지 말고, 엄마의 상태를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엄마기는 사춘기만큼 사회적 배려가 필요해요."
누군가 어린 아이를 키우고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 체력도, 정신도, 마음도 평범하지 않다. 보통의 상식이라는 기준으로 '엄마기'를 보내고 있는 누군가를 평가하면 안 된다. 이해 못할 모습을 보이더라도 그 자체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아이에게만 관심이 많다. 아이의 건강, 아이의 행복, 아이의 성장. 엄마는 아이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평범하게 살던 한 여성이 출산 후 경험하게 되는 일들에도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엄마의 건강, 엄마의 행복, 엄마의 성장, 엄마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묻고 해결할 수 있는 고민을 나눠야 한다.
엄마는 어떤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단지 아이를 출산했을 뿐인 한 사람이다. 출산을 했다고 해서 그 순간 어떤 신내림을 받듯 '엄마모드'가 장착되는 것도 아닌데, 마치 어제와 다른 사람인 듯 "엄마니까, 엄마라면, 엄마잖아"라는 말로 감당해야 할 당연한 임무를 과중하게 부여한다. 모든 직무가 그렇듯 엄마들에게도 엄마로의 적응기가 필요한데 엄마기에 대한 이해는 거의 없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조차도 아이를 직접 낳아 키워보기 전에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엄마기'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엄마가 돼 참 힘들었다. "너도 애 낳아 키워보면 안다"라는 말은 너무 무책임한 말이다. 엄마의 삶을 경험하지 않고도 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엄마기'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사회로 거듭나길 바란다.
<거리의 만찬>을 응원하는 이유
그동안 많은 방송에서는 엄마를 '사람'으로 바라보기보다 '역할'로 바라봤다. 엄마들은 하고 싶은 말이 아닌, 남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했다. 자연스럽게 엄마의 고통은 축소되고 행복은 과장됐다.
<거리의 만찬>은 달랐다. 아이가 어떠하냐고 묻기 전에, 엄마로 사는 '나'의 삶을 질문했다. 엄마의 역할을 살아내기 위해 한 사람으로서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경청했다.
방송 분량으로 편집된 대화 시간은 길어봐야 20분일 텐데, 촬영은 몇 시간을 했다. 참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엄마들이 왜 맘카페라는 공간에 모이는지를 두고도 질문과 답이 오갔다.
그동안 우리가 접하던 시사 프로그램은 대부분이 남성 MC였고, 사안의 당사자가 아닌, 자칭 타칭 전문가들이 모여 앉아 타인의 문제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거리의 만찬>에서는 세 명의 여성 MC들이 직접 해당 주제의 당사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
파일럿 1회에서 KTX 여승무원들을 만나 그들이 어떻게 13년 동안 투쟁을 이어왔는지를 들으며 눈시울을 적셨다. 정규 편성 첫 회에서는 발달장애인 학교 건립에 반대하는 주민들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호소했던 어머니들을 찾아가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들었다.
2회에서는 좀처럼 다루기 힘든 주제인 낙태죄 문제를 다루면서 낙태죄의 당사자인 산부인과 의사와 여성들의 생생한 체험담을 경청했다. 3회에서는 학생 당사자들에게 두발자유화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을 들었다. 내가 출연한 4회에서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엄마들에게 맘카페가 어떤 의미인지를 물었다.
주류가 아닌 비쥬류의 이야기. 편견과 차별로 소외받던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쥐어주고 맘껏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이렇다 저렇다 결론을 짓지도 않고, 결론을 바라지도 않는다. 앞으로 <거리의 만찬>이 누굴 만날지 기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