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지난 ‘술자리’에 대한 몇 가지 변명
올해(2013년) 초, 본과정 독서 수업의 계획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향연>(Symposion:심포지온, 술자리)을 학생들과 함께 읽겠다는 생각을 밝혔습니다. 아시다시피, 플라톤의 은 사랑을 <향연>논의하는 철학 고전이지요. 그 자리에서 한 학부모님으로부터 이런 요지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왜 하필 플라톤인가? 그것은 일종의 엘리트주의, 관념론 철학이 아닌가?”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의 플라톤 비판을 염두에 두신건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날 민주사회에 가까이에 있는 문제들을 다루는 책을 함께 읽어야 하지 않는가?” (대략 이런 맥락의 질문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 없었기에, 기회를 봐서 따로 답변을 드려야겠다고 생각을 했었지만, 저 또한 일상에 치여 정신없이 살다가, 결국 얼렁뚱땅 넘어가버렸지요. 그 사이에 학생들 사이에서는 ‘향연이 어렵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등, 오만가지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1년 동안 본과정 학생들은 어떻게든 서로 밀어 주고, 끌어당기며 <향연>을 무사히 읽어내긴 했습니다. 그러나 읽자고 한 사람도, 책을 읽고 있는 학생도,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수많은 책들 가운데 왜 하필 플라톤의 <향연>을 읽어야 하는지 그 답을 내놓지 못한 채 여기까지 왔군요.
제 입장에서는 더 늦기 전에, 학기 초에 그 질문을 하셨던 학부모님이나 <향연> 때문에 고생한 본과정 학생들에게 ‘왜 이 책을 읽자고 제안했는지’ 그 이유를 해명해야 할 처지에 놓였었는데, 다행히 신문부에서 <향연>에 대한 글을 요청했군요. 기회가 왔으니 이 자리를 빌려, 독서 시간에 ‘우리는 왜 하필 플라톤의 <향연>이라는 고전을 읽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을 드리고자 합니다.
1. 왜 고전인가?
앞서 이야기 했지만 플라톤의 <향연>은 ‘사랑’(eros)에 대해서 심도 있게 논의하는 문학, 철학 고전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 책은 ‘고전’(classic∣古典)입니다. 전 학생들과 고전을 함께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동경대 문학부 교수,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그의 책, <단테 신곡 강의>를 보면, 고전의 의미에 대해 짚고 넘어갑니다. 영어 ‘클래식classic’은 라틴어 ‘클라시스classis’에서 유래했습니다. 라틴어 사전을 펼쳐보면, 클라시스classis에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계층’, ‘계급’, ‘등급’이라는 뜻이 나오는군요. 그런데 뒤이어 느닷없이 ‘함대’라는 뜻이 나옵니다. 여기서 도모노부는 ‘함대’라는 말에 집중하여 고전의 의미를 이끌어냅니다. 당시 로마인들에게 함대란 어떤 무기일까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최첨단 전투기가 실려 있는 ‘항공모함’에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무기는 아주 큰 전쟁, 국가적인 위기에 직면했을 때 출동하는 것이지요. (함대를 모아내는데 자금을 대는 사람을 두고 유력자, 클라시쿠스classicus라 불렀답니다.) 함대, 강력한 무기라는 classis에서 오늘날 classic이 나왔다는 점은, 고전이란 살아가면서 큰 위기에 부딪혔을 때, 이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지혜를 이끌어내는 원천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저는 학생들과 고전을 읽으면서 이런 지혜를 함께 찾고 싶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고전을 읽음으로써 ‘공부의 태도’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공부의 태도란 ‘지식을 구하는 태도’가 아니라 ‘지혜를 구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고전을 통해서 우리는 삶을 밀고 나갈 수 있는 힘뿐만 아니라 그 힘을 찾는 방법까지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방법을 알아야 그 힘을 얻을 수 있지요.) 지식을 구하는 태도는 글자로 드러난 부분을 중심으로 일방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태도입니다. 이런 식의 공부는 빠르게 진행됩니다. 두고두고 곱씹을 거리가 아니라 당장에 필요한 내용을 빨리 모아야 합니다. 그 정보의 가치는 나의 유용성에 따라 결정됩니다. 반면에 지혜를 구하는 태도는 글자와 글자 사이의 ‘맥락’을 읽어내는 일입니다. 이것은 일방적인 정보 수집의 과정이 아니라 나의 실존적인 고민을 가지고 글자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며 글을 읽으면서도 종종 나의 문제로 되돌아옵니다.
책을 읽는 활동을 사람을 만나서 대화하는 활동에 빗대어 생각해봅시다. 지식을 구하는 태도로 사람을 만나는 모습은 어떤가요? 필요에 따라 일방적으로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만남은 재빠르게 진행되고 필요한 목적을 달성하면 관계가 끝납니다. 반면 지혜를 구하는 태도로 사람을 만나면 여유롭게 상대방과 내가 주거니 받거니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필요보다는 대화 자체가 의미 있는 경우도 있지요. 대화를 한다는 것은 생각과 언어만 오가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감정, 대화 장소의 정취, 분위기를 공유하는 일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만,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사람과 만나서, 그것도 좋은 사람과 만나서 두런두런 거짓 없는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과 같습니다. 그런 책읽기를 배울 수 있는 책이 바로 고전이며, 고전을 만나야지 비로소 지혜를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지식을 구하는 태도를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에 따라서 그런 방식의 책읽기도 중요하지요. 문제는 요즘 공부-특히 입시교육-가 대부분 지식을 구하는 공부이며, 고전 읽기 또한 그런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고전을 풀어 설명해놓았다고 하는 ‘2차 해설서’들은 고전을 익숙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도움을 주지만 고전을 직접 읽지 않고, 그런 책들만 읽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지식을 구하는 태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중간에 이런저런 도움을 받더라도 마지막에는 직접 고전을 만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고전들은 어떤 책이기에 그런 지혜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요? 이에 대해서는 다른 곳(<독서 토론 작문 핸드북>)에서 이야기 한 것이 있으니 그대로 가져오겠습니다.
⑴ 시 ․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인간의 문제’를 담고 있다. ⑵ 결코 쉽게 읽히지는 않으나 읽는 방법을 익힌 뒤에 읽으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⑶ 한 번 읽는다고 하여 다 읽은 것이 아니다. 여러 번 읽어야 한다. ⑷ 그 자체로 아주 큰 세계를 이루고 있어서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길어 올릴 수 있다. ⑸ 또한 글쓴이의 문제의식과 저술의 목적이 명확하며, 그 내용을 전하는 방식과 내용 자체가 적합한 형식을 띤다. ⑹ 내용적으로는 다른 좋은 책들과 맞물려 있어서 하나의 좋은 책을 읽으면 다른 좋은 책들도 쉽게 찾아 읽을 수 있다.
2. 왜 플라톤인가?
그럼 그 많은 고전 작품들 가운데 왜 ‘플라톤’인가?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겠군요.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 플라톤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 책을 읽자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차원에서 좋아하지요. 일단은 철학 책 중에서 이토록 재미있는 형식의 책도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대화편, 즉 연극 대본이지요.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사실 저 역시 플라톤의 대화편을 20대 후반부터 직접 읽기 시작했습니다. 철학과 학부시절에는 줄곧 2차 해설서만 봤지요. ‘이데아론’, ‘동굴의 비유’ 등 파편적인 정보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직접 읽기 시작하면서 새삼 느낀 것인데,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을 때, 인물의 특징, 대화의 분위기 등 문학적 요소를 염두에 두며 읽는 것이 중요하더군요.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가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어떤 목소리로 설명했을까요? 빈정거림? 간절함? 고압적인 태도? <국가> 7권에 나오니 직접 확인해보시길 바랍니다.)
더 나아가, 문학적인 재미뿐만 아니라 논의(사유)의 구조, 방법까지 배울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대화법>은 오늘날까지 주요한 ‘철학하기’(doing philosophy)의 모델이 되기도 하지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요즘 대학원에서 같이 공부하고 있는 어느 선배의 경우, 사태를 주도면밀하게 파악하고, 맥락에 따라 나누며,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밝히고, 현상과 본질을 구분하는 등 철학적 사고 활동을 탁월하게 합니다. 옆에서 보면 깜짝 깜짝 놀랄 때가 많아요. 그런데 그 선배가 철학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 무작정 스터디 그룹에 들어가서 플라톤의 대화편만 주야장천 읽었답니다. 논의의 맥락을 짚어가며 내용이 이해될 때까지 읽고 또 읽는 활동은 그 자체로 논의(사유) 구조를 익힐 수 있는 훌륭한 공부 방법이었던 게지요. 마찬가지로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의 연설도 좋은 논의의 구조입니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소극적 연설’과 ‘적극적 연설’로 나누고, 적극적 연설에서 사랑의 ‘정의’, ‘기능’, ‘원인’, ‘목적’. 이 4단계로 나누어 사랑을 논하지요. 이 틀에 따라 다른 대상(이를테면 ‘우정’, ‘공부’ 등)을 논하려고 연습하는 것도 좋은 공부 방법일 것입니다.
또한 플라톤의 대화편은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훌륭한 작품입니다. 플라톤이 정치의 뜻을 접고 문학의 길을 걷게 되는 데에는 ‘소크라테스의 사형’(BC 399)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를 죽인 아테네는 지난 30년 간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으로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였지요. 전쟁 동안 도시에 시체가 널려있고, 정치적인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칼부림을 하며, 신성한 신전에서 대학살이 일어나는 등 기존의 관습은 모두 무너집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황폐해져 오직 ‘야만’이 아테네를 지배하던 시기였지요. 그런 아테네의 야만이 소크라테스를 죽인 것이고요. 스승의 죽음에 분노한 플라톤은 아테네의 가치들을 하나씩 세워 올리기 위한 정신의 노동을 감행합니다. 그러니까 플라톤의 대화편은, 편한 의자에 기대어 먹을 것, 입을 것 다 챙겨가며 쓴, 배부른 자의 정신적인 놀이가 아니라, 물 한 방울 없는 메마른 사막에 서 있으면서도 울창한 숲을 꿈꾸며 매일 나무를 한 그루씩 심는 절박한 몸부림이었던 것이지요.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을 때 이런 점을 읽으면서 우리가 공부하는 철학이란 무엇이어야 하는지 곱씹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플라톤의 이런 절박함은 바로 자유를 향한 철학의 정신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부터 아테네 법정에서 ‘자유인다움’을 주장하며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일생동안 무엇을 위해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해왔는지 변론했지요. 그 대가는 죽음이었습니다만, 죽음 앞에서 소크라테스가 굽히지 않았던 생각과 그 태도는 오늘날까지도 철학하기의 전범(典範)이 되고 있습니다. 플라톤도 현실에 절망하고 타협하는 게 아니라 끝없이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가 만들고자 했던 나라는 “최선의 법을 따르는 자유인”(324b, 「일곱 번째 편지」)으로 이루어진 나라였지요. 그는 평생 동안 세 차례나 목숨을 걸고 시칠리아로 건너가서 자신의 철학적 이론-철인치자론(“올바르고 진실되게 철학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권좌에 오르거나 아니면 각 나라의 권력자들이 모종의 신적인 도움을 받아 참된 철학을 하기 전에는 인류에게 재앙이 그치지 않으리라” (326a), 같은 책)을 실현시키기 위해 정치 실험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의 대화편을 지탱하고 있는 정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유를 위한 투쟁입니다. 플라톤이 추구했던 자유란 무엇인지 물음을 던지고 대화편 행간에 스며들어 있는 이런 생각을 찾아보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철학 공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3. 왜 <향연>인가?
그렇다면 ‘왜 하필 26~7권이나 되는 대화편들 중에 하필이면 <향연>인가?’하는 물음이 연이어 나올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사랑’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저는 본과정 학생들과 사랑을 함께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사랑이 실존적인 문제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당시 저의 주변에는 차분하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진지하게 묻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당시 부모님을 비롯한 어른들은 ‘그 나이에 공부나 하지 뭔 놈의 사랑이냐! 연애는 대학가서 하라’며 핀잔을 주기 일쑤였고, 또래 친구들은 ‘어떻게 하면 이성을 꼬드길 수 있는지’에 관한 얄팍한 연애의 기술만 되뇌었습니다. 저 역시 혼란스러워 하다가 뭣도 모르고 연애를 시작했고, 지금까지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사랑’에 대해 차분히 곱씹어보지 못하고 그때그때의 주관적인 감정과 객관적인 상황에 휩쓸려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연애는 해왔지만 정작 사랑이 뭔지는 모르는 지경에 빠져 살아왔던 것이지요.
지혜학교의 본과정 친구들은, 이미 혹은 조만간 어떤 형태로든지 연애-사랑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향연>을 함께 읽으며, 이 독서 수업이 여러분들 각자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물어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길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자를 플라톤으로 삼았던 것이지요. 물론 어려웠습니다. ‘글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아직 사랑을 해보지 않아서 뭔 말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라며 눙치면서 과제를 하지 않은 친구들의 넉살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갔습니다. 2000년도 훨씬 더 전에 쓴 작품이어서 세대 차이가 이만 저만 나는 것이 아니지요. 그리고 당시 독특한 문화였던 ‘소년-사랑’은 오늘날 눈으로 보면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온전히 이해가 가지 않아요. 게다가 <향연>이 오늘날 우리의 사랑에 걸려있는 모든 문제에 대해 답을 내려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향연>을 통해 우리는 사랑에 대해 중요한 점 하나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랑이란 ‘욕망’입니다. 흔히들 알고 있듯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정신적인 사랑, ‘플라토닉 러브’가 아니라 ‘욕망으로서 사랑’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랑이 찰나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성욕에 머무르지 않고 아름다움을 찾아 나아간다는 점입니다. <향연>에서 주목하고 있는 사랑은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인 것이지요. 우리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욕망에서 출발하여 어디까지 높이 올라갈 수 있는지, 다시 말해, 사랑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향연>입니다. 간략하게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볼까요? 첫 번째 연설자인 파이드로스가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이 나를 훌륭하게 만들어준다’는 주장에서부터(178c-d), 소크라테스가 디오티마 이야기를 끌어들여 ‘사랑하는 사람이 한낱 성욕에서 시작해서 얼마나 높은 아름다움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를(210a), 그리고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와의 만남에서 아름다움을 제대로 추구하지 못해서 망신을 당했던 에피소드까지(217a-219d).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을 여러 장면을 통해 보여주네요. 이런 점에서 플라톤은 사랑을 앞둔 우리에게 어떤 아름다움을 어떤 방식으로 좇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던져줍니다.
사실, 1년간 대장정이 실패했는지, 아니면 성공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간 책을 읽고 토론하며 글을 쓰느라 머리를 쥐어뜯었든, 아니면 잠결에 디오티마의 유려한 속삭임에 귀가 즐거웠든지 간에 어떤 방식으로든 <향연>의 흔적은 우리 안에 남아있겠지요.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 밤, 누군가를 사랑하는 상황에서 이 넘치는 감정을 어떻게든 전하려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다가 문득,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내가 그 사람에게서 바라보고 있는 아름다움은 무엇인지’, ‘어떻게 그 아름다움을 좇아나가야 하는지’, ‘그 끝에 무엇이 날 기다리고 있는지’ 등의 연이어 물음이 터져 나올 때, 다시 책장을 펴서 우리의 대화를 되새길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