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가 지난 8월에 지혜학교 학생들과 함께 참가했던 <제2회 유네스코 마스터 클래스 광주시리즈: 불평등에 대응하는 청소년들의 액션>의 오리엔테이션에서의 경험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이 날은 이번 시리즈에 참가하는 청소년들에게 불평등 문제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에 대응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전반적인 설명을 하는 자리였습니다. 이 날 저는 어떤 ‘생각거리’를 하나 발견했는데요. 이걸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생각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써 내려가 보겠습니다.
오리엔테이션의 첫 번째 안내 영상은 ‘국제 유네스코 마스터 클래스 대회’의 한 꼭지로 다루었던,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나”입니다. 이 자리에는 프랑스의 유명 패션 브랜드 ‘피에르 발망’(Pierre Balmain)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올리비에 루스테잉(Olivier Rousteing)이 출연했습니다. (이 브랜드가 얼마나 유명한지, 이 루스테잉 디렉터가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만, 25세의 젊은 나이에 디자이너로 발탁되어 10년 동안 프랑스의 패션계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두루두루 받고 있다고 합니다.)
루스테잉은 이 자리에서 학창시절,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을 당했던 경험을 이야기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종차별 상황에 맞서 자신은 '두 배로 노력'했고 그렇게 ‘자신을 스스로 증명했다’고 했습니다. 화면에는 감격하는 진행자의 표정과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수천 명의 대회 참가자들이 교차했습니다.
이러한 '성공 신화'를 들으면서 저는 익숙하디 익숙한 어떤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이런 성공 신화는 자칫 소수자들을 억압하는 굴레가 될 수도 있다. 인종 차별하는 사람들이 루스테잉 디렉터를 언급하며, '봐라! 유색인종도 노력 여하에 따라 성공할 수 있는 시대이다. 너희들이 차별을 받 는 이유는 너희들이 노력하지 않아서야!'라고 공격당할 빌미를 주게 될 것이다. 강자/가해자들이 차별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지, 약자/피해자들이 차별받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책임져야 할 사람이 책임지지 않는 상황을 정당화해주는 결과를 낳을 뿐 아닌가! 물론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야 열심히 고군분투했겠지만, 이러한 자신의 이야기가 언제든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차별과 불평등을 강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섬세하게 염두에 두어야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저는 그렇게, 팔짱을 끼고 뭔가 문제를 하나 발견하고 지적해냈다는 으쓱한 표정으로 오리엔테이션 자리에 계속 앉아 있었습니다. 그 영상 시청이 끝나고 다음 꼭지로 �우리는 왜 인종차별주의자가 되는가?�의 작가 이즈마엘 메지안느(Ismael Meziane)를 줌으로 연결하여 실시간 원격 강의를 듣는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이 시간에 저는, 그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정확히는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말을 듣게 됩니다.
2015년 프랑스의 주간지, 샤를리 엡도(Charlie Hebdo)가 테러를 당한 이후 프랑스 사회는 무슬림에 대한 분노와 혐오가 증폭되고 있었습니다. 메지안느는 테러를 반대하는 무슬림이었지만, 프랑스 사회가 뿜어내는 분노에 휩쓸려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 시기에 그는 인종차별의 당사자로서 프랑스 사회 내에서의 인종차별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할 '책임'을 느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놀랐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소수자/약자/피해자는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고, 그에 맞서 있는 주류/강자/가해자들이 소수자/약자/피해자의 권리 보장에 관하여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요. 그런데 메지안느 작가의 발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문제의 당사자로서 상황을 개선해야 할 책임을 지려고 노력했다는 지점에서 저는 적잖이 당황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실제로는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은, 사회적 권력 관계의 어느 위치에 있든 공동체의 구성원이자, 이 공동체를 더욱 건강하게 가꾸고 돌볼 수 있는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책임을 지는 사람이야 말로 자유인입니다. 노예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노예는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하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삶의 주인이야 말로 자기 삶에 대해, 더 나아가 자기 삶의 터전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메지안느의 이야기를 곱씹어 보면, 차별의 당사자임에도 피해에 갇히지 않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더욱 건강하게 가꾸고 돌보려고 하는 책임을 지는 사람은 비로소 자유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자기 삶을 증명하려고 했던 루스테잉 디렉터의 노력도 새롭게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든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나가야 할 책임을 져야 합니다. 루스테잉 디렉터도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나가야 할 책임을 다 한 것입니다. 그 역시 단지 다른 이들의 눈앞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자유인으로서 삶을 책임지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 끝에 저의 머릿속에는 ‘자유’, ‘책임’이라는 단어가 묵직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자유롭기 때문에 책임을 져야 할까요? 아니면 책임을 지고 나서야 자유인으로 거듭나는 것일까요? 이때 책임은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해 어떻게 지는 것일까요? 또 이때의 자유는 어떤 의미일까요? 아니면 여기까지가 제가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은 생각이었습니다.
어떠세요? 한국 사회에 함께 공존하고 있는 여성, 퀴어, 장애인, 청소년, 이주민들이 한국 사회에 대해 마땅히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어떻게 들리시나요? 수긍이 되나요? 아니면 어떤 불편한 감정이 올라오나요? 혹시 이 생각이 놓치고 있는 또 다른 생각들이 있을까요? 뒤이어 지는 여러분들의 생각을 궁금해 하며 이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2023년 11월 광주 인권지기 활짝 소식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