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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망고 Oct 10. 2022

찻잎이 우러날 때

정성스레 돌본 환자가 떠나고 보이차를 선물 받았다.

인턴은 그냥 귀엽게 ‘인턴이’라고 부른다. 전공의들은 모두 그 시절을 겪어서 다양한 감정으로 그 시간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턴이들의 서투른 모습이 속이 터지면서도 측은하기도 귀엽기도 하고 그렇다. 인턴 시절을 묘사할 때 빠뜨리지 않는 말이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책임이 없었기 때문에 힘든 시간을 부담 없이 털어낼 수 있었고 즐거운 시간에는 제대로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책임이 없다는 것’은 곧 ‘권한이 없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하는 일이 환자의 치료과정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허드렛일인 경우가 많아서 인턴 기간 막바지에는 ‘내가 의산가?’라는 의문이 생기고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그런 인턴의 주요한 잡 (job) 중에 하나가 돌아가신 환자의 신체를 정리하는 것이다. 환자들은 대부분 여러 호스들을 몸에 박고 있는데 그것들을 떼어내고 상처를 봉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의사는 산자에게 필요한 존재이지 망자에게는 유용한 존재가 아니므로 가장 의사 답지 않은 의사인 인턴이 그 일을 맡는다. 사실 다른 인턴 잡들에 비해 그 일은 그다지 싫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외과의를 꿈꾸는 내가 직접 사람의 몸을 봉합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밤에 콜 받는 것을 많이 힘들어했지만 이 경우에는 힘듦이 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공의 때는 사망선고를 해야 한다. 밤에 간호사 선생님이 어떤 환자가 사망하셨다고 콜을 한다. 병동에 다다르면 기다란 실선이 쭈욱 펴진 심전도 종이를 건네준다. 그리고 병실로 안내해준다. 그러면 간호사 선생님을 따라 곧장 병실로 향하는데 환자를 파악할 시간도 필요 없는 것이 이미 안 될 것 같은 환자는 오전/오후 회진을 할 때나 환자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콘퍼런스 때 이야기가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병실 앞에 서면 의사 가운 주름을 바로 잡으면서 숨을 고른다. 그리고 병실에 들어서면 보호자들이 와서 환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의사가 들어서면 보호자들이 자리를 옆으로 조금씩 비킨다. 보호자들의 표정을 살핀 뒤 환자의 바이탈을 표시하는 모니터를 확인하면 환자를 이생에 잡고 있던 끈이 끊어졌음을 보게 된다. ‘00시 00분 000 환자분 사망하셨습니다.’라고 선언을 하면 묵묵했던 보호자들이 그제야 눌려 있던 슬픔의 표식들을 토해낸다. 이제 담당 교수님에게 전화로 연락을 드리고 몇 가지 서류 작업을 하면 환자는 사회에서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인턴이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어떤 과를 돌게 되었는데 휴게실 소파에 앉아서 전임 인턴에게서 인계를 받고 있었다. 사실 인계를 듣고 있는 것인지 불만을 들어주고 있는 것인지 구별이 안 되었는데 불만의 주된 이유는 어떤 환자 때문이었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는데 그 환자는 전립선암 4기 환자였고 온몸이 까맣고 비쩍 말라 있었다. 거의 움직이지 못했고 말하는 것은 고사하고 식사도 수액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오래 누워있으면 압력을 많이 받는 부위의 살이 짓무르고 문들어져서 욕창이 생기는데 이 부위 드레싱(소독하고 반창고 등으로 상처부위를 덮는 것)을 하는 것이 이 파트 인턴의 메인 잡이었다. 그런데 욕창이 잘 생기는 부위 중 한 곳이 엉치뼈에 눌리는 부분인데 변이 나오면 변 때문에 드레싱 한 것이 잘 뜯어지기 일수였다. 거기에다가 이 환자는 욕창이 군데군데 있고 간병하시는 분이 까다로워서 하루에도 몇 번을 가게 되어 골치가 아프다는 것이 불만의 주된 내용이었다. 인계를 마친 전임 인턴은 홀가분하다는 듯이 홀연히 사라졌고 첫 드레싱을 하기 위해서 자리를 떴다. 


그렇게 한 달 동안 꾸준히 드레싱을 했다. 간병인은 머리숱이 별로 없는 연변 말을 쓰는 조선족 분이셨는데 까다롭다기보다는 환자를 정성스레 돌보는 분이었고 그러다 보니 ‘드레싱을 더 잘할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에 이런저런 의견을 제시할 때가 많았다. 드레싱을 할 때 환자가 스스로 움직일 수가 없어서 간병인분이 환자를 뒤집거나 들거나 하면 내가 패드를 데고 테이프를 붙였는데 손발이 잘 맞아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었다. 그분 말이 맞는 것도 있고 어차피 할 거 잘 하자는 생각에 최대한 푹신하게 그리고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해서 이것저것 시도하기도 했다. 특히 변이 묻는 부분에는 투명한 필름 테이프를 꼼꼼하게 데서 변 때문에 드레싱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치하였는데 이 방법이 주효했다. 간병인 분이 뒤처리할 때마다 드레싱이 많이 떨어져서 곤욕이었는데 덕분에 많이 편해졌다고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당직 때 다른 인턴이 드레싱한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고 불평하면 다독이면서 합을 맞추었는데 턴이 끝날 때쯤에는 가족들은 어디에 사시는지 등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하고 냉장고에서 보호자분이 사다주신 음료수를 꺼내 나눠 마시곤 했다. 


한 달이 지나고 다른 턴을 돌 때 환자분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턴 숙소가 2층 침대 두 개가 한 방에 들어 있는 구조였는데 2층에 누워서 참 오래간만에 많이 울었다. 그 환자의 치료에 관여했던 것도 아니고 환자의 손을 한번 잡거나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니었는데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물이 나왔다. 왜 울었는지, 그때가 어떤 감정이었는지 지금도 잘 설명을 할 수가 없다. 죽음을 목도하였을 때 느끼는 어떤 허망함 때문에 나온 차가운 눈물이었던 것 같다. 벨라스케스의 작품 중에 명암이 서명한 ‘십자가의 처형’이 있는데 검은 바탕에 십자가에 매달려 고개를 떨구고 있다. 그 할아버지도 평생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살다가 끝내 자신이 지고 있던 십자가에 달려 최후를 맞이한 것일까.


전공의 생활을 하면서 현대의학은 환자를 살린다기보다는 죽음이 찾아오는 것을 늦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큰 수술 또는 시술을 받고 응급실을 통해 입원하고 퇴원하기를 반복하며 고통받는 환자들을 보면 ‘산다’는 단어가 주는 생생함은 시들해진다. 죽음이 주는 해방감과 삶이 주는 고통을 비교하면 삶이 주는 고통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 큰 병에는 큰 치료가 필요하고 큰 치료는 아이러니하게도 ‘건강’이라는 대가를 요구한다. 그렇게 병과 그 병과 싸운 흔적으로 인해 쇠약해진 환자들을 보고 합병증으로 꺼져가는 목숨을 몇 번이고 억지로 살려내면서 ‘살려내는 의미’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다. 4년 동안 여러 답들을 찾아보았지만 여전히 ‘때로는 죽음이 더 매력적이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셔먼 눌랜드 교수님은 예일대학교의 저명한 외과의이신데 ‘사람은 어떻게 죽는가?’라는 책에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그 과정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 실제로 이 책이 나온 후로 미국 사회에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안락사 논쟁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평가를 본 적이 있다. 경이로워 보이는 의학과 의료기술의 발전은 노쇠함과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다.


전공의의 중요하고도 어려운 역할 중 하나가 가망이 없는 환자가 순리를 따르게끔 보호자가 놓아줄 수 있도록 옆에서 돕는 것이다. 한 교수님이 회식자리에서 “요즘은 의료기술이 너무 좋기 때문에 겨우겨우 목숨을 붙여둘 수는 있다. 보호자나 환자는 결정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의사가 끝맺음을 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내용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현대에는 성직자의 역할을 의사가 한다고 했던가. 현대의학이 붙들고 있는 환자를 놓아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보호자들 그리고 환자도 의사들에게 기대는 경우가 많다. 


한 달이 걸리는 경우도 있고 몇 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죽음이 환자를 찾아오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죽음이 마침내 도달하였을 때 환자를 떠나보내며 혼자서 기도하듯이 읊조리는 시가 하나 있었다. 최근에 유명해진 영상에서 이 시를 보고 반가웠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인생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전립선암 환자의 간병인 분이 환자가 돌아가신 지 며칠 뒤 고맙다며 보이차를 선물해주셨다. 의사 노릇 하며 받은 선물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이다. 찻잎이 스러지며 우러나온 갈색빛의 찻물이 맑고 향기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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