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편안하게 잠들었다.
나는 거울 앞에 서서 옷을 몇 번이나 갈아입었다.
"억해야, 니 뭐하노?"
해한이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옷 좀 골라보는 중인데."
"데이트 가는데 옷 고르는 거 당연하지."
"데이트 아니라니까."
"그래그래. 암튼 저거 입어라. 검은색 니트. 니한테 제일 잘 어울린다."
결국 해한이가 골라준 검은색 니트를 입고 나왔다.
오후 6시. 서영과 약속한 시간은 7시였다.
"억해야, 너무 일찍 나가지 마라. 30분 전에 도착하면 너무 티 난다."
"알았어."
하지만 나는 결국 6시 30분에 집을 나섰다.
약속 장소는 북촌의 작은 한정식당이었다. 서영이 예약해둔 곳이라고 했다.
6시 45분에 식당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서영이 이미 와 있었다.
"사장님!"
서영은 평소와 다르게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도 곱게 내려뜨렸다.
"서영씨... 일찍 오셨네요."
"사장님도요."
우리는 서로 보며 웃었다.
"들어갈까요?"
"네."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였다. 한옥을 개조한 공간이었고, 테이블은 여섯 개 정도밖에 없었다.
"예약하신 윤서영 고객님이시죠? 이쪽으로 앉으세요."
직원이 안내한 자리는 창가였다. 창밖으로 한옥 마당이 보였다.
"여기 어떻게 알았어요?"
"인터넷에서 찾았어요. 사장님이 한식을 좋아하실 것 같아서."
"감사합니다."
메뉴판을 펼쳤다. 모든 메뉴가 코스 요리였다.
"저는 제철 코스로 할게요. 사장님은요?"
"저도 같은 걸로 할게요."
주문을 하고 우리는 마주 앉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사장님."
"네?"
"오늘... 불편하시진 않으세요?"
"아니요. 왜요?"
"사장님은 맨날 다른 사람들 요리만 해주시잖아요. 이렇게 대접받는 게 익숙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요."
나는 잠시 생각했다. 서영의 말이 맞았다.
"...맞아요. 사실 좀 어색하긴 해요."
"그쵸? 그래서 제가 오늘은 사장님을 모시고 싶었어요."
"모신다니요."
"네. 사장님이 저한테 해주신 것처럼, 저도 사장님한테 뭔가 해주고 싶었어요."
서영은 미소 지었다.
"그리고... 사장님이 가게 밖에서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어요."
"가게 밖에서요?"
"네. 가게에서는 사장님이 '기억요리사'잖아요. 근데 오늘은 그냥... 기억해씨로 만나고 싶었어요."
그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나는 '기억요리사'로만 살아왔을까.
하해를 기억하는 사람으로, 손님들을 돕는 사람으로,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으로.
"기억해씨는요, 평소에 뭐 하면서 시간 보내세요?"
"...요리하고, 책 읽고, 그게 다예요."
"취미는요?"
"딱히 없어요."
"친구들이랑은요?"
"해한이 빼고는 잘 안 만나요."
서영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 좀 외로우시겠어요."
"...외롭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안 해본 게 아니라, 안 하려고 한 거 아니에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채 - 계절 나물 무침
작은 접시에 담긴 세 가지 나물. 시금치, 도라지, 고사리.
"우와, 예쁘다."
서영이 감탄했다.
나는 나물을 보며 자연스럽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시금치는 참기름과 국간장으로 무쳤고, 도라지는 고추장 양념이네요. 고사리는..."
"사장님."
"네?"
"오늘은 분석하지 마세요."
"...네?"
"그냥 드세요. 맛있는지 아닌지만 느끼시면 돼요."
서영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사장님은 직업병이 있으신 것 같아요. 음식을 먹으면서도 계속 어떻게 만들었는지 생각하시잖아요."
"...그러네요."
"오늘 하루만이라도 그냥 한 사람으로 드세요. 요리사가 아니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물을 먹었다.
그냥 먹었다.
분석하지 않고, 레시피를 생각하지 않고, 그냥 맛만 느꼈다.
"...맛있네요."
"그쵸?"
두 번째 - 전복죽
따뜻한 전복죽이 나왔다. 고소한 향이 났다.
"전복죽 좋아하세요?"
"네, 좋아해요."
우리는 천천히 죽을 먹었다.
"서영씨."
"네?"
"요리 학원은 어때요?"
"재밌어요! 처음엔 칼질도 서툴렀는데, 이제 좀 익숙해졌어요."
"다행이네요."
"그리고 사장님 덕분에 기초가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배우는 것 같아요."
"제가 뭘..."
"아니에요. 사장님이 많이 가르쳐주셨어요. 불 조절하는 법, 간 맞추는 법, 재료 다루는 법..."
서영은 환하게 웃었다.
"선생님이 저보고 센스가 있대요."
"당연하죠. 서영씨 잘하시잖아요."
"사장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더 기분이 좋네요."
세 번째 - 생선구이
은대구 구이가 나왔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워 보였다.
"저는 생선 발라먹는 거 잘 못하는데..."
서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발라드릴까요?"
"아니에요! 오늘은 제가 사장님 모시는 날인데, 제가 할게요."
서영은 서툴게 생선을 발랐다. 가시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지만, 정성스럽게 발라서 접시에 담아줬다.
"여기요, 사장님."
"감사합니다."
나는 서영이 발라준 생선을 먹었다.
"맛있어요."
"정말요? 가시는 없고요?"
"네, 없어요."
서영은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네 번째 - 갈비찜
메인 요리인 갈비찜이 나왔다.
"우와... 이거 진짜 맛있어 보인다."
"그러게요."
갈비찜을 한 점 먹었다. 부드럽고 달콤했다.
"사장님, 제가 만든 갈비찜이랑 비교하면 어때요?"
"둘 다 맛있어요."
"에이, 정직하게 말씀해주세요."
"진짜예요. 서영씨가 만든 것도 정말 맛있었어요."
"...감사합니다."
우리는 계속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했다.
"서영씨는 나중에 어떤 식당을 하고 싶어요?"
"음... 작은 식당이요. 사장님 가게처럼 크지 않은. 손님 한 분 한 분에게 정성을 다할 수 있는."
"좋네요."
"그리고 메뉴는... 가정식이요. 엄마가 해주는 것 같은 음식."
"서영씨답네요."
"사장님은요? 계속 '기억요리사' 하실 거예요?"
나는 잠시 생각했다.
"...잘 모르겠어요. 지금까지는 이게 제 전부였는데."
"지금까지는요?"
"네. 지금까지는."
서영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다섯 번째 - 후식
수정과와 약과가 나왔다.
"배불러요."
"저도요."
우리는 천천히 수정과를 마셨다.
"사장님."
"네?"
"오늘 즐거우셨어요?"
"네. 정말 좋았어요."
"저도요."
서영은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
"사장님... 다음에 또 만나도 될까요? 이렇게, 가게 밖에서요."
나는 서영의 눈을 바라봤다.
그 눈에는 기대와 조심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좋아요."
"정말요?"
"네."
서영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다음에는 제가 직접 만든 요리를 대접하고 싶어요. 식당 말고, 제 집에서요."
"서영씨 집에서요?"
"네. 사장님이 저한테 해주셨던 것처럼, 저도 사장님께 직접 만든 요리를 대접하고 싶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할게요."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식당을 나왔다.
밖은 이미 어두웠다. 한옥 마을의 골목길에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제가 바래다드릴게요."
"아니에요, 사장님. 제가 모시는 날이라니까요."
"그래도..."
"여기서 버스 타면 바로 가요. 걱정 마세요."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걸었다.
"사장님."
"네?"
"오늘... 정말 행복했어요."
"저도요."
"사장님도 가끔은 이렇게 사세요. 누군가에게 대접받고, 누군가랑 이야기하고."
"...노력해볼게요."
버스가 왔다.
"그럼 저 갈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서영씨도요."
서영이 버스에 올라탔다.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버스가 떠났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슴이 따뜻했다.
7년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 보낸 시간이 행복했다.
하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해한이에게 문자가 왔다.
'어땠노? 잘됐나?'
나는 답장했다.
'응. 좋았어.'
'그래. 잘됐다. 이제 좀 살아라, 니 인생을.'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편안하게 잠들었다.
꿈속에서 하해가 나타났다.
"억해야, 행복해 보여."
"...응."
"잘하고 있어. 계속 그렇게 해."
하해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