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요리사 ep.16-된장국

저희 이제... 떳떳하게 만날 수 있는 거죠?

by 춘식


3월 중순, 봄기운이 완연했다.

서영과 나는 일주일에 서너 번은 만났다. 가게에서 함께 요리하거나, 밖에서 데이트를 하거나.

"억해씨, 오늘 저녁에 시간 돼요?"

"응, 왜요?"

"제 집에서 저녁 먹어요. 제가 새로 배운 요리 해드릴게요."

"좋아요."

오후 6시, 서영의 집으로 향했다.

초인종을 누르려는데,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서영아, 그게 무슨 말이니?"

낯선 여성의 목소리였다.

"어머님, 저 이제 새로운 사람을 만났어요."

"새로운 사람? 민호가 떠난 지 겨우 2년밖에 안 됐는데?"

나는 초인종을 누르지 못하고 서 있었다.

"어머님, 저도 처음엔 그게 잘못된 건지 고민했어요. 하지만..."

"하지만 뭐가 하지만이야! 우리 민호가 얼마나 널 사랑했는데!"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나는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억해씨!"

서영이 문을 열었다.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어서 오세요..."

안으로 들어가니 60대로 보이는 여성이 소파에 앉아 계셨다. 서영의 시어머니였다.

"어머님, 이분이... 제가 말씀드린 기억해씨예요."

"...안녕하세요."

나는 인사를 했지만, 시어머니는 나를 차갑게 바라봤다.

"앉으세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시어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억해씨라고 했나요?"

"네."

"우리 며느리랑... 사귀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민호가 떠난 지 2년밖에 안 됐는데, 벌써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게... 어머니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어머님..."

서영이 말을 하려 했지만, 시어머니가 손을 들어 막았다.

"서영아, 네 마음은 이해한다. 젊으니까 외롭겠지. 하지만 우리 민호는... 우리 민호는 너무 일찍 갔잖니."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민호 아빠도 5년 전에 먼저 갔고, 이제 나한테 남은 건 며느리인 네밖에 없어. 그런데 너마저 다른 사람을 만난다면... 난 우리 민호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니?"

"어머님, 저는 민호를 잊은 게 아니에요."

"그럼 뭐가 달라? 다른 남자를 만나는데!"

시어머니가 소리를 높였다.

나는 서영을 바라봤다. 서영의 눈에 눈물이 맺혀있었다.

"어머님."

내가 조용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서영씨를 힘들게 했네요."

"억해씨, 아니에요..."

"서영씨, 오늘은 제가 먼저 가볼게요. 어머님과 천천히 이야기 나누세요."

"하지만..."

"괜찮아요. 연락할게요."

나는 일어서서 시어머니께 인사를 했다.

"어머님, 실례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슴이 답답했다.

서영과 나의 관계가... 다른 사람에게는 너무 빠른 걸까?

집에 도착해서 해한이에게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 어머니 마음도 이해는 간다."

"...그래?"

"응. 아들을 잃은 어머니 입장에서는 며느리가 유일한 연결고리잖아. 그런데 그 며느리마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아들이 완전히 잊혀지는 것 같을 거 아이가."

"..."

"근데 니도 잘못한 거 없고, 서영이 누나도 잘못한 거 없다. 그냥... 시간이 필요한 문제인 것 같다."

그날 밤, 서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억해씨... 미안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어머님이... 완전히 반대하시는 건 아니래요. 그냥... 시간이 필요하시대요."

"...그렇군요."

"그래서 제가 어머님께 제안을 했어요."

"무슨 제안?"

"어머님을 억해씨 가게로 모시고 가겠다고요. 민호가 좋아하던 음식을 억해씨가 만들어드리면, 어머님 마음이 조금 풀리실 것 같아서요."

"...좋은 생각이에요."

"그럼... 이번 주 토요일에 갈게요. 괜찮으시죠?"

"물론이죠."


토요일이 되었다.

오후 2시, 서영이 시어머니와 함께 가게로 왔다.

"어서 오세요."

"...실례합니다."

시어머니는 여전히 경계하는 표정이었다.

"앉으세요. 뭐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세요?"

"...된장국이요."

시어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민호가... 우리 민호가 제일 좋아하던 게 엄마 된장국이었어요. 아침마다 된장국 끓여주면 그렇게 좋아했는데..."

시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서영을 바라봤다. 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만들어드릴게요."

나는 서영과 함께 주방으로 들어갔다.

"억해씨, 민호가 좋아하던 된장국은... 사실 저도 잘 몰라요."

"괜찮아요. 제가 할수 있어요"

나는 시어머니의 기억 속으로 들어갔다.


1985년, 민호가 7살이었을 때.

어린 민호는 입맛이 까다로운 아이였다. 반찬투정도 심했다.

하지만 엄마가 끓여주는 된장국만큼은 정말 좋아했다.

"엄마, 된장국!"

"그래, 우리 민호 또 된장국 먹을 거야?"

"응! 엄마 된장국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시어머니의 된장국은 특별했다.


시어머니의 된장국

먼저 멸치 육수를 냈다. 국물용 멸치 10마리, 다시마 1장을 넣고 15분간 끓였다.

멸치와 다시마를 건지고, 된장 2큰술을 체에 거르며 풀었다.

"된장은 꼭 체에 거르며 풀어야 해. 그래야 부드러워."

감자 1개를 깍둑썰기 해서 먼저 넣고 5분간 끓였다.

"민호는 감자 물컹한 거 좋아하니까 먼저 넣어야지."

애호박 1/3개를 반달 모양으로 썰어 넣었다.


두부는 부드러운 연두부를 사용했다. 1/2모를 큼직하게 썰어 넣었다.

그렇다. 이 된장국의 킥은 연두부였다.

"민호는 딱딱한 두부는 안 먹으니까 연두부로."

양파 반개를 굵게 채 썰어 넣었다.

청양고추는 넣지 않았다. 민호가 매운 걸 못 먹어서.

대신 풋고추 1개를 어슷 썰어 넣었다.

다진 마늘 1큰술을 넣고 5분 더 끓였다.

마지막에 대파를 송송 썰어 넣고 불을 껐다.

"민호야, 된장국 다 됐다!"

"와! 엄마 최고!"

민호는 된장국에 밥을 말아서 호호 불어가며 먹었다.

"엄마, 나 커서도 엄마 된장국 먹을 거야."

"그래, 엄마가 평생 끓여줄게."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민호는 27세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시어머니의 기억에서 레시피를 정확히 파악했다.

"서영씨, 제가 하는 거 잘 보세요."

"네."

나는 시어머니의 기억 속 그대로 된장국을 만들기 시작했다.

멸치 육수를 내고, 된장을 체에 거르며 풀었다.

감자를 먼저 넣고, 애호박, 연두부, 양파 순서로 넣었다.

청양고추 대신 풋고추를 넣었다.

다진 마늘, 그리고 마지막에 대파.

"다 됐어요."

된장국을 뚝배기에 담아서 시어머니 앞에 놓았다.

시어머니는 된장국을 보더니 멈칫했다.

"이게..."

"드셔보세요, 어머님."

시어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국물을 한 술 떠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한참 후 눈을 뜨더니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게... 내가 민호한테 끓여주던 그 맛이에요."

"..."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어요?"

시어머니는 계속 울면서 된장국을 먹었다.

"민호가... 민호가 여기 있는 것 같아요. '엄마, 된장국 맛있어'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서영이 시어머니 옆에 앉아서 손을 잡았다.

"어머님, 민호는 항상 어머님 곁에 있어요. 어머님 기억 속에요."

"...그렇겠지."

시어머니는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사장님."

"네, 어머님."

"제가... 제가 너무 편협했던 것 같아요."

"아니에요."

"아들을 잃은 게 너무 아파서... 며느리마저 잃을까 봐 두려웠어요. 그래서 서영이가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게... 배신처럼 느껴졌어요."

"...이해합니다."

"근데 오늘... 이 된장국을 먹으면서 깨달았어요."

시어머니는 서영을 바라봤다.

"서영아."

"네, 어머님."

"민호는 네가 행복하기를 바랐을 거야. 네가 슬퍼하면서 사는 걸 원하지 않았을 거야."

"어머님..."

"그리고... 이 사장님이 만든 음식을 먹어보니 알겠어. 이분은 진심으로 너를 아끼는 사람이구나."

시어머니는 나를 바라봤다.

"사장님, 부탁이에요. 우리 서영이 잘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님."

시어머니는 된장국을 다 드셨다.

"민호야, 엄마가 오늘 네가 좋아하던 된장국 먹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제는 서영이를 보내줄게. 네가 그렇게 사랑했던 서영이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게 너도 원하는 거겠지?"

시어머니는 조용히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서영이 시어머니를 꼭 안아드렸다.

"어머님, 감사해요. 그리고 저는 민호를 절대 잊지 않을게요."

"알아, 알아..."

두 사람은 한참을 안고 울었다.

나는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한 시간쯤 후, 시어머니가 일어섰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어머님, 제가 바래다드릴게요."

서영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나갔다.

30분 후 서영이 돌아왔다.

"억해씨."

"네."

"고마워요."

"제가 뭘..."

"억해씨가 아니었으면... 어머님 마음을 못 풀었을 거예요."

서영이 내게 다가와서 안겼다.

"어머님이 가시면서 그러셨어요. 좋은 사람 만났다고. 잘 살라고."

"...다행이네요."

"억해씨."

"네?"

"저희 이제... 떳떳하게 만날 수 있는 거죠?"

"...그런 것 같아요."

우리는 한참을 안고 있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영에게서 문자가 왔다.

'억해씨,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그리고... 사랑해요.'

나는 답장을 보냈다.

'저도 사랑해요, 서영씨.'

처음으로 문자로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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