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요리사 ep.17-밥상

그래, 백반... 엄마가 차려주시던 그 밥상

by 춘식


4월 초, 봄비가 내린 후 서울의 거리는 더욱 푸르러졌다.

"억해씨, 오늘 날씨 정말 좋죠?"

서영이 가게로 들어오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게요. 봄이 완전히 왔네요."

"억해씨, 저 오늘 학원에서 칭찬받았어요!"

"무슨 칭찬이요?"

"칼질이 정말 좋아졌대요. 선생님이 전에 요리 배운 적 있냐고 물어보셨어요."

"당연하죠. 서영씨 잘하시잖아요."

우리는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게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들어왔다. 단정한 옷차림에 온화한 인상이었다.

"어서 오세요."

"혹시... 여기가 기억요리사 맞나요?"

"네, 맞습니다."

"저는 '은혜요양원' 원장 김은혜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앉으세요."

원장님이 자리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저희 요양원 할머니들 이야기를 듣고 왔어요."

"할머니들이요?"

"네. 저희 요양원에는 80-90대 할머니들이 계시는데요, 대부분 이북에서 피난 오신 분들이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할머니들이... 요즘 고향 음식 이야기를 많이 하세요. 이북에서 드시던 음식들. 그런데 요양원에서는 그런 음식을 만들어드리기가 어려워서요."

"..."

"그러다가 찾아오시는 가족분들과 주위사람들이 이 곳'기억요리사'에 대해 이야기 해주셨어요. 사람들의 기억 속 음식을 만들어주신다고."

원장님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혹시... 저희 요양원에 오셔서 할머니들께 음식을 만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요양원 예산이 넉넉하지 않아서...비용을 많이는 드릴 순 없지만..."

나는 잠시 생각했다. 서영을 바라봤다.

서영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은 일 같아요, 억해씨. 우리 함께 해요."

"...그럼, 해드릴게요."

"정말요?"

원장님의 얼굴이 환해졌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언제 가면 될까요?"

"이번 주 토요일 점심시간은 어떠세요? 할머니들이 제일 정신이 맑으신 시간이거든요."

"좋아요. 그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원장님이 나간 후, 서영이 내 손을 잡았다.

"억해씨, 정말 좋은 일 하시는 거예요."

"서영씨도 함께 해주셔서 고마워요."

"당연하죠. 저도 할머니들 뵙고 싶어요."

토요일이 되었다.

우리는 요양원 주방에서 쓸 재료들을 준비해서 은혜요양원으로 향했다.

요양원은 서울 노원구의 조용한 주택가에 있었다.

"어서 오세요!"

원장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할머니들이 벌써부터 기대하고 계세요. 이쪽으로 오세요."

2층 식당으로 올라가니 할머니 여섯 분이 앉아 계셨다.

"할머니들, 오늘 특별한 분들이 오셨어요. 옛날 고향 음식 만들어주신대요."

"고향 음식?"

한 할머니가 눈을 반짝이셨다.

"네. 할머니들이 드시고 싶은 음식 말씀해주시면 만들어드릴게요."

나는 할머니들께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기억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윤서영이에요."

할머니들이 우리를 보며 반가워하셨다.

"아이고, 젊은 사람들이 이런 데까지 와주네."

"고맙습니다, 정말."

나는 할머니들의 기억을 하나하나 보기 시작했다.

첫 번째 할머니, 이순덕 할머니(87세). 함경도 청진 출신.

두 번째 할머니, 박정자 할머니(85세). 평안도 평양 출신.

세 번째 할머니, 김영숙 할머니(89세). 황해도 해주 출신.

네 번째 할머니, 최명희 할머니(84세). 함경도 함흥 출신.

다섯 번째 할머니, 한옥분 할머니(90세). 평안도 신의주 출신.

여섯 번째 할머니, 조명순 할머니(86세). 강원도 원산 출신.

모두 70년 전, 6.25 전쟁 때 피난 오신 분들이었다.

"할머니들, 고향에서 드시던 음식 중에 가장 그리운 게 뭐예요?"

내가 물었다.

"나는... 함흥냉면."

최명희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나는 평양 온반."

박정자 할머니.

"나는 인조고기밥."

이순덕 할머니.

할머니들은 저마다 그리운 음식 이름을 말씀하셨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각자 다른 음식을 만들어드리기는 어려웠다.

"할머니들, 제가 오늘 할머님들께 대접할 고향음식은 고향에서 드시던 밥상이에요. 된장국이랑 여러 반찬들로요."

"백반?"

"네. 할머니들이 고향에서 아침마다 드시던 그런 소박한 밥상이요."

할머니들이 서로 눈을 마주 보셨다.

"그것도 좋지."

"그래, 백반... 엄마가 차려주시던 그 밥상."

"오래됐네. 그런 밥 먹은 지."

나는 서영과 함께 주방으로 들어갔다.

"서영씨, 오늘은 정말 힘들 거예요. 여섯 분 드실 거니까."

"괜찮아요. 우리 함께하면 할 수 있어요."

우리는 할머니들의 기억 속에서 본 고향의 백반을 만들기 시작했다.


밥 짓기

쌀 6컵을 씻어서 불렸다.

"서영씨, 할머니들은 이가 약하시니까 밥을 좀 무르게 지어야 해요."

"알겠어요."

물을 평소보다 조금 많이 넣어서 밥을 지었다.


된장국

할머니들의 기억 속 된장국은 모두 비슷했다. 소박하지만 구수한 된장국.

멸치 육수를 넉넉히 냈다. 멸치 30마리, 다시마 3장, 물 3리터.

"서영씨, 된장은 할머니들이 드시기 편하게 많이 풀어주세요."

"네!"

된장 6큰술을 체에 거르며 풀었다.

감자 3개, 애호박 1개, 두부 2모, 양파 2개를 썰어 넣었다.

"북쪽 분들은 감자를 많이 드셨어요. 감자를 넉넉히 넣어요."

"알겠어요."

대파를 송송 썰어 넣고, 다진 마늘을 넣었다.


계란찜

"서영씨, 계란찜은 서영씨가 만들어주실래요?"

"네!"

계란 10개를 풀어서 물 2컵, 소금 1작은술, 다진 파를 넣었다.

큰 뚝배기에 부어서 약불에서 천천히 익혔다.

"부드럽게 익혀야 해요. 할머니들이 드시기 편하게요."

"네, 조심할게요."


나물 반찬

시금치나물, 콩나물, 도라지나물을 준비했다.

"억해씨, 나물은 제가 할게요!"

"고마워요, 서영씨."

서영은 정성스럽게 나물을 무쳤다. 내가 가르쳐준 대로.


고등어조림

나는 고등어 3마리를 손질했다.

"북쪽에서는 생선을 많이 드셨어요. 특히 고등어."

무를 먼저 깔고 고등어를 올렸다.

간장 4큰술, 고춧가루 2큰술, 설탕 2큰술, 다진 마늘 2큰술, 생강 1큰술, 물 2컵을 섞어 양념장을 만들어 부었다.

센 불에서 끓이다가 중불로 줄여 20분간 조렸다.


김치

요양원에서 준비해둔 배추김치와 깍두기를 그대로 사용했다.


김구이

김 15장을 하나하나 구웠다.

2시간 반 만에 모든 준비가 끝났다.

"다 됐어요!"

우리는 테이블을 차렸다.

할머니 한 분 한 분 앞에 밥그릇과 국그릇을 놓고, 가운데 반찬들을 올렸다.

된장국, 계란찜, 고등어조림, 시금치나물, 콩나물, 도라지나물, 김치, 김.

소박하지만 정성이 가득한 밥상이었다.

"할머니들, 식사 준비됐어요."

할머니들이 밥상을 보는 순간, 조용해졌다.


"이거..."

이순덕 할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우리 엄마가 차려주시던 밥상이네."

"그러게... 이런 밥상 70년 만에 보는구만."

박정자 할머니도 눈물을 글썽이셨다.

할머니들은 천천히 밥을 먹기 시작하셨다.

"된장국... 구수하네."

"고등어도 옛날 생각 나네."

"이 시금치나물... 우리 엄마 손맛 같아."

한옥분 할머니가 갑자기 울기 시작하셨다.

"할머니, 왜 우세요?"

"아니야... 그냥... 고향 생각이 나서."

"..."

"70년 전에... 피난 오던 날, 엄마가 아침밥 차려주셨어. 이렇게. 된장국이랑 나물이랑."

"..."

"그때 엄마가 그러셨어. '옥분아, 밥 많이 먹어라. 길이 멀다.' 그게... 엄마가 차려주신 마지막 밥이었어."

할머니는 계속 우셨다.

"피난길에서... 엄마를 잃었거든. 그리고 70년 동안 고향에 못 갔어. 엄마 산소도 못 찾았어."

다른 할머니들도 하나둘씩 울기 시작하셨다.

"나도... 아버지랑 헤어졌어. 38선에서."

"나는 오빠들을... 다 북에 두고 왔어."

"우리 남편은... 전쟁 때 돌아가셨어."

할머니들은 저마다의 아픔을 꺼내셨다.

나와 서영은 할머니들 곁에 앉아서 함께 있어드렸다.

한참 후, 조명순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그래도... 오늘 고향 밥 먹으니 좋네."

"그러게. 이런 밥 언제 먹어보나 했는데."

"고맙습니다, 젊은 사람들. 이렇게 우리 생각해줘서."

최명희 할머니가 내 손을 잡으셨다.

"총각, 고맙네. 70년 만에 고향 음식 먹었어."

"아니에요, 할머니."

"너희들 복 받을 거야. 이렇게 착한 일 하니까."

할머니들은 밥을 다 드셨다.

"배부르다."

"오랜만에 제대로 먹었네."

식사 후, 이순덕 할머니가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셨다.

"고향의 봄... 나의 살던 고향은..."

다른 할머니들도 하나둘씩 따라 부르셨다.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할머니들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노래에는 그리움이 가득했다.

서영이 내 손을 꼭 잡았다. 서영의 눈에도 눈물이 가득했다.

노래가 끝나고, 한옥분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총각, 아가씨. 혹시... 다음에 또 와줄 수 있나?"

"물론이죠, 할머니."

"고맙네. 정말 고맙네."

우리는 할머니들과 인사를 하고 요양원을 나왔다.

요양원 밖으로 나오는 길, 원장님이 우리를 배웅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할머니들이 저렇게 우시는 거 처음 봤어요."

"..."

"할머니들이 평소엔 고향 이야기 안 하세요. 너무 아프니까. 근데 오늘은... 마음껏 우시고, 이야기하시고."

"..."

"덕분에 할머니들이 치유받으신 것 같아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서영이 한참을 말이 없었다.

"억해씨."

"네?"

"할머니들... 너무 안쓰러워요."

"...저도요."

"70년이에요. 70년 동안 고향에 못 가신 거예요."

"..."

"그리고 가족들... 다시 못 만나신 거예요."

서영이 울기 시작했다.

"억해씨, 저희는... 정말 행복한 거죠?"

"...그런 것 같아요."

"가족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먹고 싶은 거 먹을 수 있고..."

"네."

"우리... 더 감사하면서 살아야 할 것 같아요."

나는 서영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서영씨."

"네?"

"우리 한 달에 한 번씩 요양원 가요. 할머니들께 음식 만들어드리러요."

"...정말요?"

"네. 할머니들이 원하시는 동안은 계속요."

서영이 환하게 웃었다.

"좋아요. 우리 함께 해요."

그날 밤, 해한이에게 오늘 일을 이야기했다.

"할머니들... 불쌍하시네."

"응."

"근데 니가 잘했다. 그런 일 하는 거."

"서영씨도 함께 했어."

"서영이 누나도 좋은 사람이네. 니 진짜 잘 만났다."

"...알아."

"억해야."

"응?"

"니 요즘 진짜 많이 변했다."

"뭐가?"

"예전엔 니 자신한테만 집중했잖아. 하해 생각하고, 니 능력 생각하고. 근데 요즘은 다른 사람들한테 눈을 돌리는 것 같다."

"...그런가?"

"응. 좋은 변화다. 하해도 기뻐할 거다."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하해.

하해가 내게 준 이 능력으로, 나는 사람들을 돕고 있다.

그것이 하해를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다.

그날 밤, 서영에게서 문자가 왔다.

'억해씨, 오늘 정말 의미 있는 하루였어요. 억해씨와 함께 좋은 일 할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다음 달에도 꼭 함께 가요. 약속!'

나는 답장을 보냈다.

'네, 약속해요. 함께 가요. 그리고...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서영씨 덕분에 잘할 수 있었어요.'

핸드폰을 내려놓고 누웠다.

서영과 함께하는 시간들.

그것들이 하나하나 소중한 추억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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