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할게
3월이 되었다.
봄이 오고 있었다.
어느 토요일 오후,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억해야, 니 지금 시간 되나?"
"네, 누나. 무슨 일있나?"
"...억해야, 가게 갈게. 오늘."
"갑자기 왜?"
"이야기할 게 있어서. 저녁때 갈게."
누나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저녁 7시, 누나가 가게로 왔다.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무슨 일이고?"
"억해야..."
누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 사람이랑... 이혼하려고."
"...뭐?"
나는 놀랐다. 누나는 결혼한 지 10년이 넘었다.
"왜? 무슨 일이고 도대체..."
"형부가 바람 폈다."
"..."
"1년 넘게 다른 여자 만났더라. 내가 모르는 줄 알았겠지."
누나는 계속 울었다.
나는 누나를 안아줬다.
"진정하고."
한참 후 누나가 진정했다.
"억해야, 나 배고프다. 밥 먹고 싶다."
"뭐 먹고 싶은데요?"
"...아빠 냉면."
"아빠 냉면이요?"
"응. 아빠가 여름마다 해주시던 그 냉면. 기억나제?"
"네, 기억나지."
"그거 먹고 싶다. 억해 니가 만들어줄 수 있나?"
"...해볼게."
나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의 냉면.
어릴 적 여름마다 아버지가 만들어주시던 그 냉면.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재료를 꺼내기 시작했다.
먼저 육수를 만들어야 했다.
냄비에 물 2리터를 넣고 사골 300g, 양지 200g을 넣었다.
센 불에서 한번 끓여서 핏물을 제거하고, 고기를 건져서 찬물에 헹궜다.
새 물 2리터에 고기를 다시 넣고, 양파 1개, 대파 2대, 마늘 5쪽, 생강 1쪽을 넣었다.
센 불에서 끓기 시작하면 중약불로 줄여서 2시간 동안 푹 끓였다.
아버지는 "육수는 시간이다"라고 하셨다.
육수가 끓는 동안 고명을 준비했다.
오이 반개를 채 썰어서 소금에 살짝 절였다.
삶은 달걀 1개를 반으로 잘랐다.
배 1/4개를 채 썰었다.
양지는 건져서 얇게 썰어두었다.
육수가 다 끓으면 체에 걸러서 기름을 제거했다.
식초 3큰술, 설탕 2큰술, 소금 1작은술을 넣어 간을 맞췄다.
육수를 냉장고에 넣어 차게 식혔다. 아버지는 "냉면은 차가워야 맛있다"고 하셨다.
냉면 사리를 끓는 물에 삶아서 찬물에 헹궜다.
그릇에 면을 담고, 차가운 육수를 부었다.
고명들을 예쁘게 올렸다. 오이, 양지, 달걀, 배.
겨자와 식초를 곁들여서 내놓았다.
시간은 벌써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누나여, 자 냉면 먹어봐라.."
누나는 냉면을 보더니 눈물을 흘렸다.
"이거... 아빠가 해주시던 그 모양이다."
"드셔봐요."
누나는 젓가락으로 면을 집어서 입에 넣었다.
"...맛있다. 아빠 맛이다."
누나는 울면서 냉면을 먹었다.
"억해야, 기억나나? 우리 어렸을 때 여름이면 아빠가 이 냉면 해주시던 거."
"그럼 기억나지."
"그때는 참 좋았다. 가족들이 다 같이 모여서 냉면 먹고..."
누나는 계속 울면서 먹었다.
"억해야, 나... 뭐가 잘못된 거 같노?"
"누나 잘못 없어."
"근데 왜 형부가 나를 배신했을까? 내가 뭘 잘못했길래..."
"글쎄 그건 배신이라기 보단 뭐랄까? 그 인간이 그렇게 태어난 걸까?"
"...근데 나도 잘못한 게 있는 것 같다. 형부한테 너무 잔소리만 했나? 너무 살림만 신경 쓰고 형부는 신경 안 썼나?"
"누나..."
"나...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혼을 해야 하나? 아니면 용서를 해야 하나?"
나는 누나 옆에 앉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내 일이 아니라서 뭐라고 말은 못해주겠다. 근데 한가지 분명한 것은 누나가 편안한 방향으로 결정을 해야 한다는 거지"
"...그래도 니 생각은 어떤데?"
"나는 그냥 누나가 행복했으면 좋겠지."
"행복..."
"형부랑 있을 때 행복했나? 아니면 힘들었나?"
누나는 한참 생각했다.
"...처음엔 행복했다. 근데 언젠가부터 그냥 익숙해졌어.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그냥 사는 거."
"그럼 지금은?"
"지금은... 배신감? 분노? 그런 게 제일 크다."
"그럼 그 감정들이 가라앉으면 어떨 것 같노?"
누나는 냉면을 한 입 더 먹으며 말했다.
"...모르겠다. 진짜 모르겠다."
"누나야, 천천히 생각해봐. 서두를 필요 없다."
"...그래야겠다."
누나는 냉면을 다 먹었다.
"억해야, 고맙다."
"왜?"
"이렇게 밥 해주고, 이야기 들어주고."
"뭔소리고."
"그리고... 아빠 냉면 다시 먹어서 좋다. 추억이 생각나서."
"누나야 우리는 다 누나 편이다. 누나가 하고싶은대로 해도 누구하나 뭐라고 하는 사람 없을거다."
누나는 눈물을 닦았다.
"그래, 고맙다. 억해야."
누나는 그날 밤 우리 집에서 자고 갔다.
다음 날 아침, 누나가 떠나기 전에 말했다.
"억해야, 나 일단 서울 집엔 못갈 것 같고 부산집에 내려가서 진지하게 이야기해볼게."
"오케이 조심히 내려가라"
"그리고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할게."
"그래 선택을 믿을게"
"응. 그리고 억해야."
"응?"
"니는 서영씨 잘해줘라. 좋은 사람 만났다."
"...응 알았다."
"결혼이 꼭 행복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이랑 함께하면 행복할 수 있다. 니는 서영씨랑 행복해라."
"응 알았다. 늦는다 빨리 출발해라."
누나는 미소를 지으며 떠났다.
한 달 후, 누나에게서 연락이 왔다.
"억해야, 나 이혼한다."
"...그..래"
"응. 형부랑 이야기 많이 해봤는데, 안 되겠더라. 신뢰가 깨졌어."
"...누나야, 괜찮나?"
"응. 생각보다 괜찮다. 오히려 홀가분해."
"...다행이네."
"억해야, 나 이제 새로 시작할 거다."
"그래 인생 끝난 것도 아닌데 새로 시작해야지."
"그리고 가끔 아빠 냉면 먹고 싶으면 갈게. 해줄 거제?"
"언제든지."
전화를 끊고 나서 서영에게 전화했다.
"억해씨, 무슨 일이에요?"
"아니,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어머, 억해씨가 이런 말도 하시네요?"
"...서영씨."
"네?"
"사랑해요."
나는 용기를 내어 서영에게 내 마음을 전달했다.
전화 너머로 서영이 놀라는 기척이 들렸다.
"...저도 사랑해요, 억해씨."
우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전화들고 있었다.
그냥 서로의 숨소리만 들으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