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잊혀져도 언젠가는 다시 가슴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비빔밥 손님이 다녀간 지 며칠이 지났다. 12월이 되면서 서울은 본격적인 겨울로 접어들었다. 대오서점 앞에는 첫눈이 내렸고, 서촌의 골목길은 하얗게 변했다.
"억해야, 눈 온다! 첫눈이다!"
해한이가 창밖을 보며 소리쳤다.
"그래."
"야, 니 왜 이렇게 시큰둥해? 첫눈인데!"
"눈은 매년 오잖아."
"에이, 재미없는 놈. 첫눈은 특별한 거라고."
나는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오늘도 예약은 없었다. 원테이블 레스토랑이라 그런가, 요즘 들어 손님이 뜸했다.
오후 4시쯤, 가게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뒤돌아보는 순간, 나는 멈칫했다.
눈 위를 걸어온 듯 어깨에 눈송이가 내려앉은 여성이 서 있었다. 20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긴 머리, 맑은 눈동자, 그리고 조용한 미소.
"안녕하세요. 혹시 여기가 기억요리사 맞죠?"
"네, 맞습니다. 어서 오세요."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나는 습관적으로 그녀의 기억을 보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의 기억을 볼 수 없었다. 마치 투명한 유리벽이 그녀의 기억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이상했다. 하해가 떠난 이후로 생긴 이 능력이 14년 동안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는데.
"손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아, 저요? 저는 윤서영이라고 해요."
윤서영.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으신가요?"
서영은 잠시 망설이더니 조용히 말했다.
"된장찌개요."
"된장찌개요?"
"네. 근데... 특별한 된장찌개예요."
"어떤 된장찌개인지 말씀해주시겠어요?"
서영은 가방에서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30대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 부엌에서 무언가를 끓이고 있는 사진이었다.
"이 사람은... 제 남편이었어요."
"...이었어요?"
"네. 2년 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서영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남편은 요리사였어요. 작은 한식당에서 일했죠. 그 사람이 제일 자신 있어 하던 음식이 된장찌개였어요."
"그렇군요."
"그런데... 저는 그 맛을 기억하지 못해요."
"...네?"
서영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말을 이었다.
"저는 1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남편이 떠나고 1년 뒤에. 그 사고로 기억을 많이 잃었어요. 특히 음식과 관련된 기억들이..."
"음식과 관련된 기억이요?"
"네. 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선택적 기억상실이라고. 트라우마 때문에 뇌가 특정 기억들을 차단한 거라고요. 남편과 함께 먹었던 음식들, 남편이 해줬던 요리들... 그 맛을 전부 잊어버렸어요."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래서 내가 그녀의 기억을 볼 수 없었던 건가. 그녀 스스로가 기억을 닫아버렸기 때문에.
"남편이 떠나고 나서... 너무 힘들었어요. 밥을 먹을 때마다 남편 생각이 나서 못 먹겠더라고요. 그래서 제 뇌가...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그 기억들을 지워버린 것 같아요."
서영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이제는... 기억하고 싶어요. 남편이 해줬던 된장찌개 맛을. 우리가 함께 먹었던 그 시간들을."
"그래서 이곳을 찾아오신 거군요."
"네. 친구가 소개해줬어요. 여기 사장님이 사람들의 기억 속 음식을 만들어준다고."
나는 난감했다. 처음으로 손님의 기억을 볼 수 없는 상황. 어떻게 그녀의 남편이 만든 된장찌개를 재현할 수 있을까.
"서영씨, 혹시 남편분에 대해 더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어떤 분이셨는지, 어떤 요리를 좋아하셨는지."
"남편은... 정말 성실한 사람이었어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시장에 가서 재료를 직접 고르고. 손님 한 분 한 분에게 정성을 다했죠."
서영은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남편이 말하길, 된장찌개는 정성이라고 했어요. 좋은 된장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끓이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그분이 어떤 재료를 주로 사용하셨는지 기억하시나요?"
"음... 된장은 꼭 3년 묵은 전통 된장을 썼어요. 그리고 육수는... 멸치와 다시마로 냈던 것 같아요. 남편이 '화학조미료는 절대 안 넣는다'고 자랑하곤 했거든요."
"다른 재료는요?"
"두부는... 순두부를 좋아했어요. 일반 두부보다 부드럽다고. 그리고 애호박이랑 감자를 꼭 넣었어요. 특히 감자를 넣으면 국물이 구수해진다고..."
서영은 하나하나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비록 맛은 기억하지 못해도, 남편의 행동과 말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꼭... 들기름을 한 방울 떨어뜨렸어요. 그게 남편만의 비법이라고 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그녀의 기억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그녀의 말 속에서 남편의 레시피를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한번 만들어볼게요."
"정말요? 하지만 저는 맛을 기억 못 하는데... 제가 어떻게 그 맛인지 알 수 있을까요?"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서영씨, 머리는 잊어도 마음은 기억합니다. 입에서 혀로, 혀에서 가슴으로 전해지는 그 느낌은 거짓말하지 않아요."
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비록 그녀의 기억을 볼 수는 없지만,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들로 남편의 된장찌개를 재현해야 했다.
먼저 육수부터 준비했다. 냄비에 물 4컵을 넉넉히 붓고, 국물용 멸치 10마리 정도를 넣었다. 머리와 내장을 제거한 큰 멸치들이었다. 다시마 1장(10cm×10cm)도 함께 넣었다.
중불에서 천천히 끓이기 시작했다. 육수는 서두르면 안 된다. 성실했다는 그 남편처럼, 정성스럽게 시간을 들여야 한다. 10분간 은근하게 끓여서 깊은 맛을 우려냈다. 육수가 끓는 동안 멸치에서 나오는 단백질 거품을 조심스럽게 걷어냈다. 거품을 제거해야 깔끔한 맛이 난다.
육수가 충분히 우러나면 멸치와 다시마를 건져냈다. 맑고 깊은 향이 나는 육수가 완성되었다.
된장 2.5큰술을 작은 그릇에 덜어냈다. 3년 묵은 전통 된장. 직접 담근 듯한 구수한 향이 났다. 된장을 육수 반 국자 정도에 먼저 풀었다. 체에 거르면서 풀면 더 부드럽지만, 나는 그냥 숟가락으로 천천히 풀었다. 남편이 어떻게 했을지는 모르지만, 정성을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감자 1개는 껍질을 벗기고 한입 크기로 깍둑썰기 했다. 감자를 먼저 넣어야 국물이 구수해진다고 했으니. 육수에 감자를 먼저 넣고 5분간 끓였다. 감자가 반쯤 익으면서 전분이 우러나와 국물이 조금 걸쭉해지기 시작했다.
양파 반개는 큼직하게 썰었다. 너무 잘게 썰면 형태가 없어진다. 애호박 1/3개는 반달 모양으로 1cm 두께로 썰었다.
순두부 1/2모를 준비했다. 일반 두부가 아닌 순두부. 부드러운 식감을 좋아했다는 남편의 취향을 따랐다. 순두부는 숟가락으로 떠서 넣었다. 칼로 자르지 않고 손으로 뜯듯이 넣어야 자연스러운 모양이 난다.
풀어둔 된장을 냄비에 붓고, 양파와 애호박을 넣었다. 다진 마늘 1큰술도 함께 넣었다.
청양고추 1개를 어슷 썰어 넣었다. 매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적당한 알싸함을 위해서였을까.
중불에서 끓이기 시작했다. 된장찌개는 센 불에서 빨리 끓이면 안 된다. 중불에서 천천히, 재료들이 서로 어우러지도록 시간을 줘야 한다.
8분쯤 끓이면서 중간중간 맛을 봤다. 간이 조금 약한 것 같아 된장을 반 큰술 더 풀었다.
대파 1대를 송송 썰어 넣었다. 파의 향이 확 올라왔다.
그리고 마지막, 남편만의 비법이라던 들기름. 들기름 1작은술을 표면에 살짝 둘러 넣었다. 고소한 향이 된장찌개 전체를 감쌌다.
불을 끄고 뚜껑을 덮어 1분간 뜸을 들였다.
밥을 지어 함께 상을 차렸다. 배추김치와 깍두기도 곁들였다.
"된장찌개 나왔습니다."
서영 앞에 상을 놓았다.
서영은 된장찌개를 보더니 한참을 말이 없었다.
"이 모양..."
"네?"
"남편이... 이렇게 담았던 것 같아요. 순두부가 자연스럽게 떠 있고, 애호박이 이렇게..."
서영은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국물을 조심스럽게 떠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 멈췄다.
눈물이 그녀의 눈가에 맺히기 시작했다.
"이 맛..."
"어떠세요?"
"모르겠어요. 이게... 남편이 끓여준 맛인지는 모르겠어요. 여전히 기억이 안 나요."
서영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왜 이렇게 가슴이 따뜻해지죠? 왜 이렇게 눈물이 나죠?"
서영은 계속 눈물을 흘리며 된장찌개를 먹었다.
"맛있어요. 정말 맛있어요. 이게 남편의 된장찌개 맛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분명히 이 맛에는 사랑이 담겨있어요."
나는 그녀 곁에 조용히 앉았다.
"서영씨."
"네?"
"남편분께서 왜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시장에 가셨는지 아세요?"
"...신선한 재료를 구하려고요?"
"그것도 있지만, 아마 서영씨를 위해서였을 거예요."
"...저를요?"
"네. 요리사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자신이 만든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이 맛있게 먹을 때예요. 남편분은 아마 매일 아침 서영씨가 아침 밥상 앞에서 '오늘도 맛있다'고 말하는 그 순간을 생각하며 시장에 가셨을 거예요."
서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울었다.
"서영씨가 비록 맛을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아요. 중요한 건 남편분이 서영씨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마음은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는 거예요."
"사장님..."
"그리고 서영씨의 마음도 기억하고 있어요. 머리는 잊었어도, 가슴은 알고 있어요. 이 된장찌개를 먹으면서 눈물이 나는 것처럼요."
서영은 한참을 울다가 천천히 말했다.
"사실 오늘이... 남편 기일이에요."
"..."
"2년 전 오늘, 남편이 떠났어요. 그래서 오늘만큼은 기억하고 싶었어요. 남편이 해줬던 음식을."
"잘 오셨어요."
"저... 다시 와도 될까요?"
"물론이죠."
"남편이 해줬던 다른 음식들도... 하나씩 기억해보고 싶어요. 비록 머리로는 기억 못 해도, 마음으로 느끼고 싶어요."
"언제든 오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서영은 된장찌개를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오늘... 남편과 함께 밥을 먹은 것 같았어요."
"그럼 잘 가세요. 조심히 들어가시고요."
서영이 나가려다 문 앞에서 돌아봤다.
"사장님은... 혹시 소중한 사람을 기억하고 계신가요?"
나는 잠시 멈칫했다. 하해의 얼굴이 떠올랐다.
"...네."
"그 사람도 사장님을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어디선가."
서영은 그렇게 말하고 미소를 지으며 나갔다.
그 미소는... 왠지 하해의 미소와 비슷한 것 같았다. 아니, 하해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에도 다시 일어서려는 사람들의 미소.
서영이 나간 후, 해한이가 다가왔다.
"억해야."
"응?"
"저 손님 기억 못 봤제?"
"...응. 처음이야."
"왜 그런 거 같노?"
"모르겠어. 아마... 그녀 스스로 기억을 닫아버려서 그런 것 같아."
"그래도 니가 잘 해줬다."
"그런가?"
"응. 니는 사람들한테 음식만 주는 게 아니라, 사랑을 주는 거 같다."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기억을 볼 수 없는 손님.
그녀를 보면서 나는 깨달았다.
기억은 머리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가슴에도, 손끝에도, 혀에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준 음식의 맛은,
비록 잊혀져도 언젠가는 다시 가슴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그날 밤, 나는 하해를 떠올렸다.
'하해야, 너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창밖의 눈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