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요리사'는 다시 영업을 시작했다.
서영씨가 다녀간 이후로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가게 문을 열지 않았다.
"억해야, 오늘도 안 열 거가?"
"응."
"야, 니 요즘 이상하다. 손님 안 오면 장사가 어떻게 되노?"
"...모르겠다."
해한이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 나도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다. 서영씨를 만난 이후로 마음이 이상하다. 처음으로 기억을 볼 수 없었던 그 경험이 나를 흔들어놓았다.
14년 동안, 하해가 준 이 능력으로 사람들을 도와왔다. 그것이 내 존재 이유라고 생각했다. 하해를 기억하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서영씨의 기억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은... 내가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는 뜻 아닌가.
"억해야."
"응."
"니 혹시 서영씨한테 마음있나?"
"...뭔 소리."
"아니, 니가 저 손님 다녀간 이후로 계속 이상하잖아."
"그게 아니라..."
"그럼 뭔데?"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1월을 향해가던 어느 오후, 나는 대오서점에 들렀다. 책이라도 보면서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이네요, 억해씨."
서점 주인 할아버지가 반갑게 맞아주셨다.
"네, 요즘 바빴어요."
"거짓말. 가게 문도 안 열었으면서. 내가 다 봤어요."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음이 좀 복잡해서요."
"그럴 땐 책이 제일이지. 천천히 둘러보세요."
나는 서가 사이를 걷다가 한 권의 책 앞에서 멈췄다.
'기억에 관하여'
책을 펼쳐들고 한 구절을 읽었다.
"기억은 과거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나침반이다."
그때 서점 문이 열렸다.
"할아버지, 혹시 요리책 있나요?"
그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서영씨였다.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사장님?"
"...서영씨."
서영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여기서 뵙다니. 사장님도 책 보러 오셨어요?"
"네, 여기 자주 와요. 서영씨는요?"
"저는... 남편이 쓰던 요리 노트를 찾았는데, 거기 적힌 요리들을 만들어보고 싶어서요. 참고할 책을 찾으러 왔어요."
"그렇군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사장님, 요즘 가게 문을 안 여시던데... 괜찮으세요?"
"...어떻게 아셨어요?"
"며칠 전에 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봤어요. 문이 닫혀있길래."
"아... 그냥 좀 쉬고 있어요."
서영은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사장님."
"네?"
"저... 오늘 시간 되세요?"
"시간이요?"
"네. 제가 요리를 배우고 싶은데, 혹시 도와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물론 괜찮으시다면요."
나는 잠시 망설였다. 아니 사실 망설일수 없었다. 그녀는 나의 기억속의 하해와 너무나 닮아있었다.
"제가 남편의 요리를 배우고 싶어요. 비록 그 맛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남편이 어떤 마음으로 요리했는지 느껴보고 싶어요."
서영의 눈은 진지했다.
"...무슨 요리를 만들고 싶으세요?"
"떡볶이요."
"떡볶이요?"
"네. 남편의 노트에 '서영이를 위한 떡볶이'라고 적혀있더라고요. 레시피도 아주 자세히 적혀있어요."
서영은 가방에서 낡은 노트를 꺼냈다.
"같이 만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나는 노트를 받아들었다. 정성스러운 글씨로 빽빽하게 적힌 레시피들.
그리고 '서영이를 위한 떡볶이'라는 제목 아래, 자세한 설명이 적혀있었다.
'서영이는 매운 걸 잘 못 먹지만, 떡볶이는 좋아한다. 그래서 맵지 않으면서도 맛있는 떡볶이를 만들었다. 서영이가 이 떡볶이를 먹으면서 환하게 웃는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좋아요. 같이 만들어봐요."
"정말요?"
"네. 우리 가게에서 만들까요?"
"네! 감사합니다, 사장님."
우리는 함께 가게로 향했다. 일주일 만에 여는 가게 문.
"해한아, 나 왔다."
"억해야! 니 오늘은 문 여는 거... 어? 손님?"
해한이가 서영을 보고 놀랐다.
"안녕하세요. 지난번에 왔던 윤서영이에요."
"아, 그때 그 분! 어서 오이소."
나는 주방에서 재료를 꺼내기 시작했다. 서영도 옆에서 함께 준비했다.
"자, 먼저 노트에 적힌 대로 해볼게요."
노트를 펼쳤다.
서영이를 위한 떡볶이
'고추장 대신 토마토 케첩을 베이스로 하되, 고추장을 아주 조금만 넣어서 은은한 매콤함을 낸다. 서영이가 매운 걸 못 먹으니까.'
"남편이...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서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괜찮으세요?"
나는 노트를 보며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먼저 육수부터 만들어야 해요. 남편분은 육수도 직접 내셨네요."
냄비에 물 4컵을 붓고 국물용 멸치 10마리, 다시마 1장(10cm×10cm), 양파 반개, 대파 뿌리 부분 1개를 넣었다.
"서영씨, 멸치는 머리와 내장을 제거해야 해요. 안 그러면 비린내가 날 수 있어요."
"아, 이렇게요?"
서영이 서툴게 멸치 머리를 떼어냈다.
"네, 잘하셨어요."
중불에서 15분간 끓였다. 서영은 끓고 있는 육수를 가만히 바라봤다.
"남편이 매일 이렇게 정성스럽게 요리했을 거예요."
"네. 요리는 시간과 정성이에요."
육수가 완성되면 체에 걸러 맑은 육수만 남겼다. 약 3컵 정도.
양념장 만들기
노트에 적힌 대로 재료를 준비했다.
"서영씨, 양념장을 같이 만들어볼까요?"
"네!"
볼에 토마토 케첩 4큰술을 넣었다.
"케첩을 베이스로 하면 단맛과 신맛이 조화를 이루면서 맵지 않아요."
고추장 1큰술만 조금 넣었다. 정말 조금. 은은한 매콤함만 낼 정도.
설탕 2큰술, 물엿 1큰술을 넣었다.
"단맛이 중요해요. 서영씨가 단 걸 좋아하시나봐요."
"제가... 단 걸 좋아했나봐요."
간장 1큰술, 다진 마늘 1큰술, 생강가루 약간을 넣었다.
"자, 이제 서영씨가 섞어보세요."
서영은 조심스럽게 양념을 섞었다.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남편이... 저를 위해 이 양념을 매번 이렇게 섞었을 거예요."
"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요리는 한 번 한 번이 특별해요."
떡볶이 만들기
가래떡 300g을 찬물에 10분간 담가 불렸다.
"떡은 미리 불려야 쫄깃해요."
넓은 팬에 육수 2컵을 붓고 양념장을 넣어 섞었다. 중불에서 끓이기 시작했다.
양파 반개를 굵게 채 썰어 넣었다. 양배추 2장도 한입 크기로 썰어 넣었다.
"남편분은 야채를 많이 넣으셨네요. 영양도 생각하신 거예요."
"그랬나봐요..."
당근 1/4개를 채 썰어 넣었다. 어묵도 두 장 넣었다.
양념이 끓어오르면 불린 떡을 넣었다.
"자, 이제 서영씨가 저어보세요."
"제가요?"
"네. 남편분이 어떤 마음으로 저었는지 느껴보세요."
서영은 조심스럽게 주걱을 들고 떡볶이를 저었다.
중약불에서 7-8분간 끓이면서 계속 저어줬다. 떡이 양념을 흡수하면서 부드러워졌다.
"국물이 자작해질 때까지 끓여야 해요."
떡이 완전히 익고 양념이 잘 배면, 대파 1대를 송송 썰어 넣었다.
통깨 1큰술을 뿌렸다.
"마지막으로 노트에 특별한 게 하나 더 적혀있어요."
"뭔데요?"
"모짜렐라 치즈를 위에 올린다고 되어있어요."
"치즈요?"
"네. '서영이가 치즈를 좋아하니까 위에 올려주면 더 좋아한다'고 적혀있어요."
서영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모짜렐라 치즈 한 줌을 떡볶이 위에 올렸다. 뜨거운 김에 치즈가 살살 녹기 시작했다.
"완성됐어요."
떡볶이를 접시에 담아 테이블로 가져왔다.
서영은 떡볶이를 보며 한참을 말이 없었다.
"제가... 정말 이걸 좋아했나봐요."
"네. 남편분이 서영씨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이 레시피에 다 담겨있어요."
서영은 젓가락으로 떡 하나를 집었다. 늘어나는 치즈와 함께 입에 넣었다.
그리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너무 맛있어요... 그리고 전혀 안 매워요. 정말... 저를 위한 떡볶이네요."
서영은 울면서 떡볶이를 먹었다.
"맛있어요. 남편이 만든 맛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이 떡볶이에는 확실히 사랑이 담겨있어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사장님."
"네?"
"사장님도 기억속에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세요?"
나는 잠시 멈칫했다. 하해의 얼굴이 떠올랐다.
"...있어요"
"역시 사람들은 다들 기억속에 누군가를 가지고 살아가는 구나."
서영은 생각에 잠겼다. 왜냐하면 본인의 기억엔 그 누구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람... 지금은 어디 있어요?"
"...하늘나라에 있어요."
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같네요. 둘 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네요."
"..."
"근데 사장님, 저는 요즘 생각해요. 사람은 떠나도 사랑은 안 떠난다고."
"...그런가요?"
"네. 남편은 떠났지만, 그이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남편이 저를 사랑했던 그 마음 여전히 여기 있잖아요. 이 떡볶이 레시피처럼. 사장님이 사랑했던 그 사람도 분명 사장님 곁에 있을 거예요."
서영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사장님."
"네?"
"가게 문 다시 여세요. 사장님처럼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해줄 수 있는 분이 문을 닫으면 안 되잖아요."
"...저는 그냥..."
"아니에요. 사장님은 특별해요. 어떻게 똑같이 만드시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 사랑을 음식으로 되살려주잖아요. 그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데요."
서영은 떡볶이를 다 먹고 일어났다.
"사장님,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남편과 함께 요리한 것 같았어요."
"저야말로... 덕분에 정신을 좀 차린 것 같아요."
"그럼 저는 이만 갈게요. 다음에 또 올게요. 남편의 다른 레시피들도 같이 만들고 싶어요."
"네, 언제든 오세요."
서영이 나가려다 문 앞에서 돌아봤다.
"사장님, 그 사람도 사장님이 계속 요리하는 걸 보고 싶어 할 거예요. 하늘에서."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나갔다.
서영이 나간 후, 해한이가 다가왔다.
"억해야."
"응."
"니 괜찮나?"
"...응. 이제 괜찮아."
"진짜?"
"응.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 다시 깨달은 것 같아."
"뭔데?"
"하해를 기억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게 돕기 위해서."
해한이는 어깨를 툭 쳤다.
"그래, 그게 니 답다. 내일부터 다시 영업하는 거제?"
"응. 해야지."
그날 밤, 나는 주방에 혼자 앉아서 떡볶이를 하나 만들었다.
하해를 위한 떡볶이.
비록 하해는 없지만, 하해가 좋아했을 떡볶이.
"하해야, 나 다시 시작할게. 니가 내게 준 이 능력으로 사람들을 계속 도울게."
창밖으로 달빛이 들어왔다.
어디선가 하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억해 오빠, 잘하고 있어. 계속해.'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다시 가게 문을 열었다.
'기억요리사'는 다시 영업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