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떡볶이를 만든 이후로 가게는 다시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12월의 마지막 주, 크리스마스를 앞둔 서촌은 연말 분위기로 들떠있었다. 대오서점 앞에도 작은 트리가 세워졌다.
"억해야, 올해도 다 간다."
"그러게."
"니는 올해 뭐 한 거 같노?"
해한이의 질문에 나는 잠시 생각했다.
"글쎄... 그냥 요리하고 살았지."
"맨날 그렇게 사노. 가끔은 니 인생도 좀 살아라."
"내 인생이 이건데 뭐."
해한이는 한숨을 쉬었다.
오후 2시쯤, 가게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서영이었다.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들어왔다.
"어, 서영씨. 어서 오세요."
"오늘은 예약하고 왔어요!"
서영은 예전보다 훨씬 밝아 보였다. 처음 왔을 때의 그 슬픈 눈빛은 거의 사라졌다.
"오늘은 무슨 요리를 하고 싶으세요?"
"잡채요!"
"잡채요?"
"네. 남편의 노트에서 가장 긴 레시피가 잡채더라고요. 그만큼 정성이 많이 들어간 요리인 것 같아서."
서영은 언제나처럼 남편의 요리 노트를 꺼냈다.
"그리고... 오늘은 제가 주도적으로 만들어보고 싶어요. 사장님은 옆에서 가르쳐만 주세요."
"서영씨가요?"
"네. 이제는 제가 직접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장님 덕분에 많이 배웠거든요."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처음 왔을 때의 그 무기력함은 없었다.
"좋아요. 그럼 제가 옆에서 도와드릴게요."
우리는 함께 주방으로 들어갔다.
노트를 펼쳤다. '서영이를 위한 잡채'라는 제목 아래, 빽빽한 글씨들.
'잡채는 손이 많이 가는 요리다. 하나하나 재료를 따로 볶아야 하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하지만 서영이가 명절 때마다 잡채를 좋아했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이 시간을 쓴다. 서영이의 웃는 얼굴을 보면 모든 수고가 사라진다.'
서영은 그 문장을 읽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괜찮으세요?"
"네... 계속할게요."
잡채 만들기
"먼저 재료부터 준비해볼까요?"
"네!"
당면 200g을 찬물에 30분간 불렸다.
"당면은 미리 불려야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워요."
"아, 이렇게요."
서영이 정성스럽게 당면을 물에 담갔다.
그 사이 다른 재료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쇠고기(불고기용) 150g을 채 썰었다.
"서영씨, 고기는 결 반대 방향으로 써는 게 좋아요. 그래야 부드러워요."
"이렇게요?"
"네, 잘하시네요."
고기에 간장 1큰술, 설탕 1/2큰술, 다진 마늘 1작은술, 참기름 1작은술, 후추 약간으로 밑간을 했다.
"10분 정도 재워두세요."
"네!"
표고버섯 4개는 기둥을 떼고 얇게 채 썰었다.
목이버섯 한 줌은 미지근한 물에 불려서 한입 크기로 썰었다.
시금치 100g은 다듬어서 준비했다.
당근 1/2개는 5cm 길이로 채 썰었다.
양파 1/2개도 채 썰었다.
파프리카(빨강, 노랑) 각 1/2개씩 채 썰었다.
"재료가 정말 많네요."
서영이 감탄하며 말했다.
"잡채의 매력이 그거예요. 여러 재료가 조화를 이루는 거."
"남편이... 이 많은 재료를 하나하나 손질했다고 생각하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수고가 수고가 아니에요."
서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재료를 손질했다.
볼에 간장 5큰술, 설탕 3큰술, 다진 마늘 1큰술, 참기름 2큰술, 통깨 1큰술을 넣고 섞었다.
"서영씨, 이 양념장이 잡채의 맛을 결정해요."
"네, 잘 섞을게요."
서영이 조심스럽게 양념을 섞었다.
"자, 이제부터가 중요해요. 각 재료를 따로따로 볶아야 해요."
"왜 따로 볶아요?"
"각 재료의 식감과 맛을 살리기 위해서예요. 한꺼번에 볶으면 물이 생겨서 눅눅해져요."
"아, 그렇구나."
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센 불로 달궜다.
"먼저 고기부터 볶아볼까요? 서영씨가 해보세요."
"제가요?"
"네. 제가 옆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서영은 떨리는 손으로 재워둔 고기를 팬에 넣었다.
"센 불에서 빠르게 볶아요. 너무 오래 볶으면 질겨져요."
"네!"
고기가 익으면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2분 정도 볶아서 따로 덜어냈다.
"잘하셨어요!"
"정말요?"
서영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같은 팬을 닦아내고 다시 기름을 두르고 표고버섯을 볶았다. 소금 한 꼬집, 다진 마늘 조금을 넣어 1분간 볶았다.
목이버섯도 같은 방식으로 볶아냈다.
당근은 식용유를 살짝 두르고 소금 한 꼬집만 넣어 1분간 볶았다.
"당근은 너무 오래 볶지 마세요. 아삭한 식감이 살아야 해요."
"네!"
양파도 빠르게 볶아냈다.
파프리카는 30초만 살짝 볶았다.
"파프리카는 거의 안 익혀도 돼요. 색감과 아삭함이 중요하니까."
"와, 진짜 신기해요. 재료마다 다 다르네요."
"그게 잡채의 매력이에요."
시금치는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데쳐서 찬물에 헹궜다. 물기를 꼭 짜고 참기름, 소금, 다진 마늘로 무쳤다.
불려둔 당면을 끓는 물에 넣고 7분간 삶았다.
"당면은 너무 익히면 안 돼요. 조금 쫄깃한 정도가 좋아요."
삶은 당면은 찬물에 헹궈서 물기를 뺐다. 가위로 먹기 좋게 3-4번 잘랐다.
"당면을 자르는 거예요?"
"네. 안 그러면 너무 길어서 먹기 불편해요."
큰 팬이나 냄비에 당면을 넣고 약간의 식용유를 둘렀다.
"서영씨, 이제 양념장의 절반을 넣고 당면을 볶아보세요."
"네!"
서영이 양념장을 붓고 당면을 볶기 시작했다.
"잘 섞이도록 계속 저어주세요."
"이렇게요?"
"네, 완벽해요."
당면이 양념과 잘 섞이면 볶아둔 재료들을 모두 넣었다.
"이제 나머지 양념장을 넣고 살살 버무려주세요. 너무 세게 하면 재료들이 부서져요."
"조심조심..."
서영은 정성스럽게 잡채를 섞었다.
마지막에 통깨 1큰술, 참기름 1큰술을 넣고 한 번 더 섞었다.
"완성이에요!"
"와... 제가 만든 거예요?"
서영은 신기한 듯 잡채를 바라봤다.
잡채를 큰 접시에 담아 테이블로 가져왔다. 색색의 재료들이 어우러진 모습이 아름다웠다.
서영은 잠시 잡채를 바라보다가 젓가락을 들었다.
한 젓가락 집어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어때요?"
서영은 한참을 눈을 감고 있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맛있어요. 정말... 맛있어요."
"남편분의 맛이랑 비슷한가요?"
"모르겠어요. 여전히 정확히 기억은 안 나요. 하지만..."
서영은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만들었지만, 남편이 함께 만든 것 같아요. 사장님도 함께 만들어주셨고."
나는 그녀 옆에 앉았다.
"서영씨, 많이 달라지셨어요."
"...네?"
"처음 오셨을 때랑 비교하면 정말 많이 밝아지셨어요."
서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 덕분이에요."
"제가 뭘..."
"사장님이 저한테 알려주셨잖아요. 머리는 잊어도 마음은 기억한다고. 그 말이 저를 많이 위로해줬어요."
"..."
"그리고 남편의 요리를 하나씩 만들면서 깨달았어요. 남편이 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사랑은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서영은 잡채를 한 젓가락 더 먹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는 슬프기만 한 게 아니라... 감사한 마음이 더 커요. 그런 사람을 만났다는 것에."
나는 서영을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에는 평화로움이 있었다.
"사장님은요?"
"네?"
"사장님이 사랑했던 그 사람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드세요?"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하해를 떠올렸다.
"...예전엔 그냥 그리웠어요. 슬프고, 미안하고. 제가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있었고."
"지금은요?"
"지금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한 그녀에게 했던 약속이 있기 때문에..."
우리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마도 서로가 떠나 보낸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서영씨."
"네?"
"서영씨는...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뭐요?"
"남편분의 레시피를 다 만들어보고 나면요."
서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밝게 웃었다.
"저도 사장님처럼 하고 싶어요."
"...저처럼요?"
"네. 저도 누군가를 위해 요리하고 싶어요. 남편이 저를 위해 했던 것처럼."
"좋은 생각이에요."
"사실은요..."
서영은 조금 부끄러운 듯 말했다.
"요리 학원에 등록했어요. 내년부터 제대로 배워보려고요."
"정말요?"
"네. 그리고 언젠가는... 작은 식당이라도 하고 싶어요. 남편처럼 정성스럽게 음식을 만드는."
나는 서영의 눈을 바라봤다. 그 눈에는 희망이 있었다.
"서영씨, 잘하실 거예요."
"사장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용기가 나요."
우리는 함께 잡채를 먹었다.
"사장님."
"네?"
"사장님은... 외롭지 않으세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당황했다.
"...외롭다는 게 무슨 뜻이죠?"
"그냥... 혼자 사시잖아요. 계속 다른 사람들의 추억만 만들어주시고. 사장님의 추억은 만들지 않으시고."
"저는... 이게 익숙해서요."
"익숙한 게 행복한 건 아니잖아요."
서영의 말이 가슴에 꽂혔다.
"사장님도 새로운 추억을 만드셔야 해요. 과거의 그 아이와의 추억만 붙잡고 있으면 안 돼요."
"...하지만..."
"그녀도 원하지 않을 거예요. 사장님이 계속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걸."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서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깨달았어요. 남편은 제가 슬퍼하면서 살기를 원하지 않았을 거예요. 다시 웃으면서 살기를 바랐을 거예요."
"..."
"사장님도 그래야 해요.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장님, 혹시 시간 되세요?"
"...네?"
"제가 오늘 잡채를 많이 만들었잖아요. 다 못 먹겠어요. 같이 먹어요."
"아, 네..."
우리는 함께 잡채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서영의 요리 학원 이야기, 꿈꾸는 식당 이야기, 그리고 남편과의 추억들.
나도 하해와의 이야기를 조금씩 꺼냈다. 서영은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하해... 예쁜 이름이네요."
"네. 아래 바다라는 뜻이에요."
"사장님이 정말 많이 좋아하셨나봐요."
"...네."
"그녀도 사장님을 좋아했을 거예요. 분명히."
서영의 말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렸다. 서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사장님."
"저도요."
"다음에 또 와도 될까요?"
"물론이죠. 언제든 오세요."
서영이 나가려다 문 앞에서 돌아봤다.
"사장님, 저... 사장님한테 감사해요."
"뭐가요?"
"제게 다시 살아갈 용기를 주셔서요. 그리고..."
서영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사장님도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나갔다.
서영이 나간 후, 해한이가 다가왔다.
"억해야."
"응."
"서영씨 좋은 사람이다."
"...응."
"그리고 니한테 관심 있는 것 같은데?"
"뭔 소리야."
"아이고, 이 둔감한 놈아. 니가 모르면 누가 아노."
해한이는 어깨를 툭 쳤다.
"억해야, 하해는 분명히 니가 행복하기를 바랄 거다."
"..."
"그러니까 니도 이제 니 행복을 생각해봐라. 알았제?"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날 밤, 나는 혼자 남은 잡채를 먹으며 생각했다.
서영의 말이 계속 떠올랐다.
'새로운 추억을 만드셔야 해요.'
나는 14년 동안 하해의 기억 속에 살았다.
이제는... 나만의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도 될까?
창밖으로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하해가 대답하는 것 같았다.
'억해야, 괜찮아. 행복해도 돼.'
나는 눈을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