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요리사 ep.09-김치볶음밥

사장님도 그러세요. 하해를 기억하되, 거기에 갇히지는 마세요.

by 춘식

새해가 밝았다. 2008년 1월.

잡채를 만든 이후로 서영은 일주일에 한 번씩 가게를 찾아왔다. 남편의 레시피를 하나씩 만들어보기 위해서였지만, 언제부턴가 그냥 들르기도 했다.

"사장님, 커피 사왔어요!"

"아, 감사합니다."

서영은 테이크아웃 커피 두 잔을 들고 자연스럽게 가게로 들어왔다.

"오늘은 요리 안 하세요?"

"아뇨, 할 건데요. 근데 그 전에 커피 한잔하면서 이야기 좀 하고 싶어서요."

"무슨 이야기요?"

서영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사장님 첫사랑 이야기요."

"...네?"

나는 커피를 받다가 손이 멈췄다.

"갑자기 왜요?"

"궁금해서요. 사장님은 하해... 그 친구가 첫사랑이셨나요?"

나는 잠시 망설였다. 하해.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했다.

"...네. 그랬어요."

"고백은 해보셨어요?"

"아뇨. 못 했어요."

"왜요?"

"...기회가 없었어요. 그리고 무서웠어요."

"뭐가요?"

"거절당하는 게요. 하해가... 그냥 절 친구로만 생각할까 봐."

그리고 그때 우리 무리에서 하해를 좋아하지 않는 남자들은 없었다.

서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저도 비슷했어요."

"서영씨도요?"

"네. 제 첫사랑은... 고등학교 동창이었어요."

"남편분이 아니었나요?"

"아뇨. 남편을 만나기 전에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요."

서영의 얼굴에 아련한 미소가 번졌다.

"그 사람도 고백 못 하셨어요?"

"네. 그냥...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어요. 그 사람은 제가 좋아하는 줄도 몰랐을 거예요."

"지금은 어떻게 지내시는데요?"

"모르겠어요. 졸업하고 연락이 끊겼거든요. 가끔 궁금하긴 해요. 잘 살고 있을까."

서영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다시 나를 봤다.

"그래서 오늘은 김치볶음밥을 만들고 싶어요."

"김치볶음밥이요?"

"네. 사실 남편의 레시피가 아니에요. 제 첫사랑이... 그 사람이 만들어준 김치볶음밥이요."

나는 조금 놀랐다.

"첫사랑이 만들어줬던 음식이요?"

"네. 고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였어요. 입시 끝나고 몇 명이서 그 사람 집에 놀러 갔었거든요. 근데 다들 배고프다고 하니까 그 사람이 김치볶음밥을 만들어줬어요."

서영의 눈빛이 반짝였다.

"별로 특별한 레시피는 아니었어요. 그냥 김치랑 밥이랑 볶은 건데...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좋아하는 사람이 만들어줘서 그랬겠죠."

"맞아요. 그때 그 사람이 앞치마 두르고 요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 좋아졌어요."

서영은 쑥스럽게 웃었다.

"근데 왜 오늘 그 김치볶음밥을 만들고 싶으세요?"

"음... 사장님이랑 이야기하다 보니까 문득 생각났어요. 제 첫사랑도 기억하고 싶어졌어요. 남편만 기억하는 게 아니라."

"..."

"그게... 배신 같은 건 아니잖아요? 첫사랑을 기억하는 게?"

"물론 아니죠. 첫사랑도 서영씨 인생의 소중한 부분이잖아요."

서영은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같이 만들어봐요. 어떻게 만들었는지 기억나세요?"

서영은 이전 보다 더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

"네! 그때 옆에서 구경하면서 봤거든요."

우리는 함께 주방으로 들어갔다.

김치볶음밥

"먼저 뭐부터 했어요?"

"음... 김치를 먼저 볶았어요. 김치를 잘게 썰어서."

"그럼 김치부터 준비해볼까요."

배추김치 2컵 정도를 꺼내서 잘게 썰었다.

"김치는 국물을 살짝 짜내고요. 너무 많이 짜면 김치 맛이 약해져요."

"아, 그랬구나. 그 사람도 그렇게 했던 것 같아요."

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김치를 먼저 볶기 시작했다.

"중불에서 김치를 먼저 볶으면 신맛이 날아가고 단맛이 나요."

"네, 그 사람도 한참 볶았어요. 은근히 정성스럽게."

김치를 3-4분 정도 볶다가 설탕을 반 스푼 넣었다.

"설탕을 넣으면 김치의 신맛을 잡아주고 감칠맛이 나요."

"우와, 설탕을 넣는 거였구나. 그때 뭘 넣었는지 궁금했는데."

김치가 잘 볶아지면 밥을 넣었다. 찬밥 2공기.

"밥은 찬밥이 좋아요. 갓 지은 밥은 물기가 많아서 볶음밥이 질어져요."

"맞아요! 그 사람도 냉장고에서 밥을 꺼냈어요."

밥과 김치를 잘 섞으면서 볶았다.

"이때 센 불로 올려서 빠르게 볶아야 해요. 그래야 밥알이 살아있어요."

"네!"

참기름 1큰술을 둘러서 고소한 향을 더했다.

김치국물 2큰술을 넣었다.

"김치국물을 넣으면 더 깊은 맛이 나요."

다진 마늘 반 스푼, 통깨 1스푼을 넣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볶았다.

"그리고..."

서영이 말했다.

"그 사람이 마지막에 계란후라이를 올려줬어요. 노른자가 반숙인 계란을."

"그럼 계란후라이를 만들어봐요. 서영씨가 직접 해보세요."

"제가요?"

"네."

서영은 조심스럽게 계란을 깼다. 팬에 식용유를 살짝 두르고 계란을 넣었다.

"약불에서 천천히 익혀요. 노른자는 반숙으로."

"네..."

서영이 정성스럽게 계란을 부쳤다. 흰자는 익고 노른자는 반숙인 완벽한 계란후라이.

"완성이에요!"

김치볶음밥을 접시에 담고, 그 위에 계란후라이를 올렸다. 통깨를 조금 더 뿌리고, 김 가루도 조금 뿌렸다.

"다 됐어요!"

우리는 함께 테이블로 나왔다.

서영은 김치볶음밥을 보며 잠시 말이 없었다.

"이거... 그때 그 모습이랑 똑같아요."

"그래요?"

"네. 그 사람이 이렇게 계란후라이 올려서 내줬거든요."

서영은 숟가락으로 김치볶음밥을 한 입 떴다. 노른자를 터트려서 밥과 함께.

입에 넣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한참 후 눈을 뜨더니 조용히 말했다.

"맛있어요. 그때 그 맛이에요."

"정말요?"

"네. 이상하게 이건... 기억이 나요. 확실히."

서영은 계속 먹으며 말했다.

"그때 그 사람이 '맛있어?'라고 물어봤는데, 저는 너무 떨려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어요."

"왜 떨렸어요?"

"좋아하는 사람이 저를 위해 밥을 해줬잖아요. 비록 저만을 위한 건 아니었지만..."

서영은 쓸쓸하게 웃었다.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그 사람이 저를 위해... 아니, 제가 있는 자리에서 요리한 게."

"졸업하고 연락이 끊긴 거예요?"

"네. 그 사람은 서울로 대학 갔고, 저는 부산에 남았거든요. 연락하려고 했는데... 용기가 안 났어요."

"왜요?"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어요. 입시 때 고백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까."

나는 서영을 바라봤다. 그녀의 표정에서 아쉬움이 묻어났다.

"사장님은요? 하해... 그 친구한테 고백하지 못한 거 후회돼요?"

나는 잠시 생각했다.

"...네. 후회돼요. 만약 그날 수원지에 가기 전에 고백했더라면... 아니, 그보다 더 전에 했더라면..."

"뭐가 달라졌을까요?"

"모르겠어요. 어쩌면 아무것도 안 달라졌을 수도 있죠. 하지만..."

나는 말을 이었다.

"적어도 제 마음을 전했을 거잖아요. 그 친구가 알았을 거잖아요. 제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도 그게 제일 아쉬워요. 제 마음을 전하지 못한 게."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사장님."

"네?"

"첫사랑은 왜 이렇게 오래 남는 걸까요?"

"...글쎄요. 아마도 그게 가장 순수했던 시절의 감정이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순수했던 시절..."

"네. 아무 조건 없이, 그냥 좋아서 좋아했던 때. 그런 감정은 다시 오기 힘드니까."

서영은 김치볶음밥을 한 입 더 먹으며 말했다.

"그럼 사장님은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무슨 뜻이에요?"

"하해는... 그 친구는 이미 떠났잖아요. 사장님은 계속 그 친구만 생각하면서 살 거예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저는요, 요즘 생각해요. 첫사랑을 기억하는 건 좋지만, 거기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고."

"..."

"남편을 만나고 나서 알았어요. 첫사랑과는 다른 종류의 사랑도 있다는 걸. 더 깊고, 더 따뜻한 사랑."

서영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사장님도... 새로운 사랑을 만날 수 있어요."

"서영씨..."

"하해도 그걸 원할 거예요. 사장님이 계속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걸."

나는 서영의 눈을 바라봤다. 그 눈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저도 그래요. 남편은 떠났지만, 저는 계속 살아가야 해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추억을 만들면서."

"서영씨는... 언젠가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서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가능성을 닫아두고 싶지는 않아요."

그녀는 김치볶음밥을 한 입 더 먹으며 말했다.

"첫사랑도 소중하고, 남편도 소중해요. 그리고 언젠가 만날 수 있을 새로운 사랑도... 소중할 거예요."

"..."

"사장님도 그래도 돼요. 하해를 기억하면서도, 새로운 사람을 마음에 담아도 돼요. 그게 배신이 아니에요."

서영의 말이 가슴에 깊이 와닿았다.

우리는 함께 김치볶음밥을 먹으며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그 첫사랑... 이름이 뭐예요?"

"민준이요. 이민준."

"혹시 지금도 연락하고 싶어요?"

서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기억하고 싶을 뿐이에요. 그 사람도 잘 살고 있을 거고, 저도 제 길을 가는 거죠."

"현명한 선택이네요."

"사장님도 그러세요. 하해를 기억하되, 거기에 갇히지는 마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해볼게요."

서영은 환하게 웃었다.

김치볶음밥을 다 먹고 서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감사했어요, 사장님."

"저도 좋은 시간이었어요."

"다음에 또 올게요. 그때는... 남편의 레시피로 돌아가야겠네요."

"네, 언제든 오세요."

서영이 나가려다 문 앞에서 돌아봤다.

"사장님."

"네?"

"혹시... 저랑 같이 저녁 먹으러 갈래요? 요리 말고 그냥 밖에서."

나는 잠시 놀랐다.

"저랑요?"

"네. 사장님은 맨날 여기서만 요리하시잖아요. 가끔은 밖에서도 드셔야죠."

"그게..."

"아, 부담스러우시면 괜찮아요. 그냥..."

"아뇨."

나는 서영의 말을 가로막았다.

"좋아요. 같이 가요."

서영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요?"

"네. 언제 갈까요?"

"이번 주 토요일은 어때요?"

"좋아요."

"그럼 그때 봐요, 사장님!"

서영은 기쁜 표정으로 나갔다.

서영이 나간 후, 해한이가 어느새 나타나서 싱긋 웃었다.

"억해야, 니 데이트 신청 받았다?"

"데이트 아니고 그냥 저녁 먹는 거야."

"그게 그거지 뭐. 암튼 잘됐다."

"뭐가 잘됐어."

"니가 드디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아서."

해한이는 내 어깨를 툭 쳤다.

"하해도 기뻐할 거다. 니가 행복해지는 거."

나는 대답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봤다.

첫눈이 내린 지 한 달이 지난 지금, 거리에는 여전히 하얀 눈이 쌓여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첫사랑은 영원히 가슴에 남는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새로운 사랑도, 새로운 추억도 만들어갈 수 있다.

하해를 잊는 게 아니라, 하해를 기억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

어쩌면 그게 진정으로 하해를 사랑하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토요일이 기다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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