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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꽃돌이 Dec 13. 2020

멜로는 습관

Fiction

오랜만에 거짓말을 해볼까.

난 조유월. 중2때 다음 까페에 인터넷별명을 써야되는데 뭐로 할까 고민하다  내 성 '조' 뒤에 뭔가를 붙여서 별명으로 쓰고 싶었다. 일 년 열두 달 중 '조' 뒤에 어울리는 월을 찾았고 6월이 제일 발음하기 좋아서 조유월로 쓰고 있다. 그 뒤론 여기저기 주위 사람들에게 날 조유월로 소개했고 친구들은 다 내 이름을 유월로 알고 있다.

중딩때부터 윤동주시인을 너무너무 좋아해서 내 입시성적과는 상관없이 시인이 다녔던 연희전문대 국문과에 가고 싶었다. 시인이 학생때 수업들었을 지금의 연세대 국문과 건물에 가서 손으로 벽을 훑으며 걸어보기도 했다. 중고딩 6년내내 장래희망란에 국어선생님 또는 시인으로 적었고 국어교육과나 국문과, 문창과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추천으로 취업이 잘 된다는 기계공학과를 들어갔지..만 적응 못하고 4+1년 만에 겨우겨우 졸업했다. 운좋게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했지..만 적응 못하고 괼괼거리다가 결국 회사를 그만뒀고 돈없고 꿈 많은 백수가 되었다.

잠깐 일하게 된 안경테 회사에서 설계 알바를 하다가 안경광학과에 관심이 생겼고 어느 지방대 편입요강을 읽다가 한 학기는 전액장학금을 준다기에 덜컥 응시료 4만원을 내고 지원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3학년, 그리고 4학년. 다행히 그 해 12월 크리스마스이브날 안경사 국시에 당당히 합격했다. 올해 1월부터 시집 전문 출판사 '문학과 지성사'가 있는 서교동 문지빌딩 1층 '詩와 안경원'에 신입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로 거짓말같은 내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젯밤 예진이누나가 카톡을 했다.
“유월아 내일 회사근처에서 같이 점심먹을까? 내일 시간돼? 뭐 먹을래?”의 물음에 난 "피자~"라고 짧게 답했다. 요즘 자주 연락중인 예진이누나는 문학과 지성사 편집2팀 경력 꽉 찬 대리다. 곧 과장진급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올해 춘삼월, 누나가 1층 우리 안경원에 안경을 맞추러 왔다. 같은 대학교 1학년 신입생 뽀시래기시절 마음에 두고 좋아한 적이 있던 국문과 2학년 팝송동아리 선배임을 한눈에 알아봤다. 그 전에 내가 고3때 누나가 졸업동문으로 자기 대학을 홍보하러 온 적이 있었다. 같은 동네사람이란 걸 알게 된 뒤로 동네떡볶이집 메이트가 됐었다. 기계공학과 졸업 후 회사를 다니다 말다 방황하는 동안 누나하고는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그리고 오늘 출근길 아침에도 어김없이 문지빌딩 입구에서 만났다. 하이얀 목이 살짝 보이는 벚꽃색 반목폴라티를 입은 누난 너무 예뻤다.
“좋은 아침~” 낭랑한 누나의 목소리에 나는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으응”하고 말았다. 3층에서 근무하는 누나는 이따 보자며 엘리베이터를 탄 뒤 손에 쥐고 있던 어느 시인의 시집을 흔들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나도 모르게 참았던 침을 꼴깍 넘겼다. 그 소리는 1층 로비를 크게 진동하여 다시 내 귀에 들어왔다.

안경원에서의 오전은 늘 그렇듯 안경테, 렌즈 전화주문으로 시작해서 전화영업으로 끝이 난다. 이제 좀 일하려고 내 자리에 오면 금방 점심시간이다. 11:55에 칼같이 누나의 카톡이 와있다.
"1층에서 기다릴게”

평소에 점심을 따로 먹는 부장님이 오늘 초밥을 쏘신단다. 아까 직원들에게 미진한 실적 건으로 쏘아붙인 게 미안했나 보다. 결국 고민하다 누나에게 카톡을 보냈다.
“미안한데 오늘 부장님이 같이 점심 먹자시네. 다음에 같이 먹자.”

초밥은 언제 먹어도 참 맛있다. 혼자 먹어도 맛있는데 실장님이 사주는 공짜 초밥은 더 맛있다. 일주일에 3일은 먹을 수 있는 음식 중 1번이 돼지국밥이고, 2번이 초밥이다. 예진이 누나가 초밥을 좋아하는 건 아는데 돼지국밥을 좋아하는지는 아직 모른다. 언제 한번 같이 부산에 돼지국밥 먹으러 가고 싶단 생각을 자주 한다.

누난 삐졌는지 오후 4시가 넘도록 카톡에 1이 없어지질 않는다. 내 바로 맞선임한테 잠깐 1층에 까페 좀 다녀오겠다고 하고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나의 컬러링은 10년이 넘도록 롤러코스터의 '습관'이었다. 마지막으로 들어가 본 게 언제인지 모를 내 싸이월드 미니홈피의 BGM도 이 노래일거다.

"습관이란게 무서운거더군
아직도 너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사랑해 오늘도 얘기해 믿을수 없겠지만
안녕 이제 그만 너를 보내야지
그건 너무 어려운 얘기~"

30초의 컬러링 연주가 끝나고 다시 '습관'이 시작될 때쯤 전화를 받았다.
“잠깐 1층 까페로 나와”
화장을 고친 건지 아님 싹 다 지우고 새로 화장을 한 건지 아침보다 더 예뻐 보였다. 난 점심만 먹고 나면 땀에 쩔어서 생선 고등어같은데. 툴툴거리면서 점심때 서운했던 거 얘기하는 입이 너무 예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하고 돌아서면서 누나가 말했다.
“너 오늘 꼭 칼퇴해. 이따 피자집에서 맥주 마실 테니까”

여섯시 땡하자마자 바로 누나한테 전화했다.
“누나, 나 오늘 일찍 마쳤어.”
“그래. 연남동에 맛있는 피자집 아는데 글루 갈까?”
2호선은 왜 탈 때마다 콩나물열차가 되는 걸까. 모두들 똑같은 아침 출근시간대에 타고, 똑같은 저녁 퇴근시간에 타서 그런 걸까. 전에 지하철역 스크린도어 앞에서부터 꼭 껴안고 출근하는 연인을 보고 한 번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출퇴근시간 지하철 안의 남녀 승객들이 모두 연인이라면 꼭 껴안고 타서 열차 안이 좁을 일은 없겠다.'라고. 누난 지하철에서 내릴 때 꼭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는 아이처럼 귀엽게 내린다. 잘못하다 승강장 사이가 먼 역에서 폭 빠져버릴 것만 같아 항상 마음이 조인다.

홍대입구역에서 나와 골목골목을 걸어가니 칼칼한 돼지김치찌개집도 보이고, 호이안 쌀국수집도 보이고, 인테리어가 아기자기한 까페도 보인다. 그리고 피자모양으로 네온사인된 가게에 들어왔다. 아직 밤은 조금 추워서 인지, 가게에 온풍기를 안 틀어서 인지 찬 기운이 든다. 오늘 따뜻할 줄 알았다며 입맛을 다시는 누나에게 네이비색 코트를 벗어 무릎 위에 올려주었다.

메뉴판을 보면서 정체모를 이름의 피자들을 소리 내어 읽어본다. 여자들은 메뉴를 읽으면서 모든 음식을 다 맛보는 거 같다. 남자와는 음식을 주문하는 방식이 좀 다르다. 피자가 나왔고 맥주가 나왔다. 피자와 맥주를 배경으로 각자 사진을 찍었다. 피자를 하나씩 손에 쥐고 건배를 했다. 피자는 자기 영역이 확실한 음식이다. 보통 피자 한 판이 8조각으로 나뉘는데 2명이 먹으면 4조각씩, 3명이 먹으면 2명이 3조각을 먹고 배려심이 많은 1명은 샐러드 많이 먹으면 된다며 2조각만 먹는다 한다. 4명이 먹으면 2조각씩은 좀 모자라니까 맛이 다른 2판을 시켜서 먹고 남으면 포장해가곤 한다.

난 치즈크러스트가 아닌 이상 피자꼬다리는 항상 남긴다. 그걸 누나가 집어 먹는다. 그게 엄마였다면 난 짜증에 짜증을 냈을 텐데.  그러면서 나보고 피자 한 조각 더 먹으라고 접시에 덜어준다. 자긴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셔서 배부르다며. 볼이 빨개진 누나가 너무 예쁘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면 놀이동산씬이 있다.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한석규에게 심은하가 푸른색 파워에이드 뚜껑을 따서 “이것두 마셔요”하는데 그게 너무 부러웠었다. 오늘 피자집에서 소원성취했다.

남은 맥주잔을 다 비우고 누나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나는 카운터에서 계산을 했다. 그리고 창밖을 보니 창문에 빗방울이 맺혔다.
“언제 계산했어? 내가 사주려고 그랬는데 힝”
가게 입구에 서서 와인색 천막 밖으로 손바닥을 내밀어보니 비가 금방 그칠 거 같진 않아 보였다.
“누나, 잠깐 기다려. 내가 우산 사올게”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빗속을 뛰어나왔다. 가까울 줄 알았는데 편의점은 꽤 멀리 있었다. 우산을 사가지고 돌아왔더니 누난 내가 비를 너무 많이 맞았다며 젖은 내 코트와 머리칼을 턴다.

우산 속에 누나를 씌우니 폭하고 안긴다. 내 팔뚝에 누나 가슴이 이렇게 가까이 닿긴 처음이다. 술 깬 지 오래됐는데 다시 취한 거 마냥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하필 우산을 또 빨간 걸 사가지곤. 누난 빗속을 걸으면서 내게 말했다.
“네가 요만할 때 내가 동네슈퍼에서 마이구미도 사주고~ 학교 앞 분식집에서 떡볶이랑 순대, 오뎅도 사줬는데 언제 이렇게 컸대?”
“키는 내가 원래 더 컸거든!”
누나가 듣더니 팔을 간지럽게 꼬집는다. 첨엔 그냥 그랬는데 누나가 자꾸 좋아진다.

나도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가 있었으면 좋겠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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