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설악산을 좋아한다.
봉정암에서 바라본 풍경이 최고였다며 기회만 생기면 자랑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남편의 입김으로 추석연휴에 큰 시누이 부부와 함께 찾은 설악산은 온종일 비가 내렸었다.
비옷을 입고 질척이는 산길을 이동한다는 건 등린이(등산초보자)에게는 더욱 무리였었다.
아쉽게도 백담사에서 출발해서 5km를 지난 수렴동대피소에서 우리는 결국 하산을 결정했다.
쉽사리 길을 내어주지 않았던 설악산 봉정암을 다시 찾은 건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후였다.
10월 마지막주 일요일과 월요일(1박 2일)을 이용해서 다시, 설악산 봉정암 산행을 계획했다.
우선적으로 비예보가 없는 날짜를 확인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함께 움직여야 하는 동선을 고려해서 출발 하루 전 큰 시누네 집에서 잠을 청했다.
이튿날 새벽에 등산배낭 4개를 자동차 트렁크에 가득 싣고 출발했다.
동이 틀 무렵, 가을색으로 물든 강원도의 산세와 풍경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찍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백담주차장은 만차에 가까웠다.
자주 내리던 비도 그치고 오랜만에 맑은 설악산을 만끽하려는 등산인파가 몰린 것이다.
백담사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들의 행렬도 지난번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
백담사 셔틀버스는 운행기사들이 통합 무전기로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며 운행을 한다.
교행이 가능한 지점에서 교차운행을 해야 원활한 왕복운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S자 협곡을 운전하는 기사님들의 노련함으로 창밖의 가을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우리는 백담탐방지원센터 앞 단풍 아래에서 준비한 김밥과 감자떡을 먹고 본격적인 아침산행을 시작했다.
아련한 사연을 품은 백담계곡의 수많은 돌탑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반겨주고 있었다.
무료로 따뜻한 차와 믹스커피를 제공해 주는 영시암까지는 무난하고 평탄한 코스였다.
두 번째라 익숙한 수렴동대피소에서 뜨끈한 라면과 햇반으로 점심도 먹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뀌는 풍경과 멋진 계곡(관음폭포, 쌍용폭포)은 움직이는 사진첩이었다.
에메랄드빛 폭포소리는 잡념을 삼키는 묵직한 백색소음 같았다.
봉정암을 500미터 앞둔 지점인 깔딱 고개(해탈고개)에서는 자신과의 힘겨운 싸움을 경험했다.
단순히 재미있는 이정표라는 생각은 큰 착각이었다.
급경사의 돌계단을 오르는 내 몸뚱이는 하염없이 무거웠고 나도 모르게 순례자의 마음을 닮아갔다.
해발 1,244m에 위치한 봉정암이 수행의 성지가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중의 한 곳으로 부처님의 사리탑이 있는 성스러운 봉정암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5시간이 넘는 산행 끝에 도착한 봉정암에서 숙박을 위한 자리배정을 받고 나니 긴장이 풀렸다.
무료로 제공해 주는 미역국과 볶음 김치를 저녁공양으로 먹으니 듣던 대로 꿀맛이었다.
두꺼운 외투를 챙겨 입고 신성한 기도장소인 사리탑 앞에서 소원을 담아 절도 올렸다.
그토록 봉정암의 풍경을 자랑하던 남편의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사리탑 언덕에서 바라본 용아장성과 공룡능선의 풍경에 압도되어 '와..'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얼떨결에 도전한 등반이었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나만의 묵상과 울림이 있었다.
깔딱 고개에서 네발로 걷고 싶었던 마음
낯선 사람들과 섞인 불편하고 비좁았던 잠자리
뜨거운 온돌 방바닥에서 몇 번이나 잠을 설친 하룻밤
소박하고 따뜻한 미역국 한 그릇
가방에 담아 내려온 내가 만들어낸 쓰레기들
산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의 눈높이.. 등등
하산을 앞두고 봉정암 해돋이를 보면서 다시 한번 생각했다.
지금, 오늘 하루를 감사하며 잘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