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반도국립공원
여행의 첫걸음은 변산반도 서쪽해안의 '채석강'에서 시작됐다.
간조(물이 빠져 수면이 낮아진 상태)에 밀려간 파도의 빈자리를 하늘에 닿은 바다와 해안절벽이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처음 본 '채석강'의 침식된 퇴적암층은 수천만 권의 책을 차곡차곡 포개 놓은 듯 자연의 예술작품이었다.
어쩌면 퇴적암이 만든 한 줄 층도 안 되는 인간 한 세대의 시간은 얼마나 짧은 찰나일까 싶었다.
7천만 년 전 퇴적암층을 걸으며 오늘 하루, 나만의 여행을 기대해 보았다.
말 나온 김에 여행을 왔다.
고민은 없고 결정만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무심코 저지르면 여행이지 거창한 게 아니었다.
친한 동생의 제안에 망설임 없이 "그래, 여행 가자!"였고 즉시 여행앱을 켰다.
처음엔 대통밥과 떡갈비정식에 입맛이 끌려서 담양버스 당일여행을 예약했었다.
다음날, 여행사 측의 내부사정(신청인원 부족)으로 취소되어 결국, 부안 채석강과 내소사 여행으로 변경했다.
담양이 아니라서 아쉬움은 없었다.
어차피 모든 것은 시절인연(時節因緣)으로 통하고 함께하는 여행이면 그만이었다.
평일 새벽, 서울역 광장에서 여행사가 마련한 리무진 버스에 올랐다.
동이 트는 어스름한 새벽의 도시풍경이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마지막 탑승장소인 잠실역에서 모든 좌석들이 채워지면서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았다.
탑승시간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가이드는 거듭 칭찬과 감사를 말했다.
물 때 시간을 지켜야 가능한 관광 때문이라고 했지만 가이드로서의 친절하고 노련한 성품이 느껴졌다.
당연하고 사소해도 칭찬하고 감사할 줄 아는 게 멋있는 거구나 싶었다.
같은 여행일정으로 모인 다양한 사람들과 좁은 버스라는 공간을 공유하는 감성도 특별했다.
단짝친구, 모녀지간, 소모임 등의 어울림마다 풍겨지는 분위기도 달랐다.
우리 앞 좌석에는 소모임으로 보이는 연세 지긋한 분들이 모여 앉으셨다.
미리 한 분이 좌석을 맡아 둔 덕분으로 무리 지어 앉게 되신 모양이었다.
그분들은 좌석에 앉음과 동시에 각자 준비해 온 간식들을 경쟁하듯이 내놓기 시작했다.
꿀떡, 샤인머스캣, 사과대추, 귤, 샌드위치, 모시떡이 쉴 새 없이 물물교환 하듯이 공중을 오갔다.
재미있는 건 청일점으로 섞인 남자 한 분이 분위기 메이커로 보였다.
“어쩜 6명이 겹치는 거 하나 없이 전부 다른 간식을 준비해 왔는지 신기하네”(남성분)
“그러게요, 사전에 약속한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여성 총무)
“우린 정말 운명적 모임이 맞는 거 같아”(남성분)
“하하 호호”(일제히)
자화자찬으로 소란한 모임처럼 보였지만 한 편으로는 인간미도 느껴졌다.
그 남성분은 어떤 역할과 사연으로 여성들 모임에 홀로 존재하게 된 것인지 탐색본능이 발동되기도 했다.
여성분들의 섬세한 시중은 물론 듣기 좋은 대화를 주도하거나 사진도 멋지게 찍어주는 절대 남편이 할 수 없는 일을 해 내고 있었다 ㅎㅎ
낯선 사람들의 행동이 관찰되고 본의 아니게 말투를 엿듣게 되는 것도 관광버스의 공간적 묘미 같았다.
앞서 말한 자연의 시간에 느낌표를 갖게 했던 ‘채석강’을 시작으로 버스는 고대하던 점심장소로 이동했다.
사전에 가이드의 설명처럼 백합탕과 백합찜, 갑오징어 무침 등의 남도 한상차림은 정말 기대이상이었다.
소금 간 조차 하지 않았다는 백합탕의 뽀얀 국물은 텀블러에 소장하고 싶은 깊고 진한 감동의 맛이었다.
깊은 남도의 맛과 후한 인심으로 배를 채우고 우리 버스는 천년고찰인 ‘내소사’로 향했다.
입구에서 시작된 전나무숲길은 오대산 월정사의 전나무숲길보다는 길지도 않고 평탄해서 걷기 좋았다.
천왕문을 지나 돌계단 위 안마당에는 천년의 느티나무가 늠름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만사형통과 소원성취의 글귀들이 맑은 풍경소리와 어울려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예뻤다.
내소사 대웅보전은 무채색의 단청과 정교하게 깎은 꽃문살(연꽃, 모란, 국화 등)이 독특했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은은하면서 섬세한 불교의 상징과 의미를 차분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미륵바위가 한눈에 보이는 가을벤치(대장금 촬영위치)에서 동생과 머물렀던 시간이 긴 여운으로 남는다.
짧은 하루여행이었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젊은 시절의 여행은 남들 시선을 따라 하기 바빴다.
유명세에 떠밀려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보고 더 근사하고 예쁜 사진을 담을까만 고민했었다.
어느덧 중년에 바라본 여행은 조용히 내 안으로 초점이 모아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내가 살아온 인생의 경험치와 눈높이만큼 여행을 읽고 해석하고 마음을 다독일 줄 알게 되었다.
그래, 또 여행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