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 & 채움

by 초록맘

가을은 다정하고 믿음직한 치유제다.

좁쌀 같은 붉은 발진들이 정말 귀신같이 싹 사라졌다.

땀띠에서 해방된 몸의 일부가 제일 먼저 가을의 선선함을 체감했다.

거실에서 멈출 줄 모르며 돌아가던 선풍기도 이제는 장승처럼 말이 없다.

여름과 가을의 무심한 변화처럼 비움과 채움이 어느 날 나를 웃게 만들었다.




숨 막혔던 여름에 매몰되고 미뤄졌던 일정들이 다이어리에서 쏟아지는 계절이다.

그중 하나가 종합건강검진 예약이었다.

남편 회사에서 제공하는 배우자 건강검진으로 사전 신청서를 제출했다.

며칠 후 예약일자를 확정하기 위해 검진센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공통항목 외에 추가 내시경검사에 대한 질의응답이 있었다.

대장내시경 검사를 위한 준비 과정은 난이도 최상급의 미션 같다.

지난번에도 부득이 장정결제 복용 실패로 검사를 받지 못했었다.

특히 가루약을 물에 희석하면 이상한 역겨움이 가장 힘든 문제였다.

“ 간호사님! 장정결제 알약(오라팡)은 없나요?”

“ 올해부터는 알약이 있습니다”

“ 정말요?”

해당 검진센터에도 드디어 알약복용 검사가 시행된 모양이다.

별 기대 없이 던진 질문이었는데 벌써 마음이 폭죽을 터트리며 춤을 췄다.




드디어 대장내시경 알약 복용 미션수행이 있는 날 저녁이었다.

전날 먹는 장정결제 알약(14정)과 따뜻한 물 한 주전자를 준비했다.

비위가 약한 나에게는 알약조차 비장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TV를 켰다.

리모컨을 들고서 무작정 넷플릭스 검색 방향키를 움직였다.

그때 눈에 들어온 ‘밥정’이라는 제목에 손동작이 멈췄다.

알고 보니 방랑식객으로 유명한 임지호 셰프 본인의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TV프로그램에서 훈훈하고 인간적인 이미지로 느꼈던 분이었다.




영화 한 편에 기대어 나의 비움을 시작해 보았다.

물 300ml를 먼저 마시고 알약 2정을 삼킨 후 영화 재생 버튼을 눌렀다.


눈보라 치는 겨울 산속을 주인공이 힘겹게 걸어가는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때로는 바닷가 절벽을 기어올라 뭔가를 열심히 캐거나 뽑았다.

나무든 풀이든 그냥 지나치지 않는 모습이 사뭇 진지하고 간절해 보였다.

편하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도 많은데 왜 저렇게 고생할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영화에 집중하다 보니 10분 간격으로 먹는 그 알약이 대수롭지 않았다.




제주 바다에서 물질하는 해녀를 바라본다.

해녀가 수확한 해산물이 가득 담긴 그물주머니에 거리낌 없이 자신의 등짝을 내어주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고 등짝에 더러운 얼룩이 생길 걱정 따위엔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해녀를 위해 청각초밥으로 밥상을 차리고 떠나는 뒷모습에서 묵직한 진심이 엿보였다.

만나는 시골어머니들과 허물없이 소통하고 잡초와 이끼, 솔방울조차 건강한 식재료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영화 줄거리의 기본 바탕은 다름 아닌 임지호 셰프의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었다.

생모가 재혼한 친아버지에게 세 살 된 자신을 맡기고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세상밖으로 떠도느라 마음으로 길러준 양어머니에 대한 진심을 몰랐던 미안함도 사무쳤다.

길 위에서 만난 평범한 어머니들께 밥으로 정을 전하고 결핍된 그리움을 채워나갔다.




마지막 장면엔 임지호 셰프가 3일 밤낮 동안 혼자서 제사상을 준비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돌아가신 세 분의 어머니들을 생각하며 전국을 누비며 자연 식재료를 모두 모은 것이다.

길에서 만난 김순규 할머니집 대청마루에 육해공 음식들이 수많은 접시 위에 빼곡히 차려진다.

도저히 영상을 보고도 믿기 힘든 임지호 셰프의 깊은 인간애가 담긴 놀라운 상차림이었다.




현실과 영화 속 스토리가 비움과 채움의 묘한 맥락으로 내 몸과 마음을 넘나들었다.

나의 미션은 해피앤딩으로 막을 내렸지만 그리움에 대한 울림이 진하게 차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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