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첫 일출을 보러 가자는 남편의 제안에 말없이 이불속으로 숨어 버렸다.
체감온도가 영하 18도까지 떨어졌다는 일기예보에도 남편은 용감하게 운동화를 신었다.
기어코 혼자서 남산일출을 보고 허기져서 돌아온 남편을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토마토 3개를 갈아 넣은 카레라이스와 가자미 구이를 조촐한 밥상메뉴로 올렸다.
잘 익은 김장김치까지 가족들의 새해 아침 입맛을 거들었다.
그 덕분에 카레냄새와 생선냄새가 집안 곳곳에서 춤을 췄지만 도리가 없었다.
환기를 위해 거실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가 너무 추워서 1분도 채 안 돼서 닫아버렸다.
새해 찾아온 기습한파는 음식냄새와 더불어 온 가족을 집안에 가둬 버렸다.
배를 두드리며 거실 소파에 기대고 있던 남편과 딸이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2’를 리모컨으로 불러왔다.
차가운 바깥공기 대신 넷플릭스 요리 프로그램으로 집안 공기를 환기시켰다.
설거지를 마친 나도 TV앞 소파에 앉은 부류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남편과 딸처럼 작정하고 보진 않았지만 매 화마다 '생존'과 '탈락'이라는 긴장감이 몰입감을 더했다.
마침, 3라운드 흑백팀전 최종결과가 소개되고 있었다.
최종 심사위원인 이모카세의 결정적 한 표가 백수저를 선택하면서 혼돈의 장면이 연출되었다.
전원 생존한 백수저 요리사들과 전원탈락한 흑수저들의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패자부활전으로 흑수저 2명이 생존하면서 총 14명이 2인 1조씩 팀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팀별 요리는 맛과 완성도는 물론이고 서로 다른 요리 스타일의 조화와 협업을 심사기준으로 보는 듯했다.
완성한 순서대로 백종원과 안성재 셰프의 심사와 평가를 받아 생존과 탈락 존으로 각각 이동하게 되었다.
요리를 만드는 과정부터 결과를 기다리는 모든 순간이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안성재 셰프식 심사평가 용어에 묘하게 중독되어 갔다.
우리말과 영어를 섞은 심사에 처음엔 "뭐야" 했지만 자꾸 들으니 알 수 없는 음식맛이 그려졌다.
even, pure, creamy 등의 형용사들이 삽입되면서 섬세한 맛의 오감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국물의 텍스쳐(texture)가 매우 크리미(creamy)하면서도 가벼워”
“모든 재료가 perfect even으로 익었어요”
“so pure 해서 명장다운 본연의 풍미가 인상적이에요”
“greasy 함 zero가 사찰음식의 철학을 잘 보여줍니다”
“juicy 한 육즙이 잘 살아있네”
미슐랭 셰프의 전문가적 맛 표현이 아리송하고 궁금해서 AI 검색엔진을 켜가며 시청했다.
안성재 셰프가 요리의 핵심 평가기준으로 자주 언급하는 표현들에 대한 AI 해석이다.
‘텍스쳐(texture)’는 음식의 단단함, 부드러움, 바삭함, 쫄깃함 같은 물리적인 질감을 말한다.
씹을 때 입 안에서 느끼는 압력, 저항, 파열감 등이 포함되어서, 맛과 함께 전체적인 만족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본다.
‘주시(juicy)’는 보통 육즙/과즙이 많은, ‘촉촉한’ 뜻으로, 한 입 베었을 때 안에서 물이나 육즙이 흘러나오는 느낌을 말한다.
영어공부 채널인가 헷갈릴 정도로 셰프들의 용어를 검색하는 손이 바빠졌다.
아이스크림을 쥔 남편과 딸이 그리고 내 손에는 AI 검색엔진 휴대폰이 통역 비서처럼 들려있었다.
온종일 한파에 갇혔지만 집에서 틈새 영어공부를 한 것만 같았다.
오늘 배운 영어 맛 표현을 가족들 앞에서 슬쩍 쓴다면 어떤 표정들이 나올까?
어딘가 퓨어(pure) 하지 않아서 그리시(greasy)하겠지?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