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hour
귀가 시간이 늦어지는 아이 걱정에 나가보니
숨 넘어가는 웃음소리가 한산한 동네를 채운다.
여자친구와 통화 중인 아들이었다.
언제 저런 웃음소리를 들었더라.
얼마 전, 인생 첫연애를 시작한 아들에게 golden hour라는 노래를 추천해줬다.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에 겨워 엄마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꽤나 노골적인 가사의 음악이었는데
며칠 뒤 아이에게 난생 처음 듣는 음악으로 답이 돌아왔다.
엄마가 좋아할 음악인 것 같다며
"엄마가 좋아할만한 음악이 뭔데?"
"잔잔한 비트에 낮은 목소리 남자 노래."
아이가 듣는 음악은 내 영역을 넘어섰고
엄마의 취향은 간파당했네.
D4dv- Here With Me
Watch the sun rise along the coast
As we're both getting old
I can't describe what I'm feeling
And all I know is we're going home
(중략)
And all the time we spent Waiting for the light to take us in
Have been greatest moments of my life
처음 받아보는 아들의 추천 음악에 귀 기울여본다.
가사도 찾아보고
사랑 노래에 기어코 모자 사이를 꾸역꾸역 대입해보며
중년의 엄마와 음악으로 소통할만큼 훌쩍 자란 아이를 붙든다.
노래 한곡에 이럴 일인가 싶지만
요즘 아들과의 생활을 돌이켜보면 이 또한 감개무량하다.
친구들과 PC방 오픈런을 불사하고
하교 후 인기척도 없이 스마트폰과 한몸이 되는 아이.
왕복 세시간 거리의 동네를 오가며 장거리 연애를 이어가고
그런 날이면 꼭 해가 져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
조언이라도 하려고 분위기를 잡으면
"알아서 할게"를 시전하며 입을 막는다.
진로나 학업 관련 이야기는 꼰스럽다며
웹툰, 게임, 쇼츠로 도망쳐버리는 아이를 견디는 나날이었다.
실은,
폭언과 욕설을 한바탕 퍼붓고 아이의 핸드폰을 창밖으로 내던지고 싶은
내 밑바닥 욕구와도 싸우던 시간이기도 했다.
한 때 친구들 사이 '타이거맘'으로 불릴만큼
사내아이 둘을 키우면서도 책육아와 엄마표 영어에 기웃댔고
해외살이 하면서도 시기별 읽힐 책들을
선박으로, 항공으로 그득그득 챙겨 읽혔다.
육아서며 교육 유튜브며 입시설명회에도 열을 올렸으니
아이들의 생활 전반을 주무르던 엄마였다.
애들 기질이 순해서 가능했던 것들이
어느새 아이를 원하는 모습으로 빚어낼 수 있겠다는 오만함의 근거로 변해갔다.
하지만 중딩 사내아이의 엄마로 산 지난 몇년 간
공들여 쌓은 기준들은 정신없는 속도로 무너져내렸고
엄마의 논리나 호소는 더이상 아이에게 닿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도 없는데 놓아지지도 않는
무기력과 불안의 이중주.
사춘기 입성 3년차.
스마트폰 시간 제한 앞에 학생 인권을 이야기하며
내일을 위해 일찍 자라는 말에 수면의 자유를 논하는,
부모보다 키도 목소리도 커진 아이가 불쑥 찾아왔다.
이제 적응이 되어가는지
진짜 그런 거 아닌가? 인권? 자유?
아이의 말에 눈빛이 흔들리고 의구심이 드는 경지에 이르렀다.
어쩌면 그동안 아이에게 좋은 것을 준다며
엄마가 더 많이 안다고
너무 멋대로 선을 넘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자기검열도 해보고.
아무리 곱씹어도 도저히 아들이 이해 되지 않는 어떤 날은
고3 어떤 날의 기억을 꺼내 마음을 다스려본다.
시험이 코앞인데 소파에 누워 드라마 본방사수하며 키득거리던 나를 식구들 누구도 핀잔 주지 않았던 기억.
외부 상황이 어떻든 꿋꿋하게 잠깐의 여유를 사수하고 그 여유가 온전히 지켜졌던 기억.
고3도 그러했는데 내 DNA 받은 중3 아들이 뭐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언젠가 친정엄마에게 그 때 속 좀 끓이지 않으셨냐고 여쭈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온다.
"엄마가 못배워서 그런지 우리 아들 딸은 그냥 알아서 잘 할 것 같았어."
아이와 투닥거리며 지내다보니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건 정성이나 정보가 아닌 기다림이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는다.
결국에는 아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그려낼 것이라는 '믿음'이 깃든 기다림.
아이가 온힘을 다해 부모 손을 벗어나려 애쓰는 이 시간이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진짜 자신답게 살기 위해 주어진 시간이 아닐까.
아이로 가득 채웠던 마음을 진짜 주인에게 내어줄 시간이자
아이의 삶에 과몰입하는 대신 뒤로 한 발짝 떨어져 내 삶을 돌보는 골든아워.
너는 너답게, 나는 나답게 그렇게 채워지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