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인생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이건 정말 몰랐다. 우리가 독일에 간다고?
스위스 남편을 만나 그곳에서 공부도 하고 직장도 다녔다. 두 아이를 낳았고, 가정을 일구면서 스위스에 뼈를 묻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둘째가 태어날 즈음, 남편에게 찾아온 좋은 기회! 스위스 정부 지원금을 받아 미국 유명대학에서 연구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짧으면 2년, 길면 3년. 장기 휴직이 안 되는 게 아쉽지만, 해외에서 나 혼자 갓난아이 둘을 키우며 직장 생활을 하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기에 퇴사를 결심했다. 그렇게 네 식구가 캐리어 네 개, 유모차 한 개, 카시트 두 개를 챙겨 대서양을 건너 미국 서쪽 끝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갔다.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우리 동네, 브베(Vevey)로 돌아올 날을 기약하며…
햇빛 짱짱한 캘리포니아에서 2년의 시간을 보낸 뒤, 또다시 이삿짐을 쌌다. 행선지는 스위스……가 아니라 옆 나라 독일. 알프스 산맥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좁은 땅덩어리에다 인구수도 적고, 대학 진학 인구는 더 적은 스위스. 대학에서 연구를 업으로 삼는 남편에게 마땅한 자리가 많지 않았다. 대신 명성이 자자한 독일 연구기관에서 러브콜을 보내왔다.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독일 어느 도시라고 했는데, 처음 들어보는 곳이라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몰랐지만 가기로 했다.
독일을 가로로 삼등분했을 때는 중부, 세로로 나누면 동쪽에 위치한 라이프치히. 웅장한 중앙 기차역과 구도심 곳곳에 있는 고풍스러운 교회와 건물들을 보니 왕년에 잘 나갔던 도시였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하나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줄지어 늘어서 있는 성냥갑 같이 생긴 멋대가리 없는 아파트와 지저분한 그라피티를 잔뜩 묻힌 채 방치되어 있는 폐허. 공산주의가 할퀴고 지나간 상처가 아직도 다 아물지 않은 모습에 사연 많은 서글픈 도시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역사 속에서 흥망성쇠의 굴곡을 경험한 라이프치히는 내게도 극과 극을 오가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선사했다. 완벽한 이방인이라 느끼게 했다가도 더없이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연에게로 나를 이끌었다. 까막눈이 되어 내가 이렇게나 무능했나 한탄하게 했지만, 크고 작은 짜릿한 성취감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말로만 듣던 경단녀가 되어 십원 한 장 벌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휩싸이게 했다가도, 엄마라는 역할과 소명을 통해 보다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게 했다. 한 마디로 라이프치히는 내게 인생 최고의 유격 훈련장이었다. 순한맛 매운맛을 오가며 끊임없이 나를 시험하고 단련시키는.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지금도 가끔은 우울함, 외로움, 혹은 자괴감이라는 인생의 씁쓸한 맛에 인상을 찌푸리기도 한다. 허나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착실히 모아놓은 뿌듯함, 즐거움, 감사함이라는 달콤한 알사탕도 이제 한 호주머니쯤은 된다. 입이 쓸 때면 모아놓은 사탕 하나를 꺼내 입에 물어 넣을 정도의 여유는 생겼고. 나처럼 낯선 곳에서 적응하면서 아이를 키우느라 고군분투하고 있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속상한 마음은 털어내고, 서로에게 위로와 용기가 되는 말을 나누고 싶다. 쓴 입을 달랠 수 있는 알사탕 한 움큼과 함께 어렵게 빚은 작은 여유 한 조각을 곁들여서.
달콤한 ‘메이드 인 저머니’ 사탕, 함께 나누시겠습니까? (주의! 눈물 콧물이 묻어있는 짠내 나는 단맛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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