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게 사는 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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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뾱아! 네 편지를 받고서는 얼마나 깔깔 웃었는지 몰라. 포레스트검프와 리틀포레스트를 헷갈리는 ㄱ언니라니. 그래서 너를 김태리에서 톰 행크스로 바꿔버린 언니라니. 그 언니가 누구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쩐지 허당끼가 있는 것 같아 마음이 가네. 허당끼라면 나도 어디가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편이라 그런 사람들 마음을 잘 알거든. 얼마 전에 엄마 환갑 파티를 육갑 잔치라고 잘못 말해서(아마 육십과 환갑 사이에서 길을 잃었던 게 아닌가 싶어) 흠씬 혼이 났거든. 삶이 우당탕탕이야.
솔직히 나도 리틀포레스트의 김태리처럼 사는 것과, 포레스트검프의 포레스트처럼 사는 것 중에 선택한다면 후자를 고르고 싶어. 봄동을 뽑아 뚝딱 배춧국을 끓일 줄 아는 것도 꽤 멋있어 보이지만, 어쩐지 하는 일마다 잘 풀리는 포레스트의 삶이 더 흥미진진하달까? 탁구만 쳐도 탁구왕이 되고, 새우잡이를 배를 타면 만선이 되고, 전쟁터에 나가도 총알이 포레스트만 피해가잖아. 인생은 초콜릿 한 상자 같아서 뭘 먹게 될지 모른다고 말하면서 말이야. 다행히 너의 강릉살이처럼, 내 서울살이도 좀 포레스트검프랑 닮은 것 같아. 프리랜서이자 글쓰기 노동자로 홍대에 산다는 건 도통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삶 같아. 어제는 전쟁터에 있었는데, 오늘은 탁구를 치고 있기도 하고, 내일은 태평양에 있게 될 수도 있으니까.
네가 오는 홍대 그 집에 산 지가 벌써 6년이 넘었어. 그런데 내가 서울에 사는 게 이번이 처음인 거 아니? 우리 부모님 집은 남양주거든. 학교 다닐 때는 남양주에서 서울에 있는 학교까지 왕복 세 시간을 참으며 다녔고, 취업했을 때도 남양주에서 강남까지 지옥의 통근길을 참아냈거든. 우리가 만났던 대학 일학년 때 술자리에서 나는 열 시 사십 분만 되면 일어나야 했어. 막차 때문에. 신입생에게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는 열 시 사십 분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을 시키는 건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에게나 하는 짓이 아니겠니?! 내가 인내심이 없는 건 그때 다 써버렸기 때문이야. 그 후에도 분당에서 일 년, 파주에서 일 년 살았지만 서울 주변을 뱅글뱅글 돌기만 했을 뿐 정작 서울에서 살아본 적은 없어. 일상은 다 서울에서 보냈으면서 말이야. 마음을 서울에 두고 몸만 주변부에 두는 건 서글픈 일이지. 괜히 서울에 대한 그리움만 쌓이게 하거든. 갖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갖지 못한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더 값이 올라가고는 하잖아. 내게는 서울이 좀 그랬어.
그래서 홍대 그 집에 살게 되었을 때 나는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몰라. 남들에게는 귀여운 수준이겠지만 내게는 평생 모은 돈을 그 집 전세금으로 턱 하니 내놓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을 때, 나는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았어. 그 집에서 파티도 많이 하고(그 집엔 무려 서른 명까지 들어갈 수 있더라고! 내가 넣어 봤어!) 연애도 많이 하고 일도 더럽게 많이 했어. 일 분만 걸으면 막 무슨 커피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는 바리스타도 있고, 분위기 좋은 칵테일바도 있고, 생생정보통에 나왔다는 맛집들이 쏟아지는 동네에서 산다는 건 신나는 일이더라고. (그런데 대한민국에 생생정보통이랑 6시내고향에 나오지 않은 식당이 있기는 한지 궁금한 지경이야) 물론 대충 지은 우리집은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고, 여름엔 창고에 두었던 고무판이 녹고 겨울엔 수도관이 얼지만 말이야. 눈도 못 뜬 채 잠옷 바람으로 헤어드라이어를 들고 수도관을 녹이는 일을 벌써 다섯 해나 반복한 거 있지.
다섯 해가 한계였는지 올해부터는 좀 지치더라. 나의 장기 중에 우리집에서 나오는 모든 소음을 한 번에 흉내 내는 성대모사가 있거든. (맞아, 요즘 같은 시대에도 장기자랑을 준비하는 나같은 관종이 있는 거야) 글이라서 들려줄 수가 없네. 뭐 이런 식이야.
“(버스 안내 방송을 흉내 내며) 387번 버스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삐비비빅! 삐비비빅! (경찰차 흉내를 내면서) 4885! 4885! 갓길에 차 세우세요! (구급차를 흉내 내며) 삐용삐용! (술취한 행인을 흉내 내며) 꺼지라고! 미친놈아!”
우리집에서 여러 밤을 보낸 너라면 이 소리를 들어봤을 거라고 생각해. 육차선 도로, 그것도 삼거리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우리집 앞에는 언제나 경찰차, 구급차, 취객이 함께 하지. 완벽한 삼합이랄까. 없는 잠도 달아나게 하고, 잠자는 숲속의 공주도 불면증에 걸리게 하는 소음이랄까. 그래서 강릉에 자리를 잡은 너와 집을 바꿔보겠다는 생각을 했을 땐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몰라. 나는 애인과 함께 휘바휘바 춤을 추었어. 한때 유행했던 휘바휘바 춤을 나는 아직도 추거든.
강릉에 친구가 있어서 집을 바꿔보자는 이야기를 하니까 내 애인이 그러더라고.
“그 친구는 원래 강릉이 집이야?”
“아니, 원래 고향은 청주야.”
“근데 왜 강릉에 있어?”
“아니, 선생님을 하거든. 고등학교 가정 선생님.”
“대학 때 너랑 같은 과라고 하지 않았어?”
“아니, 그때는 그랬는데...”
한 마디로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어.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처럼 끝날 듯 끝날 듯 이어졌지. 그러니까 네가 연고도 없는 강릉에서, 갑자기 선생님을, 그것도 가정 선생님을 한다는 게 내게도 너무 신기한 일이었거든. 애인의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까, 내가 너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알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고 보면 뾱이는 왜 학교를 다시 간 걸까? 왜 가정을 선택했을까? 학교는 다닐 만 할까? 그런 질문은 밥 먹었냐거나 지금은 뭘 하고 있느냐 같은 질문하고는 달라서, 어쩐지 각을 잡고 물어봐야만 할 것 같았고, 우리에게는 그런 시간이 달리 없었던 것 같아. 나는 마주 보고 앉아서 진지한 질문을 주고받는 그런 분위기를 못 견디는 사람인지라, 막연히 강릉에 가면 뭔가 알게 되지 않을까 싶었어. 네가 없는 강릉의 그 집에는 너의 흔적이 있어서 너를 알려주지 않을까. 사람의 진심이라는 건 직접 묻기보다 더듬어 찾는 게 낫지 않나. 뭐 그런 핑계를 대면서.
강릉 너희집에서 지내는 동안 내가 너에 대해 잘 알게 되었나? 그런 것 같아. 저 질문에 대한 답은 구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는 네가 여기저기 묻은 집의 흔적을 보면서 너란 사람에 대해 더 알게 된 것 같았어. 거실에 텔레비전 대신 기다랗게 누울 수 있는 해먹을 두는 사람이고, 작동을 멈춘 로봇청소기를 고치는 건 포기한 사람이지만 대신 집안 곳곳에 드림캐처를 걸어두는 사람이라는 거. 향을 좋아하는지 곳곳에 방향제나 인센스스틱을 두는 사람이라는 거. 공부방에는 하버드도서관의 풍경을 걸어둘 정도로 한때 열정을 불태웠었지만, 지금은 공부방이 약간 창고로 쓰이고 있다는 거. 화장품은 거의 없지만 에세이 신간은 꽤 가진 사람이라는 거.
여기저기서 너의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천장에 아사천을 둘러서 휴양지에 놀러온 것 같았는데, 어쩐지 아사천을 천장에 고정하는 동안 꽤나 고생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방에서 넷플릭스를 어떻게 설치해서 보는지 자세히 설명해둔 메모를 보면서, 네가 평소에 침대에 기대어 넷플릭스를 보는구나 싶었지. 솔직히 책장에 무슨 책이 꽂혀있는지야 우리가 연출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넷플릭스의 기록 같은 건 뇌를 꺼내 보이는 거나 다름없잖아! 네 넷플릭스 기록을 보면 우린 깐부가 되는 거라고! 헤헷.
무엇보다 부러웠던 건 방 한구석에 놓여 있던 돗자리와 물안경이었어. 강릉에 산다는 건, 게다가 걸어서 해변에 갈 수 있는 동네에 산다는 건 그런 거 아니겠니. 돗자리를 들고, 물안경을 목에 걸고, 슬리퍼를 끌며 해변에 갈 수 있다는 거 말이야. 날씨가 좋으면 우다다 바로 달려나갈 준비가 되었다는 거. 내 그런 마음을 눈치챘는지 두 번째 방문 때 너는 해변에서 들을 수 있는 블루투스 스피커를 준비해주었지. 자전거 비밀번호도 가르쳐주고 말이야. 네 말대로 강릉에 살면 나는 장기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너의 집에 머무르면서 나는 삶을 대하는 너의 태도를 본 것만 같았어. 냉장고에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먹지 않고 남긴 200mL짜리 흰 우유만 있지만, 인센스 스틱은 가득한 집에서. 세탁기는 초소형이지만 야외용 블루투스 스피커는 있는 집에서 말이야. 네게는 기능보다 분위기가, 효용보다 즐거움이 중요할 것 같더라. 그건 우아한 삶인 것 같아. 너는 우아하게 살더라, 뾱아!
너도 아마 우리집에서 나를 좀 발견했겠지. 네가 말한 얼굴보다 큰 부메랑은 사실 우리 언니가 호주 여행 갔다가 면세점에서 나를 위해 사온 거야. 하하. 내가 호주 어디 동네 공원에서 처음 보는 아이들과 신나게 주고받다가, 캐리어에 푹 꽂아서 가져왔을 거라고 생각했다니! 말하고보니 그런 척 아무 말도 안 할 걸 하는 후회도 든다. 상상 속에서 나는 그런 근사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서로에 대한 적당한 오해는 관계에 칠하는 기름이나 다름없다고!
여름과 가을에 너희 집에 머물렀는데, 이제 겨울에나 가게 되겠구나. 네가 말한대로 겨울엔 수영장도 다니고, 대관령 엘시가 보내주는 산바람으로 따귀도 맞아 봐야지. 딸기농원에서 올해의 첫 딸기도 먹고 양양 설해원에 가서 꽁꽁 언 몸도 살살 녹여야겠어. 취객의 고함 대신 고라니가 왁왁 우는 소리를 들으며 폭신한 네 침대에서 자야겠다. 겨울에 우리집에서는 즐길 게 꽤 많아. 옥상에서 불멍도 때릴 수 있고, 고구마도 구워 먹을 수 있고, 서울에 있는 집 치고는 보기 드물에 밤늦게까지 시끄럽게 기타를 뚱땅거릴 수도 있지. 너의 방문을 대비해 내가 긴 투두리스트를 준비해두려해.
그때까지 너도 건강해!
2021 집 바꿔 살기 가을 편을 마치며
p.s. 네가 왜 뾱이인지는 겨울편에서 말해줄게!